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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06화 (106/230)

그리고 이는 내가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의 약점이 될 테고.

내 단호한 태도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페이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후배님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래도 결투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내가 다 만들어 줄게. 응.”

“앗! 그럼 현자의 돌 만들어 주세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만!”

“그럼 페이 선배랑 1대1 사이즈인 호문쿨루스를….”

“그것도 못 만들거든?! 그보다 나랑 똑같이 생긴 호문쿨루스는 어디다 쓰려고?!”

“당연히 죽부인 삼아 매일 안고 자려고 했죠.”

“헉! 주인님의 죽부인은 제가 아니었나요?!”

기겁하는 페이와, 덩달아 화들짝 놀라는 카를라.

엘리샤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슬쩍 속삭였다.

“참, 귀엽게들 노네요. 그렇죠 당신?”

“둘 다 나보다 연상일 텐데 귀엽긴 해. 근데 너는 관심 없어? 내 죽부인 자리.”

“어머? 제가 카를라처럼 당신 발목에 매달릴 것 같았나요?”

촤악!

이번에 새로 사준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엘리샤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언젠가 저를 반려로 삼겠노라고. 부인 자리가 약속되어있는데, 죽부인 자리가 아쉬울 리가 없죠.”

“허….”

자신감 무야.

내가 했던 말이긴 하지만, 너무 철석같이 믿는 거 아냐?

물론, 지킬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투닥이며 장난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페이가 조금 전보다 훨씬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펠롭 브론델은 브론델 백작가의 소가주야.”

“엥? 겨우 백작가요? 말본새만 보면 무슨 대공가 자식 같던데….”

작위가 높다고 무조건 가문이 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

백작부터 고위 귀족으로 통하니, 백작위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더 높으신 분들이 넘쳐나는 아카데미에서 대놓고 양아치 짓을 할 정도는 아닐 텐데.

“브론델 백작은 뛰어난 연금술사이기도 하거든. 레반틴 제국 연금술 길드의 부길드장 자리를 맡을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거들먹댔던 거군요.”

집에서는 소영주, 밖에서는 부길드장 아들?

아카데미에 온 뒤로도 버릇이 안 고쳐질 만도 했네. 대부분이 알아서 설설 기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페이 루트를 진행하다 보면 연금술 길드와 엮이는 내용이 있다.

대충 요약하면 가능할 리 없다며 페이를 무시하던 길드가 실제로 명품급 장비를 찍어내는 페이의 모습에 후회, 집착, 피폐를 찍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그 과정에서 페이에게 엄청 꼽을 줬다가, 나중에 좌천당하는 간부의 대표가 바로 부길드장이고.

세상에. 이게 이렇게 엮이네.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페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대신 나서줄 챔피언은 차고도 넘칠 거야. 우리가 앞으로 뭘 하든 결국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건 싸우는 방법이고….”

“싸우다 보면 포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니까요.”

“응. …아! 그래도 이번 일은 펠롭 쪽이 잘못한 거라 대신 싸운다는 것 자체가 좀 이미지에 안 좋은 일이거든?”

“대충 알겠네요. 보상은 빵빵하지만, 명성이 깎이는 일이니 돈이 급한 학생들 위주로 나오겠죠.”

이건 H&A에도 구현된 시스템이다. 가끔 플레이 하다 보면 결투를 벌여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투직이야 그냥 자기가 나서면 그만이지만, 비전투직인 생산캐로 플레이할 경우 대리 기사는 필수다.

이때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으면 명예를 중요시하는 캐릭터를 구하기 쉽고, 반대로 상대에게 있으면 보상을 중요시하는 캐릭을 구하기 쉬워진다.

기준이 돈이다 보니, 대충 귀족이냐 평민이냐로 나뉘고.

대체로 귀족 출신은 직업이 골고루 분포된 것에 비해, 평민 쪽은 기사학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거기에 실력도 좀 뒤처지는 편이고.

대충 이런 식으로 상대의 챔피언을 예측하고 준비해가는 게 결투 시스템의 묘미.

게임이던 시절에야 등장하는 인물이 한정적이니, 상대로 누가 나올지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좀 힘들다.

그래도 대략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는 게 어딘가.

물론 지금의 나라면 카를라나 엘리샤같은 이례적인 상대만 아니라면, 누가 나오건 이길 자신이 있긴 한데….

펠롭에 이어 프랭크와도 결투를 해야 하고, 가능한 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니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결투 당일.

내 상대로 나온 펠롭의 챔피언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개꿀.”

결투를 신청하고 며칠 뒤. 드디어 찾아온 결투 당일.

아카데미 전체를 휩쓸던 내 소문은 그 불씨가 꺼지기도 전에, 결투라는 새로운 장작을 맞이했다.

“세상에. 1학년이 2학년, 3학년 선배랑 연달아 결투한다고?”

“바보야! 보통 신입생이 아니잖아! 그리고 한쪽은 대리인을 내보낼 테니, 다른 학년이 나올 수도 있어.”

“그렇긴 한데…어? 그럼 오늘 대주교를 쓰러뜨렸다는 실력을 볼 수 있는 건가?”

“아마도?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혼자 잡은 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아카데미 측에서 빌려준 대련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정구나 사역마들이 보인다.

대련장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저걸로라도 구경하겠다는 거지.

화제성이 좋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나야 사람이 몰리면 몰릴수록 좋긴 한데 이건 너무 많은 거 아냐?

묘한 기분으로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카를라가 쿠키 하나를 입가에 들이밀었다.

“주인님도 하나 드실래요? 아~”

“아-”

반사적으로 받아먹자 입안 가득 퍼지는 버터의 풍미와, 그 속에 숨은 초코의 찐득한 단맛.

“뭐야 이거. 되게 맛있네.”

“헤헤. 그렇죠? 저번에 시장 거리에서 샀던 쿠키에요.”

“카를라 네가 자주 갔었다는 그 가게에서 산 거지? 단골이 된 이유를 알겠네.”

“그쵸 그쵸? 제가 이거 먹고 너무 신기해서 직접 만들어 보려고도 했다니까요?”

“오…전직 영애가 만든 쿠키라니. 이건 좀 궁금하네.”

남자들에게 자기 여자가 직접 만든 요리는 로망 같은 것 아니겠는가.

앞치마와 오븐 장갑을 낀 카를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잠시.

어째서인지 알몸 앞치마로 장갑 대딸을 시작하길래,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엘리샤가 코웃음을 치며 부채를 촤악! 펼쳐,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어머? 혹시 작년 방학 때 구웠던 그 새까맣게 탄 쿠키 말인지요?”

“윽….”

“얀델. 카를라의 쿠키가 궁금하다고 하셨나요? 당장 아무거나 불태우면 대충 비슷한 맛이 날 거랍니다.”

“엘리샤! 그땐 맛있다며!”

“흥! 정말로 제가 맛있어서 맛있게 먹었겠나요? 만들어준 성의가 있으니, 선의의 거짓말을 베푼 거죠.”

“뭐어? 흥! 나도 예전에 네가 끓여준 차 하나도 맛없었어!”

“괜히 거짓말하지 마세요 카를라. 엘븐 티는 다른 나라에서도 없어서 못 먹는 고급 차거든요?!”

“그건 다른 종족에 맞게 블렌딩 한 거잖아! 감각이 예민한 엘프용 블렌딩 차를 마셔봤자, 나는 밍밍하기만 하다구!”

“아. …그래도 그땐 향이 좋다고 했잖아요!”

“엘리샤 너도 내 쿠키 맛있다며!”

“갸아악!”

“구아악!”

엘리샤를 마구 꼬집기 시작한 카를라와, 그런 카를라에게 마찬가지로 꼬집기로 대항하는 엘리샤.

아니, 매년 서로 초대해서 쿠키나 차를 나눠 먹었던 거야?

둘이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네.

뭐어…원래는 사이가 좋았었는데, 과도한 경쟁으로 틀어졌다고 했던가.

게임에서는 본 적 없던 엘리샤의 모습이나, 노예로서 내게 매달리던 카를라의 모습과도 다른 느낌.

이런 건 둘이 붙어있을 때나 볼 수 있는 거겠지.

카를라와 엘리샤의 과자 부스러기 흩날리는 싸움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배님 후배님. 이렇게 여유 부려도 괜찮은 거야? 10분 뒤면 결투 시작인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미 필요한 준비는 전부 마쳤잖아요. 남은 건 결투 때 온전히 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릴렉스하는 거죠.”

“너무 릴렉스한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이.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꼬옥 쥐었다.

키가 작아서 그런 걸까. 손도 작네.

“있잖아 후배님.”

“왜요 페이 선배.”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네?”

이건 또 뭔 소리람.

내 의문에 페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렇잖아? 이번에 약간의 성과를 내놓긴 했지만, 내 목표는 더 높은 곳이야. …그리고 아무도 내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질 않아.”

“뭐…당장 엘리샤도 처음에 듣자마자 하급 무기의 대량 생산부터 생각했으니까요.”

누구도 페이가 연금술로 완벽히 장인급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응. 그러니까 나한테 막대한 예산과 함께, 하고 싶은 연구를 보장해주는 건 후배님밖에 없단 말이지?”

단 하나. 나만 빼고.

거기까지 말한 페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 길게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슬쩍 드러난 검은색 눈동자는 뭐가 그리 불안한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나는 사실상 후배님에게 종속된 거나 마찬가지야. 굳이 후배님이 직접 다쳐가며 나서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건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를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고요.”

“으응. 그럼 말야. 내가 골목에서 뺨을 맞았을 때 수정구로 녹화 중이던 것도 내팽개치고 달려든 건 왜 그런 거야?”

“네?”

“후배님 입장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훨씬 더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 갑자기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제 좀 알겠네요.”

피식 웃으며 페이의 양쪽 볼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부으?”

오리처럼 입을 삐죽 내민 페이에게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 펠롭에게 들은 누구도 페이 선배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그 말이 신경 쓰이는 거죠?”

“그게….”

“거, 참 귀찮은 성격이시네요. 굳이 돌려 말할 필요 없는데. 그것도 결투 직전에 말이에요.”

“미, 미안.”

“그렇다고 사과할 것까지야…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려드릴 테니 잘 기억해두세요.”

괜히 페이의 볼을 쪼물 거리며 입을 열었다.

“페이 선배의 보호자는 접니다. 선배를 향한 모욕은 저를 향한 모욕이고, 선배가 맞은 건 제가 맞은 거나 다름없어요.”

“…….”

“저는 선배 편이에요.”

“…아.”

“그러니까 잘 지켜보세요. 감히 페이 선배를…제 사람을 건드린 녀석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에요.”

“응…그럴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지켜볼게.”

어쩐지 몽롱한 표정을 짓는 페이에게 한차례 씨익 웃어 주고서야 손을 뗐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곤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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