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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05화 (105/230)

이렇게 어중간하게 건드리면 오히려 원한을 품고 어디선가 문제를 일으키겠지.

차라리 이참에 완전히 밟아놔야 하는데.

“핫! 그, 그것도 큰 의미는 없을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이가 내 뒤에 숨듯이 달라붙으며 그리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 아니, 안 괜찮겠지. 얼굴 좀 봐봐요.”

“흣?!”

페이의 턱을 붙잡고 얼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어째서인지 눈을 꾹 감고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얌전히 내게 얼굴을 보이는 페이.

제법 강하게 맞은 건지 한쪽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

페이는 H&A에서도 상당히 좋아하던 캐릭터였다. 물론, 지금은 캐릭터라고 할 수 없으니 이는 일방적인 호감이겠지만….

그럼에도 페이를, 페이의 이야기를 좋아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모진 현실에 꺾일 뻔했지만, 자신을 알아준 한 사람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또 노력한 끝에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인간승리 이야기.

이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허나, 그런 페이가 말도 안 되는 요구와 함께 뺨을 맞았다.

심지어 내가 안일하게 방치해둔 소문이 기폭제 역할을 하기까지 했고.

“하아….”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인벤토리에서 상급 포션을 꺼냈다.

그러자 당황하며 물러나려는 페이.

“어…이렇게까지 비싼 포션을 쓸 정도는 아닌데?”

“페이 선배에 비하면 별로 비싼 것도 아니니까 잠자코 치료나 받으세요.”

“흐엑!”

어째서인지 딱딱하게 굳은 페이. 그 틈을 타 포션을 뺨에 펴 바르고, 나머지는 전부 먹였다.

상급 포션답게 빠르게 가라앉는 붓기.

다행이네.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시야 구석에서 슬금슬금 눈치 보며 도망치려던 금발 놈의 모습에 가라앉았던 분노가 순간 들끓었다.

빡!

“끄악!”

들고 있던 빈 병을 뒤통수에 던지자, 그대로 철푸덕 엎어지는 녀석.

등급이 높은 포션 병은 전투 상황에서도 깨지지 않도록 특수 처리되어 단단하다고 했던가.

사실인가 보네.

“으흐윽….”

엎어진 채, 신음을 흘리는 금발 놈. 녀석을 향해 일행인 여학생이 주춤주춤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포션으로 치료해도 별 의미 없을 거라 했죠? 왜요?”

“아, 응. 포션 중독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모든 포션은 고유의 독성이 있거든? 그 잔재를 추적하면 어디에 얼마나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어.”

“최상급 포션을 써도요?”

“그 비싼 최상급 포션을 이런 데 쓸 생각을 한 시점에서, 후배님이 얼마나 진심인지는 잘 알겠는데…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독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

“어…그럼 치유 마법이나 사제의 치유 신성술은요?”

“마법은 마나의 잔재가 남고, 신성술은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리는 거니 흔적은 안 남겠지만…사제님들은 이런 일 안 도와주실걸?”

“씁….”

맞는 말이다.

그럼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수정구로 찍은 내용만으로도 징계를 먹이기엔 충분하겠지.

내가 염력 마법으로 목을 조른 거나, 몇 대 줘팬 건 괜찮다.

에우렐리아 대륙은 정당방위에 꽤나 느슨한데다가 명예를 중요시하기 때문.

이 정도라면 명예 훼손에 대한 정당방위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설령 평민이라도 귀족보다 덜할 뿐, 명예의 가치는 무겁다는 게 이 세상의 인식이니까.

그리고 후원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을 키워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뜻.

후원 기간 동안 피후원자는 후원자로부터 돈만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비호를 받는다.

그걸 알면서도 페이에게 수작을 부리고, 뺨까지 때린다?

거기에 내가 페이에게 야한 의미의 스폰을 한다는 헛소문까지 들먹이고?

이건 보통 모욕이 아니기 때문.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더 이상 건드리면 나 또한 징계를 각오해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금발 놈이 이젠 안전하다고 여긴 걸까.

일행인 갈색 머리 여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흐하하! 감히 내게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다니!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실감 나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 안 나는데. 애초에 이름도 모르고.”

“…….”

H&A에는 등장한 적도 없는 녀석이라 이름도 모른다.

이는 이 세상의 주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중요한 인물이라 해도 똑같이 행동했겠지만.

“흐음….”

더 줘팰 수도 없고, 징계를 먹여봤자 퇴학까지는 안 당할 거다. 그렇다고 가만 놔두자니 분명 다시 문제를 일으킬 테고.

어떻게 해야 할까.

금발 놈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골목 바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놔, 놔라! 이 평민 놈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2학년이 됐으면서 아직도 자기 영지에서의 버릇을 못 버린 타입인가.

안절부절못하는 갈색 머리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카를라와 엘리샤가 양옆에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브…뭐시기라며.”

“…하! 브론델 영지의 정당한 후계자, 펠롭 브론델이 바로 이 몸이다!”

“그래. 펠롭 브론델.”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넝마가 된 2학년과, 그런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는 1학년.

하물며 나는 요즘 핫한 소문의 주인이 아니던가.

한창 시끌벅적하던 시장 거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내 쪽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주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짝!

“아악!”

녀석이 페이에게 그러했듯 펠롭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이어서 시장 거리 전체에 똑똑히 들리도록 선언했다.

“나 얀델이 펠롭 브론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내 결투 선언에 언제 고요해졌냐는 듯 빠르게 소란스러워지는 주변.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 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프랭크 밀러에게도 결투를 신청한다!”

기왕 일을 벌이는 거, 겸사겸사 들끓는 고요의 끄나풀도 조져야지.

당연한 말이지만, 결투는 하고 싶다고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랬으면 으슥한 곳에서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슥삭 하고는 결투였다고 우기는 식으로 악용될 게 뻔했으니까.

우선 결투 사실을 알리고, 타당성을 입증한 뒤, 참관인과 대중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러져야 한다.

에우렐리아 대륙 사람들은 명예에 예민한 만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인 결투에도 상당히 예민하니까.

뭐, 그 외에는 규정이 좀 널널하긴 한데….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전 대륙에서 재능 있는 이들만을 모아,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에 한곳에 모아두고 가르치는 아카데미 아닌가.

가장 낮은 C반의 학생조차 고향에서는 영재 소리 듣던 이들이다.

대부분이 자존심이 강하다 보니, 부대껴 지내면 이런저런 마찰이 생길 수밖에.

그래서 아카데미에서는 아예 결투 위원회를 조직했다.

아카데미 학생들끼리의 모든 결투는 위원회를 통해야 하며, 이를 무시할 경우 최대 퇴학에 이르는 징계를 내리고.

즉. 시장 거리에서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관련 서류를 작성해 넘겨야만 진짜 결투 신청이 된다는 소리.

“뭔가 수수하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죠 뭐.”

하기야.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겠지.

피식 웃으며 작성한 서류를 미리 준비해둔 수정구와 함께 제출했다.

골목에서의 모든 장면이 다 찍혔으니 결투가 반려될 일은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무슨 민원이라도 넣은 것 같네.

생각해 보니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그런데 주인님. 프랭크 밀러는 누구길래, 갑자기 튀어나온 거예요? 정말 그 사람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건가요?”

“응? 글쎄? 잘 모르겠는데?”

“…네?”

“근데 확실한 건 그 녀석이 사교도라는 거야.”

“아.”

정확히 어떤 사교도인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은 카를라가 눈을 크게 떴다.

실제로 지금 소문에 관련되어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결투에서 이기면 제대로 조사해달라는 정도는 요청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녀석이 들끓는 고요의 끄나풀이라는 게 밝혀지면, 자연스레 나를 향한 소문도 사그라지겠지.

누가 떡밥을 돌리는 순간, ‘그거 사교도들이 낸 소문이라는데…너, 혹시….’ 라는 분위기가 형성될 테니까.

뭐, 프랭크 입장에서는 참 당황스러울 거다.

얼굴 한번 마주친 적 없는 내가 자신을 콕 짚어 사교도라 주장하니.

“어쩌면 카를라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3학년 마법학부 거든.”

“이름만 알고 있었어요. 제가 중위 마법사에 오르자, 교수님들이 후배들에게 강연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그때 명단에서 봤던 기억이 있네요. …얼굴은 잘 생각 안 나지만요.”

“그렇겠지. 인식 저해 권능이건 다른 뭐건, 아무튼 존재감을 죽이고 있을 테니까.”

선신 교단 연합에 숨어들 수 있을 정도다. 아무리 카를라라도 그럴 꿰뚫어 볼 수 있을 리 없지.

결투 신청서 작성 도와주러 왔다가, 우리의 대화를 듣게 된 페이가 황당해하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후배님! 후배님! 그거 완전 위험한 이야기인 거 아냐?! 그렇게 확인도 안 하고 너 사교도지! 하면 오히려 후배님이 큰일 나는 건데?!”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보다 펠롭에 관한 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펠롭?”

이름만 들어도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는 페이.

그런 페이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설마 제작학부인 본인이 직접 결투에 나오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카데미 규정상 같은 학생 중에서 챔피언을 구해올 텐데, 누가 나올지 좀 궁금해서요.”

예전에는 가문의 사람이나, 외부 용병을 대리인으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애들 싸움이 집안싸움으로 번지기 전까지는.

학생들의 평일 외출이 금지당한 것처럼, 결투 또한 아카데미 측에서 나름의 제한을 건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시작한 일은 아카데미에서 끝나도록.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그냥 후배님도 대리인 내보내면 안 돼? 후배님 돈 많다며! 나, 다음 후원금 안 받아도 되니까 따로 사람 구하자. 응?”

“에이. 그러면 임펙트가 부족하잖아요. 이건 일종의 경고라고요. 연달아 결투를 신청한 것도, 일부러 골목에서 끌고 나와 시장 거리에서 결투 선언을 한 것도 그래서인걸요.”

“으윽…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난 정말로 괜찮거든?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후배님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했잖아요 페이 선배. 이건 일종의 경고라고.”

함부로 나를,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리는 일이다.

내가 펠롭처럼 직접적인 전투력이 전무한 제작학부도 아닌데 뒤로 뺀다? 이건 또 다른 씹을 거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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