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랬지. 응. 너. 요즘 후원받고 있지? 성적도 좋아지고, 재수 없게 매일 헤실대고 말이야. 그 후원자가 요즘 유명한 얀델이라는 애 같은데 맞아?”
“그게…왜?”
“맞나 보네. 그럼 내놔.”
“…뭐?”
“아, 돈이 부족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누구랑 다르게 나는 가문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있거든. 잠깐 빌리는 거야 잠깐.”
재밌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금발 놈.
그게 페이를 비웃는 소리라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듣자마자 바로 인벤토리에서 녹화용 수정구를 꺼냈다.
아카데미에서 삥뜯기라고? 미친놈인가?
요즘 아카데미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을 묵인할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다.
제대로 된 증거만 제출하면 합당한 징계를 먹일 수 있겠지.
카를라와 엘리샤도 같은 생각인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도중에 들키지 않도록, 기척을 숨기는 마법을 본격적으로 중첩시켰고.
그렇게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이.
코앞에 들이밀어진 악의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선을 방황하던 페이가 두 눈을 꾹 감으며 외쳤다.
“아, 안 돼! 못 줘! 이건 내가 받은 돈이야! 별일 아니면 나 이제 가볼….”
덥썩.
자리를 떠나려는 페이의 손목을 붙잡는 금발 놈.
“누가 벌써 보내준다고 했지?”
“이거 놔! 애초에 후원받은 골드는 다 썼다고!”
“그래?”
금발 놈이 살짝 실망하는가 싶더니,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돈이 아니라 다른 걸 빌리고 싶은데. 예를 들면…그 큼직한 주머니라던가 말이야.”
아니, 이 씹새가?
나만 놀란 건 아닌지 페이 또한 이놈이 제정신인가 하는 눈으로 되물었다.
“…뭐?”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번 소문으로 다들 알게 됐거든. 너는 완전히 가문에서 버려졌다는걸.”
“그…건….”
“아니라면 호색한 후배에게 몸을 팔아서 후원받고 있다는 소문에도 이렇게 모른 체 할 리 없잖아?”
“…….”
“이 아카데미에 널 지켜줄 사람은 없어. 바깥에도 없고.”
“읏…!”
“하지만 나는 달라. 약간의 대가만 있다면 졸업할 때까지 누구도 못 건드리게 해줄 수 있거든.”
그리 말하고는 슬쩍 페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녀석.
“어때? 후원을 거절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만하면 꽤 괜찮은 제안 같은데.”
“…괜찮긴 무슨!”
페이가 기겁하며 녀석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잡힌 팔을 마구 흔들며 뿌리치려 들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 그리고 이번 일은 교수님에게도 말씀드릴 테니까 빨리 이거 놔!”
“하….”
페이의 격한 반응에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쉰 녀석이 튕겨 나간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아니, 거 존나 비싸게 구네. 어차피 몇 번이고 대줬을 거 아냐? 가슴만 큰 잡종 년이!”
짝!
“꺄악!”
그리고 이어지는 폭력.
뺨을 얻어맞은 페이의 고개가 확 꺾이는 것을 보는 순간.
“더는 못 참겠네.”
증거고 나발이고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에 몸을 맡기고 전력으로 마나를 투사했다.
챙-!
기껏 카를라와 엘리샤가 겹겹이 시전한 은신 마법이 수용 한계치를 넘겨,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그리고.
“컥…커헉…!”
“끄윽….”
단번에 골목 전체를 장악한 마력이 두 연놈의 목을 휘감아 올렸다.
염력 마법.
가장 원시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신속한 마법.
대신 위력은 좀 떨어지지만….
기사나 마법사라면 모를까, 제작 학부로 보이는 저 둘을 붙잡는 데는 충분하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는 페이의 시선을 받으며, 금발 놈의 앞에 섰다.
까치발을 들며 필사적으로 꺽꺽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거친 목소리.
“방금 뭐라고 했냐.”
“커흐윽….”
“다시 한번 말해 봐.”
“켁! 케헥….”
당연한 말이지만.
염력 마법은 풀어주지 않았다.
페이는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리 착각할 만큼 깜짝 놀랐다.
대체 얀델은 왜 여기에 있고,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며, 어디까지 들었는지.
페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방금 뭐라고 했냐.”
“커흐윽….”
“다시 한번 말해 봐.”
“켁! 케헥….”
얀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으르렁거림과.
보랏빛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마력광의 원인 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얀델은 분노하며 전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 또한 그 이유를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
페이는 다시 한번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대는 금발 놈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너, 이 새끼. 왜 대답을 안해.”
“끄으윽…!”
“내가 만만해? 어?”
“커흐윽….”
“페이 선배의 가슴은 좋아도 내 대흉근은 싫다는 거야?”
“남자 가슴을 왜….”
아니, 이 씹새끼 이거. 말 한마디 못 하더니 내 대흉근에만 대답해?
괘씸함을 담아 마법의 출력을 높였다.
“사, 살려…껙!”
그렇게 염력 마법으로 목을 단단히 조르며, 대충 아무 말이나 던지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진정하세요 주인님! 그러다 죽겠어요!”
“맞아요. 지금 마력이 줄줄 새고 있는 거 안 느껴지시나요 당신? 이러다 마나 폭주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
처음에는 후련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던 카를라와 엘리샤였으나, 몇 분이나 염력 마법을 유지하고 있자 황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 말에 다시금 금발 놈과 녀석의 부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끄륽….”
“…….”
금발 놈은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었으며, 여학생 쪽은 이미 기절한 상태.
카를라의 말대로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냥 죽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어찌어찌 치솟는 빡침을 눌러 담았다.
“쯧.”
철푸덕.
혀를 차며 염력 마법을 해제하자마자 바닥에 널브러지는 두 연놈.
“커흑…켈록.”
“…허억!”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정신을 차린 걸까.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여학생.
파르르 떠는 것이 제대로 겁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금발 놈은 목을 부여잡고 헐떡이면서도, 이쪽을 노려보았다.
“너…이 자식. 내가 누군지 알아?”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얀델! 빌어먹을 평민 놈 아니냐! 그놈의 알량한 재주와, 성과 하나로 세상이 우스워 보이더냐?”
“허?”
방금 죽다 살아났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런 자세로 나올 수 있다니.
내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멈칫한 거라 착각한 걸까.
순식간에 의기양양해진 녀석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감히 대 브론ㄷ….”
“잠깐 닥쳐 봐.”
풀어주자마자 지랄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녀석의 아가리를 주먹으로 닫아 주었다.
퍽!
“아악!”
다시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대는 녀석.
죽이면 안 된다는 소리는 죽기 직전까지 줘패도 괜찮다는 뜻이 아닐까?
결론을 내린 즉시, 쓰러진 금발 놈을 마구 즈려 밟으려 했지만.
“거기까지 하세요 얀델.”
또다시 엘리샤가 말렸다.
“비켜 엘리샤. 저 새끼를 팰 수 없잖아.”
“그러지 말라고 가로막은 거거든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내 뒤쪽을 가리키는 엘리샤. 그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헤헤….”
머쓱하게 웃으며 내가 시킨 대로 수정구를 들고 있는 카를라.”
“…찍었어?”
“당연히 주인님이 나서자마자 껐죠. 하지만 이걸 증거로 제출할 생각이시라면….”
“과하게 상처 입힐 경우, 오히려 내 쪽이 위험하다는 거지?”
“아무래도 그렇죠. 누가 때렸는지는 명확하니까요.”
“나중에 회복시키면?”
신분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노빠꾸로 처맞았기 때문일까. 좀 조용해진 금발 놈.
조금 전에 염력 마법에 당하고도 거만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나쁜 의미로 겁이 없는 녀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