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 그런데 내가 지금 배울 수 있는 게 맞아? 코어 자체의 숙련도가 높아져야 하는 거 아냐?”
“아마도요? 지금까지는 주인님에게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저번에 이리스 님에게 원소 조합을 배우시는 거 보니까 잘하면 될 것 같더라구요.”
“좋아. 한번 해봐야지. 근데 이건 원래 하기로 했던 걸 조금 앞당기는 거잖아? 뭣보다 상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따로 갖고 싶은 건 없어?”
“으음…별로 없는데요?”
“방과 후에 엘리샤 부채 사러 시장 거리에 들를 테니 그때라도 생각나면 말해.”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며 어느새 도착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귀가 거슬릴 정도로 수군거리던 바깥과 달리, A반 학생들은 이쪽을 보며 흠칫하긴 해도 따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매일 있는 이오나의 마법 전투 수업 때문이리라.
엘리샤가 수업에서 빠진 지금. 이 중에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괜히 한 대 맞고 탈락할 걸, 여러 대 맞고 탈락하고 싶진 않겠지.
그 외에도 1학년 A반은 학과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나와 엘리샤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하고.
실제로 예전처럼 평민이라고 무시당하는 일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던전 실습 때 같은 팀을 이뤘던 헬레나와 빈센트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왔고.
생각해보니 좀 신기하네. 아무리 나랑 상성이 안 맞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짝지어줬다지만, H&A에서 동료로 등장하던 사람 둘을 붙여 줬을까.
참고로 H&A에는 한 반에 남녀 1명씩 동료 캐릭터가 있다.
겨우 2명이라는 게 얼마 없는 것 같아도, 다른 학과는 물론이요 학년도 4학년까지 있는 데다가.
몇몇 교수도 영입이 가능하며 아카데미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도 있으니, 상당히 많은 선택지가 있는 셈.
하지만 가만 놔둔다고 이들 모두가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가 되는 게 아니다.
제대로 던전을 성장시키고, 온갖 영약과 장비를 몰빵해줘야 하며, 각각의 개별 스토리마다 있는 장애물을 해결하여 각성까지 시켜야 한다.
그렇게 만렙까지 성장시키고도 온전히 강림한 악신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니, 꾸준히 사교도를 조져 계획을 방해해야 하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아카데미 전체에 퍼진 소문.
이건 그럴 수 있다.
카를라의 말마따나 아카데미 전체가 시끌시끌하던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엘리샤의 말대로 누군가 악의적으로 소문을 왜곡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아마 들끓는 고요의 신도겠지.
선신 교단에도 숨어들고, 레반틴 황실에도 숨어든 놈들이다.
아카데미에 숨어들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중후반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실제로 게임에서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범죄자로 몰리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덕분에 아카데미 안에 숨어든 들끓는 고요의 스파이가 어떤 놈들인지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내가 에드메렉을 쓰러뜨리며, 사교도들 사이에서 핫해진 상태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놈들의 수작인지, 지금 시점에서 놈들을 붙잡는 게 괜한 경계심만 심어주는 건 아닌지.
반대로 들끓는 고요의 세작을 공개적으로 밝혀내 사람들의 경계심을 일깨우는 건 얼마나 이득이 될지.
이리저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봤으나, 역시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기왕 비밀 결사의 후손이라는 설정도 있으니, 카를라나 엘리샤와 함께 고민하는 편이 더 나으려나?
아니, 이런 쪽에서는 이리스가 더 나을 것이다.
500년의 연륜과 탑주로서의 짬밥이 있을 테니.
다른 세상 출신이라는 걸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다 보니, 게임 지식을 공유한다는 발상이 좀 늦었다.
앞으로는 공유할 건 공유해야지.
그나저나 이리스를 아카데미에 데려오지 못한 건 좀 아쉽네.
꼼짝없이 이번 주말까지 기다리게 생겼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평판이 좀 나빠지고, 가끔 걷다 보면 수군거림이 들려오긴 하지만 그 이상 피해는 없다는 것.
사흘 방치해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시장 거리의 으슥한 골목.
페이가 이름 모를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뺨 맞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다.
주말이나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카데미 학생들은 쭉 내부에서 생활해야 한다.
게임일 때는 그냥 시스템적 한계나, 아카데미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카를라에게 들어보니 다 이유가 있더라고.
예전에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으나, 꼭 나갈 때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 일괄적으로 금지했다나?
예를 들면 자기 영지에서 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시내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놈이라거나.
그냥 얌전히 놀러 온 재능있는 학생이, 경쟁 영지의 사주를 받은 용병이나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한다거나.
혹은 그렇게 착각하도록 사교도 놈들이 상황을 꾸며낸다거나.
본래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은 초대 용사 라힘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악신의 잔재를 처리하는 것.
하지만 300년에 가까운 평화 끝에 그 의미는 빛이 바랬다.
지금의 아카데미는 최전선에 설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훈련소가 아닌, 입신양명과 가문의 부흥을 위한 중간 단계 정도로 여겨지는 상황.
그렇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리라.
뭐…오랫동안 사교도의 테러를 잘 막아낸 데다가, 몇몇 던전은 계속해서 소재를 채취하기 위해 일부러 클리어를 미루기까지 했다.
사교도 놈들이 형세 역전을 위해 그동안 힘을 모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겠지.
10년, 20년도 아니고 무려 300년이나 계속된 평화였으니 말이다.
조금 이야기가 샜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학생들은 대부분 아카데미 내부에 머무른다는 소리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레 아카데미 내부에 이런저런 편의시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시장 거리도 그중 하나였다.
아카데미 내부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의 상인들이 허가받고 장사하는 상업 지구.
아카데미 식당에서는 나오지 않는 먹거리들이나, 공방 거리에서 만들지 않는 잡동사니나 사치품을 파는 거리.
“여기라면 엘리샤 네 마음에 드는 부채도 있겠지.”
“어머? 제 눈은 높답니다?”
방과 후가 되자마자 들른 시장 거리 입구에서 엘리샤가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밤새 시달린 탓에 초췌해 보이던 안색은 진작에 회복된 상태라 그런 걸까.
누가 봐도 들떠 보이는 엘리샤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채는 어느 가게에서 살 수 있지? 잡화점 같은 곳이면 되나?”
“거기서도 팔긴 하겠지만…제대로 된 물건을 사시려면 옷 가게로 가셔야 해요 주인님.”
“그래? 아카데미에 입점할 정도면 고급품 한두 개 쯤은 진열해뒀을 것 같은데.”
“주인님 말씀대로 있기야 하겠지만…아마 엘리샤가 원하는 종류는 아닐걸요? 거기서 파는 건 부채라는 기능에 충실한 부채들 뿐일 테니까요.”
“예에. 반면 옷 가게에서 파는 물건은 명품 드레스에도 어울리게끔 디자인된 것들이죠.”
“아하?”
얼추 이해했다.
평범한 부채라면 10골드만 해도 비싸고 잘 만든 녀석이겠지만…1,000골드짜리 드레스에 어울리는 부채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그런 건가.
엘리샤가 부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더워서가 아니다.
일종의 장신구 같은 느낌으로 쓰기 위해서니까 옷 가게로 가는 게 맞겠네.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엘리샤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으…너무 거창한 걸 고르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길. 어차피 그런 건 지금 입고 다니는 시종복에 어울리지도 않는답니다.”
“가격을 신경 쓴 건 아니니까 마음껏 골라. 근데 확실히 너무 비싼 건 옷이랑 안 어울릴 것 같긴 하네.”
아카데미 측에서 지급한 옷답게 시종복은 나름 좋은 소재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옷이지만…그래봐야 결국 시종복이다.
약간 수수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더라고.
“간 김에 너희 입을 옷이나 몇 개 살까?”
“전 좋아요 주인님!”
“저도 좋긴 한데…입을 일이 있나요?”
“바보 엘리샤! 밤에 입으면 되잖아! 주말에 외출할 때 입어도 되는 거구.”
“바보는 당신 아닌가요 카를라? 밤 산책을 할 것도 아닌데 왜 차려입…아.”
뭘 모른다는 듯이 칫칫칫 소리를 내며 검지를 까딱이는 카를라와, 뭘 상상한 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엘리샤.
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시장 거리를 느긋하게 걸었다.
일단은 제일 큰 가게부터 가볼까.
***
부채는 물론이고 적당히 입고 다닐 옷, 밤에 입힐 옷, 던전 탐사때 입힐 옷까지.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싹 다 사뒀다.
덤으로 간식거리도 몇 개 챙겨서 가는 길. 완성품이 아닌 소재를 파는 거리를 지날 때쯤이었다.
“응?”
멀리서 얼핏 보이긴 했지만, 무척이나 낯익은 가슴이 출렁였다.
페이 야른샤드.
어떻게 저 가슴을 착각할 수 있겠는가.
최근에 내가 마법 장비 위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 했었지.
그 재료를 사러 온 건가?
아직 다음 후원금을 주진 않았으니, 그냥 물건만 미리 보러 온 걸 수도 있겠네.
어찌 됐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페이를 만난 셈이니,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하려 손을 번쩍 들었는데…한발 늦었다.
이름 모를 여인이 나타나 페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흠칫한 페이에게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대로 골목으로 데리고 갔으니까.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네. 카를라 사일런스 마법 좀 걸어줄래?”
“네 주인님.”
우웅.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시 마법을 시전하는 카를라.
인비지블까지는 쓸 필요 없겠지. 아무리 마법사가 널려있는 아카데미라지만, 투명화는 너무 수상하니까.
여긴 유동 인구가 많은 시장 거리다. 되려 이목을 끌어버릴 수 있으니 차라리 사일런스만 쓰는 게 더 나으리라.
그 모습을 본 엘리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얀델? 그냥 친구라도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페이 양이 당신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지만, 사생활까지 과하게 침범하는 건 좀….”
“그런 거 아냐.”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길 가다 친구라도 만났겠거니 싶은 광경이긴 하네.
하지만 나는 안다.
“페이 선배는 친구 없어.”
그러니까 저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네? 네에…? 그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얀델…?”
당황스러워 하는 엘리샤였으나, 일전에 대충 페이의 사정을 들었던지라 금세 수긍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골목에 다가가자 그제야 안쪽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등에 벽을 대고 구석에 몰려있는 페이. 그런 페이의 주변을 둘러싼 남녀 한 쌍.
“이번엔 시키는대로 잘했네.”
“가, 감사합니다.”
“넌 이제 빠져있어.”
“네….”
하대받으며 물러난 저 여자 쪽이 페이에게 어깨동무를 했던 녀석이다.
배지의 색을 보아하니 페이랑 같은 2학년 제작 학부인데, 어째 무슨 상하 관계 같네.
다만, 저 둘의 관계는 내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페이와의 관계다.
친구는 아니어도 대화는 할 수 있으니, 별거 아닌 일이면 어쩌나 싶어 기척을 죽이고 상황부터 살피려 했으나.
“요즘 좋아 보이네. 옷도 깔끔하고, 좋은 냄새도 나고…그리고 이렇게 비싼 재료를 둘러볼 여유도 있고.”
그럴 필요는 없겠네.
페이를 위아래를 훑어보며 그리 말하는 금발 남학생.
누가 봐도 좋은 목적으로 부른 거 같지는 않으니까.
이에 살짝 기가 죽었는지 페이가 오들오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야 갑자기. 후배님의 소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