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정도로 크면 발밑이 보이긴 할까…?
아니, 이게 아니라.
벌써 연구 성과가 나오기 직전이라고?
생각보다 빨랐네.
하긴. H&A에서 초반에 페이에게 해줄 수 있는 지원이라고는 대신 귀한 재료를 구해다 준다거나, 하루 3끼 든든히 먹인다거나, 우울해할 때 달래주는 것뿐이다.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돈을 후원해준 적은 없었으니, 속도가 앞당겨졌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오히려 바람직하다.
나 또한 그에 맞춰, 조금 더 빨리 페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줘야겠지.
속으로 페이의 스토리 라인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이제야 손님맞이용 다과를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페이가 입을 삐죽였다.
“…왜 후배님은 남의 공방에서 이렇게 꽁냥대는 거야?”
“어허! 남이라뇨! 저희가 남이에요? 후원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 영약이랑 포션도 주고받고! 어? 할 거 다했는데! 그래도 남이에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하자 기겁하며 내 머리를 꾹꾹 누르는 페이.
“아앗! 농담이야 농담! 얼마든지 편하게 있어도 돼! 응! 그러니까 일어나지 말고 거기 있어 줘 후배님! 아, 맞다! 이거 봐봐!”
페이가 활짝 웃으며 쟁반에 담아온 식칼을 들어 올렸다.
…뭐지? 설마 일어나지 말라며 칼 들고 협박하는 것인가.
일어나려 하자 내 머리를 다급하게 꾹꾹 누르는 페이.
“아앗! 농담이야 농담! 얼마든지 편하게 있어도 돼! 응! 그러니까 일어나지 말고 거기 있어 줘 후배님! 아, 맞다! 이거 봐봐!”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쟁반에 같이 담아온 식칼을 들어 올렸다.
…뭐지? 설마 일어나지 말라며 칼 들고 협박하는 것인가?
반사적으로 품에 있는 보호 마도구의 존재를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할 때 쯤.
페이가 세상 뿌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엣헴 엣헴. 후배님 이 칼이 뭔지 알아?”
“설마 실드를 무시하는 반마법 단검 같은 건가요? 찔리기 싫으면 얌전히 있으라는…?”
“뭐어?! 내가 그런 짓을 왜…아.”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자각한 페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식칼을 샥! 뒤로 숨겼다.
“오해야!”
“과연. 페이 선배를 믿었던 제 마음이 오해라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아니이이이…막 협박하고. 응? 그런 거 아니라는 소리지이이….”
앙탈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한 페이의 늘어지는 어조.
억울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걸 보아하니, 정말 칼 들고 협박하려는 건 아닌가 보네.
이번에야말로 엘리샤의 허벅지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였다.
“협박이 아니라면 갑자기 칼을 꺼내는 이유는 뭐예요?”
“당연히 자랑 겸 보고 때문이지!”
“자랑? 보고?”
아무리 봐도 단순한 식칼 같은데? 이걸?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페이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칼을 내밀었다.
이번엔 오해하지 않도록 내 쪽에 손잡이가 향하도록 해서.
“푸흐흐…이거. 연금술로 만든 거야.”
“…정말요?”
“진짜래두? 한번 시험해 볼래? 이거 연금강이거든.”
연금술로 만든 합금을 연금강이라고 한다.
물론 연금강이라고 다 같은 연금강은 아니지만…어쨌든 모든 연금강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마나가 잘 통한다는 점.
특수한 공정을 거치면 반대로 마나가 거의 안 통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지금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페이로부터 받아든 식칼에 천천히 마나를 흘려보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스며드는 마력.
미스릴 같은 희귀 금속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평범한 철의 몇 배는 될법한 전도율이다.
거기에 마력을 흘려 넣어보니 알겠다. 이거 손잡이가 일체형이네.
나무 손잡이에 홈을 파고, 거기에 날을 끼워 넣은 형태가 아니다. 아예 날과 손잡이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형태였다는 것처럼.
덕분에 손잡이까지 균일하게 마력이 주입되었다.
“세상에. 이게 진짜네.”
“그렇다니까? 어때 후배님? 이 정도면 막 후원할 맛이 나고 그러지 않아? 응? 응?”
목에 힘이 팍 들어갔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대는 페이.
하기야. 이렇게나 빨리 성과를 내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페이의 연구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카를라도 같이 식칼을 만져보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혼자만 모르는 엘리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요? 연금강으로 만든 칼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조금 비싸긴 해도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닐 텐데….”
“연금강이 대단한 게 아니라 별도의 공정 없이 연금술 하나로 만들었다는 게 대단한 거지.”
“네? 그러니까…아예 식칼 형태로 연성했다는 소리죠? 그치만 여기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있는데요?”
“나무도 연성 재료였겠지.”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런데 짜잔!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멍하니 식칼을 바라보던 엘리샤가 똑같이 마나를 흘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확실히 대단하네요. 연금술 하나로 대장장이의 일을 대체한 거잖아요. 공정 단순화와 인건비 절감을 통한 대량 생산의 효율성이….”
“아, 이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야.”
“네?”
조금 핀트가 어긋난 엘리샤에게 친절히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식칼 자체가 아니라, 이 식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생각해봐.”
철을 녹이고, 두드린 뒤, 날을 가는 과정을 변화의 일환으로 여기고 연금술로 재현했다.
다른 분야라고 못할 것은 무엇인가.
오히려 방법이 다르기에 본래는 불가능한 제작법을 실현해낼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리샤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 이상을 보고 있었군요?”
“앞으로 내 파티가 쓸 모든 장비와 소모품은 페이 선배에게 맡길 생각이거든.”
“아하? 만능 제작자를 전속으로 두겠다 이거군요?”
엘리샤가 스윽 시선을 돌리자,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는 페이.
“으응…그래도 이거 아직 조금 부족하거든. 잘 보면 날도 별로 예리하지 않고, 무게 균형도 뒤틀려있어.”
“그래서 결실이 나왔다가 아니라 이제 곧 나올 거라 한 건가요.”
“맞아. 이건 그냥 시제품 수준이거든. 그래도 지금 보이는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나면, 평범한 수준의 장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근데 저흰 마법사잖아요. 평범한 무기 말고 스태프나 원드 같은 게 더 필요한데.”
“그으…이론은 머릿속에 있는데 실제로 만들려면 좀 시간이 걸릴 거야. 재료도 더 비싼 게 많이 필요할 테고.”
뭐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네. 원래 마법사는 돈이 많이 드는 직업이니까.
“즉, 더 많은 연구비가 필요하신 거죠?”
“헤헤….”
어색하게 웃는 페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결과를 보여주셨으니 저도 마냥 안 된다고 할 생각은 없어요. 다음 후원금에는 추가 투자금을 얹어서 드릴게요. 대신…알죠?”
“야호! 알았어! 다음 연구는 마법 장비 쪽으로 방향을 잡아볼게!”
신나서 폴짝폴짝 뛰는 페이. 그럴 때마다 웅장한 가슴이 덩달아 출렁인다.
실로 박력 넘치는 모습.
여기에는 카를라와 엘리샤도 압도된 건지, 순간 멈칫한 두사람의 표정에 낄낄대며 주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페이 선배.”
“응? 왜 그래 후배님?”
“이제 슬슬 말해주시죠.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저를 문전박대했던 겁니까?”
“아…그거…으음….”
잠시 우물거리던 페이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후배님이 신분이 높은 여인은 노예로 만들어 괴롭히는 걸 좋아한다는 거랑, 취향이 굉장히 과격해서 결국 버티지 못한 여자가 망가진다는 거랑, 그래서 항상 새로운 노예를 찾아다닌다는…그런 소문이었지.”
“아니, 그걸 믿어요?”
“그, 그치만 너무 그럴듯하게 말했단 말이야!”
이어진 페이의 말에 의하면.
내 삼촌이 봤는데…누구네 아버지가 들었는데…사촌 누나가 그러던데…등등.
자신의 친인척을 언급하며 정황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고위층 집안 자식이 아카데미에 즐비해 있으니, 제법 현실성 있게 다가왔겠지.
거기에 직접적으로 내가 어떻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주변 정황만 떠도는 것도 문제다.
얀델이 저택에서 노예로 주지육림을 즐긴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얀델이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을 샀다.
그리고 그 집을 오가는 사람은 하나같이 목에 노예 각인이 찍혀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지만, 조합하면 뭔가 그럴듯한 내용이 나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다나.
덕분에 이렇게 빠르게, 자극적인 방향으로 왜곡되는 것이리라.
페이의 이야기를 들은 카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 양이 오해한 이유도 알 것 같네요. 원래 사람은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은 의심해도, 자신이 직접 유추한 건 정답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앗…!”
갑자기 자신이 언급되자 화들짝 놀란 페이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으로 변명을 주워 담았다.
“그게 말이지? 돼지는 잡아먹으려고 기르잖아? 과일도 따 먹으려고 키우는 거고…그럼 나를 후원해주는 것도 언젠가 내가 대단한 연금술사가 됐을 때….”
“대연금술사가 된 페이 선배를 제가 노예로 만든다고요? 어떻게요?”
“어…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을 토해내라고 한다거나? 자유롭게 연구하면서 후원해줄 곳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나는 후배님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겠지.”
“대연금술사쯤 되면 연금술 길드에서 모셔갈 텐데….”
하지만 페이는 내 반박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하던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한 일은 시키지 않을 거야.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아주 약간 부끄러운 일부터 시키겠지. 예를 들면 가운을 벗으라거나 존댓말을 하라거나 하는 정도로 말야.”
“허어.”
“그런데 이게 점진적으로 심해지는 거지. 나중에 가면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두 발로 서서 다니는 것도 금지당할게 분명해!”
“굳이?”
바로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아아…그쯤 되면 나는 후배님의 명령에 따르는 걸 당연히 여기고 있을 거야! 어쩌면 명령에 따르는 걸 기뻐할지도 모르고! 몸도 마음도 완전히 노예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
“그렇게 최종적으로는 지금 후배님이 데리고 다니는 노예들처럼……응?”
멀쩡한 차림새로 자신을 질린다는 듯이 바라보는 카를라와 엘리샤.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페이가 멈칫한다.
이때를 노려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페이 선배.”
“으응…?”
그리고는 최대한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읏?!”
조금 망상이 심했다는 걸 그제야 자각한 걸까.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한 페이.
그런 페이에게 막타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