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96화 (96/230)

똑똑똑.

…….

아무런 대답이 없다.

설마 오늘은 공방에 없는 건가 싶어 한 번 더 두드리려는 순간.

-후배님…?

“오. 있었네요. 문 좀 열어 주세요 페이 선배.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시, 싫어!

“???”

피후원자가…말대꾸?!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릴 겸, 새로이 노예가 된 엘리샤와 인사시킬 겸, 지금 떠도는 소문에 대해 미리 해명할 겸 찾아간 페이의 공방.

-후배님…?

“오. 있었네요. 문 좀 열어주세요 페이 선배.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시, 싫어!

“???”

피 후원자가…말대꾸?!

예상치도 못한 페이의 반응에 당황해 문을 마구 두드렸다.

쿵쿵!

“아니! 왜 이러세요 페이 선배! 후원자를 이렇게 문전박대해도 되는 건에요?”

-나…전부 들었어!

“뭐를요.”

-후배님은 사실 영애 컬렉터라는 소식을 말이야!

이건 또 뭔 소리람.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리는 사이. 양옆에 있던 카를라와 엘리샤는 키득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흫…이건 부정할 수 없어요 주인님.”

“어머? 저도 동감이랍니다. 저도 엄밀히 말하자면 알브헤임 왕실의 핏줄을 끝자락이나마 이었으니까요.”

그야 하이엘프니까 조상 중에 왕족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

그 말이 들렸던 건지 페이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처음부터 알아봤다니까! 다음은 날 노리러 온 거지?!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거야!

“아직도 그 이야기를 우려먹는 겁니까? 오해라니까요.”

-아바바바! 못 믿어! 못 믿어!

마치 어린 아이들이 귀를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때 같은 소리를 내는 페이.

“하아…그나저나 제가 영애 컬렉터면 뭐가 어때서요. 페이 선배는 영애도 아니잖아요.”

-…나 영애 맞는데?

“아.”

그러고 보니 페이도 좋은 집 출신이긴 했지. 서출이지만.

진짜로 깜빡한 듯한 내 반응에 조금 시무룩해진 페이가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후배님이 나까지 노예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열어 줄 거야!

“흐음.”

묘하게 강경한 태도.

이쯤 되자 이쪽에서도 슬그머니 괘씸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뭐, 좋아요.”

-응?

“전 아직 별다른 성과도 없는 데다가, 자기 홍보도 제대로 못 하는 페이 선배를 믿고 거금을 후원했는데…굶고 다니지 말라고 따로 생활비까지 챙겨줬는데….”

-…….

“페이 선배가 그래도 저를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죠.”

-…아.

“후원은 없던 걸로 하죠. 저번에 드린 돈을 다시 뱉어내실 필요는 없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마시고요.”

-자, 잠깐 후배님!

“안녕히 계세요 선배님. 아마 두 번 다시 볼 일 없겠지만, 그래도 선배님이 굶고 다니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잠깐만 기다려줘 후배님!

다급한 목소리. 하지만 대답하는 대신, 잘 들리게끔 일부러 발 소리를 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아니, 얀델 당신 지금 무슨…읍?”

어처구니없어하는 엘리샤와 달리 카를라는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걸까.

잽싸게 엘리샤의 입을 막으며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주인님…진짜 가시게요?”

“그래. 저번 달에 준 후원금은 영약값이라고 치지 뭐.”

“으음…주인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기분 상한 나를 달래는 듯한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실실 웃고 있는 카를라.

역시 이럴 때 장단 맞춰주는 건 카를라뿐이라니까.

칭찬의 의미를 담아 카를라의 볼을 손등을 살살 쓸어주는 것도 잠시.

-후배님…? 진짜 간 거 아니지…?

-지금 문 열었어! 문 열었으니까!

-아냐. 내가 갈게! 내가 갈 테니까 거기 그대로 있어 후배님!

우당탕탕!

문 너머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이때다 싶어 슬쩍 뒤돌아 멀어지는 시늉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페이가 튀어나왔다.

“후배님!”

다짜고짜 내 다리에 달라붙는 페이.

거기에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끌어안자, 자연스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슴이 내 다리를 감싼다.

옷 너머로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마는 몸뚱이.

이를 망설임이라 여긴 걸까. 페이가 내 다리에 머리를 착 붙인 채, 애원하기 시작했다.

“가지마…내가 잘못했어 후배님!”

“이거 놓으십쇼 페이 선배.”

“싫어! 절대 못 놔! 나는 이제 후배님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어허. 남들 들으면 오해할 법한 소리 하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못 믿겠다고 했으면서.”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후배님을 의심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날 버리지마아아아!!”

“글쎄요. 제가 워낙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어서….”

“뭐든 할게! 그러니까 제발…제발 부탁이야…나와 후배님의 결실이 좀 있으면 나올것 같단 말이야….”

“…….”

내 다리에 매달려 울먹이며 땡깡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만족감.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페이 선배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한번은 봐 드리죠.”

“헉! 진짜…?”

“네. 진짜요. 그러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응응! 내가 차도 끓여줄게!”

엉거주춤 일어나, 내 소매를 잡고 공방 쪽으로 끌어당기는 페이.

그런 페이를 뒤따라가면서, 여봐란듯이 뒤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카를라의 미묘한 표정과, 엘리샤의 쓰레기를 보는 듯한 표정.

너무해라.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된 거 아닐까?

***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나와 내 일행들 뿐이지만, 매번 바닥에 앉혀두긴 뭐했던 걸까.

공방에 새로 쇼파를 들여놨길래 그 위에서 멍하니 페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

엘리샤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그래서? 그 결실이라는 건 뭐죠?”

“엉?”

“바른대로 말하세요 당신. 아무리 제가 노예라지만, 이건 말해야겠어요.”

“그니까 뭐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리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 페이 양을 후원했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겨, 결실이 생겼다면 제대로 책임을 지는 게 옳다고 생각한답니다.”

“…아하?”

“주인님 이거 설마….”

“쉿. 조용히 해봐.”

여기에 페이 같은 녀석이 또 있었구만.

카를라와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교환하며 히죽이자니,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엘리샤.

“뭐, 뭔가요. 제가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요?”

“아냐 아냐.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책임? 당연히 져야지. 아암.”

“휴…그렇다면 됐어요.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지만, 얀델 당신이 어련히 잘 해결하겠….”

“당연히 책임지고 좋은 곳에 팔아야지.”

“…에?”

뒤에서도 보이는 페이의 옆 가슴을 슬쩍 훔쳐보며 짐짓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제부터 바쁘겠는걸? 아직 팔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조금 더 성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 미리미리 판로를 좀 알아봐야겠네.”

“그, 게 무슨…?”

“아니지. 돈이야 많은데 굳이 팔 필요가 있나. 그냥 우리끼리 쓰면 되겠네. 그게 좋겠지 엘리샤?”

“얀델 당신….”

급격하게 싸늘해지는 엘리샤의 표정.

하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걸까.

나와 카를라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묻겠는데 그 결실이라는 게 뭔가요 얀델?”

“뭐긴. 그야 당연히……페이 선배의 연구 성과지.”

“…….”

그제야 자신이 성대한 착각을 했다는 걸 깨달은 엘리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이이익…!”

잇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엘리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푸른색 롤빵 머리와,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키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왜 이렇게 엘리샤만 보면 놀리고 싶어지는 걸까?

그래도 너무 장난만 치면 미안하니 조금 풀어줘야지.

“읏차.”

그대로 몸을 옆으로 쓰러뜨려 엘리샤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알아서 상체를 젖혀, 내 다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는 카를라 덕에 제법 편하게 누울 수 있었다.

“뭐, 뭔가요. 갑자기.”

“변태.”

“여기서 제 탓을?!”

경악한 엘리샤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심지어 혼자 착각해놓고 나한테 화를 내려 하다니.”

“읏…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요….”

“엘리샤 넌 벌 좀 받아야겠다. 오늘 밤에 각오하고 있어.”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거죠…?”

당황한 엘리샤. 하지만 노예 각인의 효과 때문에 차마 나를 어쩌지 못하고, 소심하게 볼만 콕콕 찔러댄다.

그 감촉을 즐기며 허벅지에 볼을 부벼대며 커다란 쟁반에 찻잔과 간식거리를 담아오는 페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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