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지? 평민 아니었나?”
“바보야! 쟤가 그 얀델이잖아! 에드메렉을 쓰러뜨린 1학년!”
“아하? 근데 능력은 둘째치고 평민인 건 맞잖아. 대체 어떻게 산 거람. 엘프는 비싸잖아.”
“…이건 비밀인데. 내 삼촌이 저번에 게프 경매장에 다녀오면서 들은 정보거든?”
급기야는 경매장을 다녀온 친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경매장 싹쓸이. 엘프 노예 세트 구매. 10만 골드 즉시 현금 거래 등등.
예상외로 밋밋했던 엘리샤의 모습보다는 이쪽이 더 흥미진진했던 걸까.
잠잠해졌던 사람들은 내 이야기로 다시금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아카데미 학생들은 왜 이렇게 소문 같은 걸 좋아하는 거지?”
“즐길 거리가 얼마 없어서 그런 거죠. 주말을 제외하면 다들 기숙사 생활을 하잖아요? 자연스레 아카데미 내부의 소문에 집중하게 되는 거죠.”
“씁….”
그리 말하면 또 이해는 되네.
“생각해 보니 엘리샤 너도 이랬을 거 아냐.”
“어머? 이제야 제가 당신을 위해 어떤 악평을 들어왔는지 이해되시나요? 그 탓에 이렇게 노예까지 됐는데 말이죠.”
“그래서 제대로 책임지고 사왔잖아? 그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해줄 거 있어?”
나는 엘리샤가 구설수에 오를 줄 알았지, 내가 소문의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필요하다면 평판의 악화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잖은가.
“으음…역시 이럴 땐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최고겠죠.”
“엘리샤 말대로예요. 생각해보면 주인님은 던전 실습 이후로 처음 수업을 듣는 거잖아요?”
“달리 말하면 당신의 실적은 들어본 적 있어도, 실제 실력은 같이 싸워본 A반 학생이 아니면 잘 모른다는 소리죠.”
“잘 보시면 저기서 떠드는 사람들은 전부 처음 보는 얼굴들이잖아요? 내용도 잘 들어보면 단순한 흥미 위주의 이야기들이구요.”
“얀델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앞으로 어떤 자리까지 오를 건지를 명확히 보여준다면 다들 알아서 조용해질 거랍니다.”
“엘리샤가 건재할 때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알음알음 뒷담 정도는 해도,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물론, 대놓고 당신에게 모욕을 주는 이가 있다면 절대 참지 마세요. 그건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니.”
번갈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카를라와 엘리샤.
둘 다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걸까. 해결 방법이 주르륵 튀어나오네.
대충 요약하자면 당장 대응하는 건 없어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닥치게 하자.
단, 선을 넘는 놈들은 그냥 들이받아라.
이 정도인가.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 얼마나 간단한 해결 방식인가.
…그래서 미처 예상치 못했다.
알아서 사리게 될 때까지 소문이 얼마나 과격해지고, 얼마나 널리 퍼지는지 말이다.
오늘 수업은 좀 빡쎘다.
이오나에게 받은 자료를 한번 읽어보긴 했지만, 그래봤자 겨우 한나절 아닌가.
다른 학생들의 일주일을 따라잡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시간이었지.
하지만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더라.
재능있는 신입생 칭호의 성장 버프는 사라졌지만.
대신 에드메렉을 쓰러뜨린 보상과, 영약의 효과로 스펙 자체가 대폭 성장한 데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리스에게 받은 원소 조합 특훈 덕에 마법 자체의 조작 능력도 한단계 성장했으니까.
적어도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다가는 엿될수도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기엔 충분할 거다.
이를 며칠 반복하면 카를라와 엘리샤의 말대로 계속 이렇게 떠들어도 괜찮나? 하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할 테고.
그쯤에 내 후원자인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힘을 약간 빌리면, 적어도 헛소문이 퍼지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했다. 점심시간까지는.
“형제님. 형제님께서 아카데미 인근 저택에서 주말마다 쥬지육림을 즐기신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쥬…머요?”
한창 밥 먹는 중에 성큼성큼 걸어와 뭔가 위험한 말을 하는 헬레나.
내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그제야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발음이 조금 샜네요. …그래서 형제님께서 주말마다 주지육림을 즐기신다는 말은 사실인지요?”
“제가 저택을 샀다는 소문이 언제 퍼진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어제 산 겁니다.”
“휴우…역시 헛소문이었군요. 그럼 주지육림도 거짓이겠네요.”
“…….”
“…형제님?”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헬레나.
순진무구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길래,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술! 술은 안 마십니다!”
“아하? 술을……그래도 문란하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수녀복을 달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건만!”
“저런 둘을 어떻게 그냥 놔둡니까?”
조심스레 식사 중이던 둘을 가리켰다.
그러자 펄쩍 뛰면서도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헬레나.
본래 시종과의 합석은 품위 없는 일이라 손가락질받으나, 이제 와서 더 떨어질 품위도 없으니 그냥 같이 먹던 중이었다.
헬레나의 시선을 받은 둘이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자, 헬레나가 그제야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네요?”
“아니, 그럼 제가 뭐 둘을 망가뜨리기라도 해야 했습니까?”
“하긴…비싼 건 조심히 써야죠.”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 대답.
그러고 보니 헬레나는 성녀 후보가 될 만큼 신실한 정의로운 광명의 신자였지.
사교도의 가족으로, 정령을 소환하다 노예가 된 둘은 동정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헬레나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제님. 사실 저희는 형제님의 사생활은 아무래도 상관없답니다. 애초에 형제님은 저희처럼 세속을 반쯤 벗어난 성직자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헬레나 사제님?”
정의로운 광명 교단이 좀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성직자는 성직자다.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한 흥미 위주로 물어보러 온 건 아닐 터.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자, 한숨을 푸욱 내쉬는 헬레나.
“…형제님에 대한 소문이 너무 빠르게, 그리고 왜곡된 형태로 퍼져나가고 있답니다.”
“네? 이제 겨우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요?”
“예. 이제 겨우 오전이 지났을 뿐인데 형제님은 뒷세계 거물의 후계자이자, 마음에 드는 여인은 어떻게든 노예로 무릎 꿇리며, 다음 타겟은 2학년 마법부 수석이라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허…완전 사실무근입니다. 그보다 2학년 마법 학부 수석은 남자 아닙니까?”
곤란한데. 이러면 내가 밀고 가려던 비밀 결사가 단순한 갱단처럼 인식될 거 아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헬레나가 이해한다는 듯이 맞장구쳐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나 허황된 이야기가 나도는지…식당까지 오는 길에는 글쎄 형제님이랑 3초 이상 눈이 마주치면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마저 떠돌더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헬레나 님은 제 노예 확정이겠네요.”
“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지요.”
한참을 서로 키득대던 것도 잠시. 이내,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형제님께서 과할 정도의 비방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설마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다만, 아무리 형제님의 일이라 해도 고작 아카데미 안에서의 소문에 교단 차원의 힘을 빌릴 수는 없기에….”
“그거야 당연한 거죠. 그냥 어디 가서 그거 헛소문이라고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지요.”
“아뇨. 방해랄 것까지야. 뭣하면 같이 드셔도 되는데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젓는 헬레나.
“전 이미 식사를 마친지라 아쉽지만 얀델 형제님과의 합석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그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헬레나 사제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멀어지는 헬레나.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알아서 사릴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정말?”
“죄, 죄송해요 주인님!”
“저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얀델. 겨우 하루도 안 돼서 아카데미 전체에 퍼질 줄이야….”
이 와중에도 주변의 소리를 전부 엿듣겠다는 것처럼 쫑긋거리는 엘리샤의 귀.
못 움직이게 꽉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눌러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내가 봐도 지금이 정상적인 것 같진 않더라.”
“아, 그 부분 말인데요. 조금 짚이는 게 있어요 주인님.”
“뭔데?”
자신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려다 말고 내게 얼굴을 내미는 카를라.
피식 웃으며 손수건으로 대신 닦아 주자 그제야 히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잖아요.”
“어?”
“우선 실습 던전 습격 자체도 큰일인데, 1학년인 주인님이 대주교급 사교도를 쓰러뜨리기까지 했잖아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만으로도 열흘가량 휴교할 정도로 큰일이었고요.”
자식의 안위를 걱정한 학부모들의 항의나, 아카데미 자체를 향한 불신, 거기에 사교도가 단순 테러가 아닌 본격적인 습격을 했다는 점이 가지는 의미.
한동안 아카데미가 난리 났었지. 깨어나자마자 무슨 영웅 취급받는 것이 어색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실반 마탑의 정령 소환이죠. 평소라면 그냥 결국 엘프가 엘프했구나 하겠지만….”
“잠깐만요! 엘프가 엘프했다는게 무슨 소리인가요 카를라!”
발끈한 엘리샤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카를라가 말을 이었다.
“마침 음지에 숨어서 꼬리만 자르던 사교도들이 처음으로 대놓고 습격해온 사건 직후의 일이었잖아요. 당연히 외계의 존재를 불러오는 정령 소환 미수가 더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죠.”
“대충 알겠네. 이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는 거지?”
“그렇죠. 거기에 모든 일의 중심에는 주인님이 계시기까지 했구요.”
마른 섶에 불씨를 던지면 당연히 타오를 수밖에.
하지만 엘리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걸까. 씩씩대던 엘리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소문이 퍼지는 속도라면 몰라도, 왜곡되는 정도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좁힌 눈매로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누군가 얀델 당신의 소문을 내고 있어요. 그것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말이죠.”
***
엘리샤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추측을 내놓긴 했지만,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있는 것도,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힘 빡 주고 돌아다니는 것뿐.
내가 보고 있으니 적당히 하라는, 나름 경고의 의미로 하려던 건데.
“히익! 눈이 마주쳤어! 나도 노예로 삼을 생각인 게 분명해!”
“…….”
어째 역효과만 나는 것 같아 그만뒀다.
정말 엘리샤의 말대로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내는 거라면, 대체 내 이미지를 망가뜨려 뭘 하려는 걸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오후 수업까지 마저 들은 뒤.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페이의 공방에 들르기로 했다.
피곤해서 어제 돌아왔다는 인사를 못 한 것도 있고, 지금 도는 소문이 페이의 귀에 들어가면 괜히 걱정할까 봐 그런 것도 있고.
그렇게 도착한 페이의 공방.
여긴 처음 와보는 엘리샤가 입을 떡 벌리며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이, 이런 곳에도 공방이 있군요.”
“위치는 좀 그래도 실력은 좋으니까 안심해.”
저번 실습 던전에서 내가 나눠주던 바르는 포션이나, 며칠 전에는 이오나의 혈정을 재료로 영약까지 만들어줬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확실히. 그 정도면 어지간한 1구역의 연금술사들을 뛰어넘는 실력이네요. 어쩌다 여기까지 쫒겨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거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뭐, 대충 보면 알 거야.”
마침 도착했길래 어깨를 으쓱이며 공방의 초인종 역할을 하는 마도구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