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주변답게 땅값이 비싸긴 했으나, 내가 언제 골드가 부족했던 적이 있던가.
중심지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괜찮은 빈집이 있길래 바로 샀다.
겉으로는 이리스와 다른 엘프 노예들을 짱 박아두고, 주말마다 즐기러 오는 별장으로 보이겠지만….
이제부터 여긴 내 아지트가 될 예정이다.
온갖 마법으로 떡칠해 요새화 시키는 건 물론이고, 비밀 결사다운 수상쩍지만 심상찮은 마법이 담긴 후드도 미리 만들어 둬야지.
그 뒤에는 약속대로 각자 하고 싶은 연구를 해도 된다고 일러두었다.
“엘리샤를 잘 부탁하네 주인이여.”
“걱정 마. 카를라 때도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그땐 엘리샤가 대신 방패가 되어주었다고 들었네만….”
“이젠 내가 방패가 될 차례네.”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스레 대꾸하자 엘리샤가 조금 볼멘소리로 웅얼거렸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마나 코어도 무사하니 알아서 잘할 수 있거든요?”
“무슨 소리냐 제자야. 이제 넌 주인의 노예잖나. 네가 알아서 하면 안 된단다.”
“아.”
슬슬 학생이 아닌 노예로서 아카데미에 돌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자각한 것처럼 조금 창백해진 안색.
카를라가 그런 엘리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걱정 마 엘리샤! 이런 일은 내가 선배잖아?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줄게!”
“카를라….”
“일단 식당에서 네발로 기는 연습부터 해볼까?”
“…당신 진짜!”
또다시 투닥이는 두 사람.
카를라가 저렇게 장난치는 데도 나름 이유가 있다.
지금의 나는 평범한 평민 학생이 아니다.
엘리샤가 학생이 아니게 됐으니, 1학년 마법부 A반의 대표는 자연스레 내가 될 것이며.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 에드메렉을 쓰러뜨렸다는 실적도 있다.
나를, 내 소유인 노예를 함부로 대하려는 이가 설마 있겠는가.
그러니 걱정해야 할 건 추락한 자신의 처지에 상처받을 엘리샤의 자존심뿐.
하지만 비슷하게 몰락한 처지인 카를라가 저리 나서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겠지.
“아하하하! 멍멍해볼래? 은근 재밌는데.”
“싫어요! 그리고 거기 서세요 카를라!”
…그냥 놀리고 싶은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괜찮을 거다.
적어도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겠지.
“히익! 눈이 마주쳤어! 나도 노예로 삼을 생각인 게 분명해!”
“…….”
아니.
이건 예상 못했는데.
설령 그 뒷면에 사교도를 조질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 여기는 사고방식이 존재하더라도.
엘리샤를 사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일주일이나 휴학계를 써준 건 명백한 이오나의 호의였다.
호의에는 제대로 보답해야 하는 법.
내일로 미루기보다, 조금 피곤해도 기숙사에 가기 전에 보고해야지.
그런 이유로 도착한 이오나의 연구실.
“왔어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파자마 차림으로 뒹굴거리던 이오나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것도 큼직한 관짝 안에서.
“…굉장히 편한 모습이시네요.”
“신경 쓰여? 응? 이 교수님의 무방비한 모습이 그렇게 신경 쓰여?”
“무방비? 어디가요?”
흡혈귀 특유의 폭발적인 몸매를 전부 숨기고도 남을 정도로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해도….
그냥 전체적으로 귀엽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아마 종특인 매혹의 효과를 최대한 분산시키려는 거겠지만.
“그보다 여긴 연구실 아니었어요? 여기서 생활하시는 건가요?”
“설마 설마. 나도 집이 있으니 평소에는 거기서 생활하지. 오늘은 조금 특별한 물건이 들어와서 그랬을 뿐이야. 응응.”
혼자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오나.
특별한 물건?
그 말을 듣고서야 이오나가 들어가 있는 관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평범한 관은 아닌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있는 이런저런 선들.
은은한 마력광이 나도는 것을 보아, 저 관짝으로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중 같네.
아마 저 파자마도 필요해서 입은 옷이 아닐까?
…그냥 편해서 입은 걸 수도 있지만.
워낙 평소 행실이 범상치 못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얍!”
손을 쓰지 않고 허리 힘만으로 상체를 들어 올린 이오나가 나와 뒤에서 뻣뻣하게 굳어있는 엘리샤를 보며 히죽 웃었다.
“진짜 엘리샤를 사왔네? 많이 비싸지 않았어?”
“그럭저럭 감당 가능한 금액이더라고요.”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이자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이오나.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나저나 엘리샤?”
“네, 네?”
학생이 아니라 노예로 이오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한지, 각인이 새겨져 있는 목을 움츠리는 엘리샤.
하지만 이오나는 그런 엘리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말을 이었다.
“카를라와 달리, 너는 아직 이 아카데미에서 배울 게 많잖아? 다른 교수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신경 안 쓰니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따로 찾아와도 괜찮아!”
“교수님…!”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엘리샤.
그 뒤로는 간단한 잡담을 좀 나누다가, 헤어질 무렵에는 일주일간의 수업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요약본까지 받았다.
세상에.
아무리 카를라와 엘리샤가 있다고 해도, 일주일간의 격차를 다시 메우려면 좀 힘들 거라 각오했는데.
“이런 것까지 준비해주시다니…”
“히히. 역시 나밖에 없지? 그럼 그럼. 얀델 학생이 해야 할 일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앞으로도 사교도는 보이는 족족 쳐 죽이겠습니다!”
“좋아 좋아! 바로 그거야! 난 얼마든 학생을 편애할 준비가 된 교수라구!”
키득대며 앞으로도 공을 세우면 얼마든 편의를 봐주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이오나.
음음. 참된 교수님이구만.
그렇게 서로 수상쩍은 미소를 나누며 헤어진 뒤.
이젠 정말로 쉬려고 기숙사로 가던 도중.
“헉…!”
처음 보는 여학생 하나와 난데없이 마주쳤다.
샌드위치를 들고 있는 걸 보아, 방과 후에 간식이라도 사러 나왔던 모양.
바짝 굳은 채, 나와 카를라 그리고 엘리샤를 번갈아 바라보길래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기다렸더니.
툭.
한입밖에 안 먹은 샌드위치까지 떨어뜨리며 호다닥 도망가버렸다.
뭔데.
***
다음 날 아침.
푹 자고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등교 준비를 했다.
엘리샤가 조금 어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기숙사에서 출발했는데.
웅성웅성
“저기 보여? 엘리샤 양이 아카데미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
“에이. 엘리샤 양은 무슨. 이젠 그냥 노예잖아.”
“그렇긴 한데…마법학부 수석 자리에 무슨 저주라도 걸려있는 거 아냐? 어떻게 벌써 둘이나….”
하나같이 이쪽을 보며 수군대는 학생들.
어딜 가나 시선이 집중되는 이 느낌…오랜만이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격하다.
아무래도 어제 잠깐 시선이 마주쳤던 그 여학생을 통해 소문이 한발 빠르게 퍼진 것이리라.
“엘리샤. 다들 너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제발…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얀델! 저도 아니까!”
목덜미에 새겨진 선명한 노예 각인. 그리고 언제나 입고 다니던 교복이 아닌, 시녀복을 입은 엘리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하기야. 언제나 주변의 우러름만 받던 엘리샤다.
이런 시선을 받는 건 처음이니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다만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라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샤의 자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구부러진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기품있게 내 곁을 걷는 걸음걸이.
순간, 시종복과 노예 각인 정도로는 숨길 수 없는 고귀함이 뿜어져 나왔다.
설령 노예가 됐을지언정 자신은 여전히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이라는 걸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만 같은 모양새.
이쯤 되자 주변의 웅성거림도 조금 줄어들고, 다들 멍하니 엘리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더라.
카를라도 가끔씩 내비치던 숨길 수 없는 태생적인 기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어 카를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카를라 카를라.”
“네네 주인님. 주인님의 카를라에요. 무슨 일이신가요?”
“그러고 보니 너도 저런 모습이 더 익숙하지 않아?”
“음…아무래도 그렇죠?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왔으니까요.”
물론 그때의 모습은 대부분 노예 교육으로 지워졌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고개 좀 뻣뻣이 든다고 뭐라 할 생각 없으니까 편하게 행동해도 괜찮아.”
“흐흫…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주인님. 하지만 이제 와선 지금의 모습도 별로 불편하진 않아서 괜찮아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예전 모습은 엘리샤랑 겹치잖아요? 저는 주인님에게 대체할 수 없는 노예가 되고 싶은 걸요.”
“…….”
이런 요오오망한.
당장이라도 카를라를 여기저기 마구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자니, 옆에서 엘리샤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를라 당신…진짜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나요?”
“주인님이랑 더한 짓도 했으면서 이제와서 부끄럽기는…읍읍!”
“이런 데서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나요?! 조용히 하세욧!”
다급히 카를라의 입을 틀어막는 엘리샤. 조금 전의 기품과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사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김이 빠진 걸까.
A반 강의실로 향할수록 주변의 시선이 점점 미적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노린 건 아니지만 다행이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사람은 어떻게든 흥밋거리를 만들어내는 생물이라는 걸까.
엘리샤에게 향했던 관심이 이번에는 내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