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래.”
“마지막은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다만…대전쟁 이전의 엘프는 정령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네.”
“그렇다고 들었어.”
“아마 주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을 걸세. 내가 그 시대에 살았기에 잘 알고 있네. 신분 증명, 화폐, 도시 인프라 등등. 엘프 사회 전반이 정령술을 근간에 두고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정령술이 사라지면 사회가 마비될 건 불 보듯 뻔한 일.
안 그래도 대전쟁 때문에 대수림 전체가 한번 불타오른 상황에서, 사회 시스템의 마비는 엘프들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으리라.
“그래서 원소 마법으로 정령술을 대체하기로 했네. 누군가 직접 마법을 써야 하니 효율은 떨어지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굴러는 갈 테니 말일세.”
지구로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석유를 금지당해 액화 석탄으로 대체한다는 느낌이려나.
정확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이해는 간다.
“그런 이유로 실반 마탑의 모든 것은 원소 마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네.”
“아카데미에서 대련 수업할 때 엘리샤랑 몇 번 맞붙어봐서 알아. 그 머리 근처에 있는 원소 형상도 그런 거지?”
“맞네. 원소의 그림자라 부르는 것인데, 실반 마탑의 비전인 엘리멘투스 코어의 고유 능력일세. 특정 속성을 코어에 각인해 해당 속성 마법을 사용할 때의 위력과 속도를 보조해주는 효과가 있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슬쩍 운을 띄우자 주르륵 설명을 해주는 이리스.
“실반 마탑의 모든 비전은 엘리멘투스 코어를 전제로 하네. 그래서 대부분은 주인은 익힐 수 없을 걸세.”
“원소의 그림자의 보조를 받지 못하니까?”
“정답이네. 허나 원소의 그림자보다 원소 친화력 자체가 더 중요한 것들도 몇 개 있네. 그중 하나가 바로….”
“원소 조합이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나?”
“그야 뭐. 내가 배울 거잖아.”
무엇보다 H&A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마법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내 대답에 이리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네. 그럼 이제 원소 조합이 무엇인가 설명하자면…쉽게 말해 둘 이상의 속성에서 원하는 성질과 개념을 조합하는 마법일세.”
“…그게 쉽게 말한 거라고?”
“으음. 이런 건 한번 보여주는 게 낫겠지. 잘 보게나.”
이리스가 검지를 쭉 뻗는 것과 동시에 피어오르는 작은 불씨.
내게도 익숙한 기초마법 틴더다.
하지만 이리스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타오르던 불길이 그대로 정지하더니 무슨 결정처럼 굳어버렸다.
“뜨겁지 않게 조정했으니 한번 만져보게.”
이리스가 시키는 대로 굳은 틴더를 손에 쥐었다.
“어?”
예상대로 딱딱하다. 무슨 조약돌이라도 만진 것 같은 느낌.
동시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여전히 화염 계열 기초 마법인 틴더이기도 하다는걸.
“대지 계열 기초 마법인 테라와 조합한 걸세. 단순히 단단한 화염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이렇게도 쓸 수 있네.”
손가락을 휘저어 화염 결정을 창문 바깥으로 내보낸 이리스.
그런 이리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채앵!
느닷없이 폭발하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화염의 파편.
금세 결정화가 풀리며 평범한 불꽃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지만…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조금 전의 폭발에 들어간 마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지.
이게 무슨 소리냐면 적은 마력으로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게 뭐람.
벙찐 표정의 나를 보며 이리스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떤가? 제법 쓸만할 것 같지 않나?”
“응…대단하네.”
칭찬의 의미로 이리스의 귀를 쓰다듬어 주었다.
“흐익?! 가, 갑자기 무슨…아앗…안 되네…제자와 부하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히양!”
조금 귀를 만져줬을 뿐인데, 여름날 밖에 내놓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 이리스.
내 가슴팍에 볼을 문대는 자세로 노곤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마법을 배울 때는…진지하게 임하게….”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지.”
머쓱한 마음에 괜시리 이리스의 뒷목을 가볍게 쪼물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살짝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은 엘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이참에 말해두겠네. 이성 엘프의 귀를 만진다는 행위는 굉장히 부끄러운 행위라네!”
“성감대라서?”
“그, 그렇게 야한 곳이면 진작에 귀를 싸매고 다니지 않았겠나! …굳이 비유하자면 엄청나게 질척한 딥키스에 가까운 일이네.”
어제는 엘프의 귀를 쓰다듬는 건 전신을 애무하는 거나 다름없다며.
아니, 대충 둘이 비슷한 건가?
어쨌든 기분 좋고 부끄러운 일이긴 하니까.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 만질 테니까 마저 설명해줘. 근데 카를라도 있는데 알려줘도 되는 거 맞지?”
“물론이네. 약속하지 않았나. 엘리샤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준다면 머릿속에 든 것까지 전부 주인에게 바치겠노라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카를라 양은 익히지도 못할뿐더러, 익힐 필요도 없는 내용일세.”
“???”
이게 뭔소린가 싶어 옆을 바라보자, 내 머리카락을 땋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이리스님 말이 맞아요. 마법적 재능과는 별개로, 제 원소 친화력은 평범하거든요.”
“뭐? 린델하이트 가문은 원소 마법으로는 실반 마탑보다 앞서있는 거 아니었어?”
“맞아요. 근데 그건 그냥 저희 가문이 대단했던 거지, 대대로 원소 친화력이 좋았던 건 아니에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다시 이리스에게 시선을 향하자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푸욱 내쉰다.
“카를라 양의 말이 사실일세. 단순히 원소를 다루는 것뿐이라면 실반 마탑은…아니, 나는 감히 대륙 최고를 논할 자신이 있으니까. 허나, 원소 마법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엘리멘투스 호흡법에 원소 마법 강화라는 고유 능력이 있듯, 린트블룸 호흡법에는 공명이라는 고유 능력이 있다.
심장과 일체화 시킨 마나 코어는, 맥동하며 주변의 마나를 자신에게 동기화 시킨다.
그 결과 똑같은 마법을 써도 몇 배는 더 많은 마나를 끌어들여, 위력을 폭증시키게 되는 것…그게 린트블룸 코어의 공명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익히지 못했지만.
원소의 그림자가 해당 원소를 심상에 새길 정도로 통달해야 습득할 수 있는 것처럼.
린트블룸 코어의 공명 또한, 코어 자체를 어느 정도 성장시켜야 가능한 고유 능력이거든.
그런데 그게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니, 엘리샤가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세요 얀델. 방금 스승님이 보여주신 원소 조합의 장점이 뭐였죠?”
“그야 일반적인 원소 마법을 벗어난 활용법과, 소모 마력 대비 효율이 좋다는 점이지.”
“제대로 보셨네요. 하지만 하나 놓친 게 있답니다.”
“뭔데?”
“집중력 말이에요.”
“아.”
조금 전은 기초마법이었기에 간단히 시전할 수 있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지겠지.
이리스에 말에 따르면 둘 이상의 속성에서 원하는 성질과 개념을 필요한 대로 조합하는 것이라 했던가.
평범한 마법 시전에 한가지 공정을 더한 만큼 술자에게 부담하는 정신력 소모가 큰 것이리라.
이는 명백한 단점이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얼추 깨달은 표정이 되자 카를라가 방실방실 웃으며 내 심장 어림을 쓰다듬었다.
“헤헤…린트블룸 코어의 공명은 평소보다 큰 집중력이 필요하긴 해도, 과정이 복잡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훨씬 쓰기 편하죠.”
“원소 마법은 직관적이라는 게 장점인 마법이랍니다. 제가 스승님에게 원소 조합을 배우지 않은 이유는 아무리 위력이 좋아도 원소 마법의 본질과는 멀어지기 때문이죠. 제가 추구하는 바와는 맞지 않아요.”
엘리샤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원소 조합 자체가 린델하이트 가문의 무식한 출력을 따라잡으려고 만든 비전이라네. 그래서 기존의 마법들과 달리 엘리멘투스 코어의 의존성이 낮은 거고.”
“엥? 그래요? 전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아버님에게 들은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야 말해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린델하이트 가문이 이름을 세운 이후로 한 번도 실반 마탑은 그 아성을 넘어본 적이 없잖나.”
어떻게 500년 산 자신도 오르지 못한 대마법사의 경지를 한 세대마다 뽑아내냐며 투덜대는 이리스.
그러네. 이리스 입장에서는 린델하이트 당대 가주가 죽고 나면 우리 세상이다! 싶었을 텐데.
다음 가주도, 그다음 가주도 대마법사를 찍으니 황당하고 억울했겠지.
실반 마탑이 린델하이트 가문에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이해된다.
동시에 대마법사에 오를 자질을 가진 엘리샤를 끔찍이 아끼는 이유도 좀 알 것 같고.
“어…그래도 방금 보니 꼭 위력뿐만이 아니라도 활용성도 좋으니, 이리스 님처럼 원소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또 이야기가 다를 것 같은데요….”
조심스런 카를라의 어조에 이리스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리 생각했네. …하지만 린델하이트의 직계는 그냥…음. 그냥 마법을 잘 썼네.”
“앗.”
“카를라 양. 자네가 조금 전에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냥 가문이 대단한 거라고. 맞는 말이네. 아무리 내가 고위 마법사의 극에 달했다고 하나, 대마법사에 비벼볼 정도는 아니잖은가.”
“아앗….”
린델하이트 가문은 언제나 한 시대에 한명씩 대마법사를 배출해왔다.
그렇기에 대륙 최고의 마도명가로 불린 것이고.
“사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매년 그게 가능한 거지? 혹시 아무도 모르는 대법이라도 있던 겐가? 죽기 전에 모든 마나를 넘겨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일세.”
“네? 설마요. 그냥 타고난 거예요. 저희 시조께서 드래곤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셨잖아요? 아시다시피 마법 재능은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고요.”
“떼이잉. 재수 없는 것들.”
“어…영원한 젊음을 가진 하이엘프로 태어나신 이리스 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놈의 영원한 젊음 때문에 성장도 제대로 못 했잖은가! 이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내가 이 나이 먹고 처녀였던 데는 분명 가슴 탓도 있을 걸세.”
자신의 납작한 가슴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이리스.
그런 이리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이젠 처녀 아니니까 너무 기죽지 마.”
“…방금 그걸 위로라고 한 거라면 주인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위로 같은 건 하지 말게.”
거 말이 심하네.
그나저나 셋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심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던 의문 하나가 절로 해결됐다.
린트블룸 코어는 A등급까지 성장 가능한 좋은 특성이지만, 최고의 특성은 아니다.
에우렐리아 대륙에는 그보다 훨씬 좋은 호흡법이 적지만 확실히 존재하니까.
당장 레반틴 황실의 마나 호흡법도 그렇고, 재야에 숨은 기인, 히든 던전 등에 숨겨진 고대의 유산 등.
S등급까지 가는 호흡법을 나도 몇몇 알고 있거든.
하지만 반년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마법사는 린델하이트 가주였으며, 린델하이트 가문은 명실상부한 마도명가였다.
이젠 그 이유를 안다.
린델하이트 가문은 호흡법이 대단해서 강한 가문이 아니었다.
그냥 핏줄 자체가 사기였던 거지.
용의 인자를 직접 발현시킨 초대 가주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비범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났던 것이리라.
참고로 레반틴 황실도 그런 경우다.
용의 위엄을 타고난 초대 황제만큼은 아니나, 역대 황제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카리스마를 자랑했으니까.
웃긴 건 이런 격세 유전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나온다는 점이다.
엘프나 드워프나 수인 같은 이종족은 드래곤 눈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정말 인간 상대로만 박고 박혔기 때문.
인구수는 많아도 평균적인 능력 자체가 심하게 뒤떨어지는 인간이 지금처럼 번성한 건 분명 드래곤 덕분이리라.
때때로 튀어나오는 용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이 없었다면, 에우렐리아 대륙의 절반은 차지하는 오늘날의 레반틴 제국은 없었을 테니까.
뭐, 그것도 3년 뒤면 무너지겠지만.
레반틴 제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은 들끓는 고요의 사도.
대륙 최고로 손꼽히는 마도명가의 몰락마저 중간단계로 여기는 녀석의 최종 목표는 레반틴 제국의 멸망이다.
언젠가 쓰러뜨려야 할 녀석의 강함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은 탓일까.
이리스가 내 눈치를 보더니 틱틱대던 걸 멈추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흠흠. 아무튼 원소 조합은 이런 마법일세. 어떤가? 한번 배워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