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여름방학 때 같이 가볼래?”
“좋아요!”
“좋아. 그럼 지금은 자꾸 이야기가 새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넹!”
순식간에 얌전해진 카를라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뭐,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H&A에서 갈 수 있는 드래곤 레어가 몇 군데 있었거든.
내가 가려는 곳은 키 아이템 하나를 빼면 텅 비어있는 곳이지만…그거야 내가 골드를 전부 빼 온 탓이라 하면 그만이지.
“좋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더라…맞아. 내가 드래곤 레어를 다녀왔다고 했잖아?”
“전 아직도 믿기 힘들지만요.”
아직도 미심쩍어하는 엘리샤에게 피식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우린 이제부터 그 드래곤의 유지를 이은, 오로지 사교도와 악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조직…아니 결사라는 설정이야.”
“…예?”
어벙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드래곤은 강대한 종족이다. 정확히는 강대했었다.
그 위대한 도마뱀들은 지금 몰락하여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원인은 당연히 300년 전의 대전쟁.
평소에는 에우렐리아 대륙을 자신들의 놀이터 정도로 여기는 드래곤들이지만, 그런 그들이 끔찍이 아끼는 인간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자 뒤늦게 전쟁에 참가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장을 쓸어버리던 드래곤들이었으나…악신의 권능이란 일반적인 이해가 닿지 않는 괴상망측한 것.
드래곤의 약점을 알아낸 악신이 직접 현신해가며 용 사냥에 나서자, 몇 없는 개체수가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인간이 사교도로 전향하듯, 드래곤 중에서도 악신에게 귀의한 녀석이 하나 생겼으니.
최초의 마룡이라 불리는 변절자까지 생기자 상황은 점점 개판으로 돌아갔다.
결국 대부분의 드래곤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몇몇은 사교도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며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수면에 들어갔다.
H&A의 최후반부에는 그런 드래곤들을 깨워 조력자로 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때 보여준 드래곤들의 분노는 모니터 너머로도 살벌함이 느껴질 정도였지.
이제부터 내가 만들 가상의 조직은 이를 모티브로 한다.
어차피 구라를 칠 거면 최대한 거창하게 쳐야 하지 않겠는가.
“상처가 악화되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드래곤 하나가 만든 비밀 결사. 드래곤의 모든 유산을 이었지만, 이를 오로지 사교도 토벌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이들.”
단순한 거물 범죄 조직 같은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음지에서 사교도를 조지고, 그 정보를 수집하던 자들.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악신이 관련된 일이 아니면,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신앙 없는 구도자들.
아무튼 비밀스럽고, 아무튼 대단해 보이고, 아무튼 전통 있어 보이는 그런 조직.
하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최근에 슬쩍 그 모습을 드러낸 조직.
“이게 내가 만들려는 결사단의 껍데기야.”
“““…….”””
내 말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일동.
그 고요를 가장 먼저 깬 것은 카를라였다.
“게프시 지하에 꽁꽁 숨겨져있던 던전과 사교도들의 정체를 주인님은 이미 알고 있었죠?”
“어머? 그러고 보니, 던전 실습 때 습격해온 대주교 에드메렉에 대해서도 권능의 패널티나 성격, 자주 사용하는 전술 같은 것들을 줄줄 꿰고 있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주인은 아무도 모르게 암약한다던 들끓는 고요 교단의 존재를 알고 있더구나.”
갑자기 묘해진 분위기.
이번에도 그 속에서 입을 연 것은 카를라였다.
“주인님…방금 건 정말로 단순한 설정 맞나요?”
“어, 음.”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거니?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는 걸까.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이 점점 쌓여서 거대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제법 그럴듯하다는 점이지만.
수상할 정도로 많은 골드, 사교도를 향한 맹목적인 적의, 보통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정보들.
거기에 격세유전으로 용의 심장을 타고난 것 같다는 카를라의 증언까지.
이거 완전 빼박 아냐?
나 같아도 ‘얀델, 이름 모를 조직 최후의 생존자 설’ 을 확신했을 거다.
그래도 일단 부정해봤지만.
“으응. 괜찮아요. 주인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네.”
“어쩐지 보통 평민답지 않은 구석이 있더라니…아, 그래도 당신이 밝히고 싶지 않다면 존중해드리죠.”
“허어…그래서 엘리샤의 부탁으로 뒷조사를 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레 등장했던 게로구나.”
씨알도 안 먹히더라.
생각도 못 한 과거를 알게 됐다 여긴 건지, 묘하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여인들.
그 시선을 착잡한 심정으로 받아내는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라? 이거…나쁘지 않은데?
내가 알던 시나리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H&A의 공략 지식을 발판 삼아 행동할 거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야 내 노예니, 강제 명령으로 그냥 시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의문을 품은 채 시키는 대로 하는 일과, 스스로 납득하고 움직이는 일은 효율 자체가 다르다.
거기에 이런 설정이라면 내 노예가 아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때도 도움이 될 테고.
물론, 진짜 드래곤들에게는 거짓말이라는 걸 바로 들키겠지.
그쯤이면 이미 악신과의 전쟁이 한창인 시기다. 좋은 일에 이름 좀 빌렸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무렵. 마침 주문했던 식사가 도착했길래, 짐짓 어색한 목소리로 주제를 전환했다.
“우선 밥부터 먹고 마저 이야기하자.”
여전히 양심이 콕콕 찔리긴 하지만…지금의 착각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지였으니까.
***
식사를 끝내고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마차 안.
“흠흠. 이제 얼추 중요한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하네.”
“다른 이야기?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야 당연히 주인이 배우기로 한 원소 조합의 기초에 대해서네. 나중에 가르쳐주기로 했잖은가.”
“아.”
맞다. 그랬었지.
“…그 눈은 뭔가 주인이여. 설마 까먹고 있었던 게냐?”
“조금?”
“너무하구나. 그래도 나름 실반 마탑의 정수가 담긴 비전이네만.”
조금 시무룩해진 이리스. 그 모습에 엘리샤가 빨리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빛을 보내온다.
거 스승 사랑이 지극하시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툴툴거리는 이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마주 보는 자세로 내 무릎에 앉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잠깐 깜빡한 것뿐이야. 당연히 기대 중이었지.”
“…주인이여. 내 나이가 몇인지 아느냐?”
“이리스야 이 목에 있는 문양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가느다란 목에 새겨진 덩굴 문양…노예 각인을 살살 쓰다듬자 조용해지는 이리스.
그러게 정령 소환 같은 거에 손대지 말았어야지.
혼자 낄낄대고 있자니, 이번에는 카를라 쪽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부럽다…나도 주인님 무릎에 앉을 줄 아는데….”
“흠흠. 주인이여. 가장 충실한 노예의 간절함을 외면하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네.”
“이때다 싶어 카를라랑 자리 바꾸려고 해도 안 돼. 오늘의 네 자리는 여기야.”
“그런…!”
쪽팔려 죽을 것 같아하는 이리스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준 뒤에, 카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 카를라 너는 내가 이리스에게 배우는 사이에 어깨에 머리 기대고 있어. 심심하면 머리카락 가지고 노는 것도 허락해줄게.”
“헉…정말요?!”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땡그랗게 뜨더니, 이내 잽싸게 옆구리에 달라붙는다.
내가 번복이라도 할까 서두르는 모양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거나, 머리카락 사이의 귀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흐헤헤….”
“…….”
가끔 이렇게 카를라가 날 귀여워할 때는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지.
이해는 간다.
카를라 입장에서 나는 4살이나 연하로 보일 테니까.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다른 이들의 표정도 오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리너구리의 평균 수면 시간은 14시간이라는 논문과, 사냥을 위해 12시간 가량 강가를 헤집는다는 논문을 연달아 본 것만 같은 느낌.
둘을 합치면 하루가 26시간이 되어버리는 꼴 아닌가.
이거 맞아…?
아무튼, 이대로라면 주인으로서의 위엄이 바닥에 떨어질 터.
반대쪽 팔을 뻗어 엘리샤에게 손짓했다.
“너도 이리 와.”
“네?”
“네 스승님 수업인데 구경만 할 거야? 같이 들어야지.”
“…원소 조합이 실반 마탑의 비전이긴 해도 저랑은 계통이 좀 다른데요?”
안다.
H&A에서 엘리샤를 끝까지 육성해도 원소 조합이라는 특성은 얻지 못했었으니까.
“그래도 앉아. 알아서 나쁠 건 없잖아.”
“아니, 전 정말로….”
“쓰읍.”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움찔하는 엘리샤.
“…지금 이거 조금 부끄럽다고 기강 잡는 건가요 얀델?”
“아닌데? 그냥 허벅지 만지려고 그러는 건데?”
“그냥 갈 테니까 적당히 만지세요.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요.”
엘리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옆에 밀착한다.
양옆에는 카를라와 엘리샤를 끼고, 무릎에는 이리스를 앉혀둔 자세.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엘프 가족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진다.
…응. 지금 보니까 좀 그렇긴 하네.
하지만 인제 와서 무르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
“주인이여. 정말 이대로 계속하는 게냐?”
“어. 이 정도로는 마법 쓰는 데 아무 문제 없거든. 거기에 어차피 처음 배우는 거니 기초만 할 거 아냐?”
“뭐…주인이 괜찮다면 그러겠다만.”
고개를 끄덕인 이리스가 두어번 헛기침을 한 뒤에야 말을 이었다.
“흠흠. 우선 실반 마탑의 특이성부터 설명하겠네. 주인도 알다시피 실반 마탑의 설립 목적은 폐기된 정령술을 대신할 원소 마법의 연구라네.”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꼭 원소 마법을 고집할 이유가 있어? 단순히 잃어버린 무력을 충당하는 거라면 다른 방법도 많잖아.”
“당연히 있네. 첫 번째로는 정령 소환이 엘프의 본능이라는 점이네. 타고난 원소 친화력이 워낙 좋아 무의식적으로 끌리기 때문인데…이는 원소 마법으로 어느 정도 해소 가능하니 작금의 엘프들에겐 필수라고 할 수 있네.”
정령 소환하다 노예가 된 사람이 말하니 무게감이 다르네.
“두 번째로는 앞서 말했듯, 엘프는 원소 친화력이 좋아 원소 마법으로 높은 경지를 노릴 수 있다는 점일세. 적성을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