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90화 (90/230)

“주인이여.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리 주의를 기울이는 게냐?”

“탐지는 혹시 몰라 시켜본 거야. 그냥 뭐….”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잠깐 말했던 앞으로의 일. 그걸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고.”

“앞으로의 일이라면 저희를 얀델 당신의 연구원 겸 호위로 삼겠다는 그거 말인가요?”

“맞아. 하나 정정해주자면 엘리샤 너는 내 시종 자격으로 같이 아카데미에 다닐 예정이야.”

“…예?”

“이미 이오나 교수님과는 이야기가 다 끝났어. 일전에 에드메렉을 쓰러뜨린 보상으로 아카데미의 모든 행사에 시종을 밀착해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거든.”

“그럼 혹시…?”

“맞아. 내가 퇴학당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수업은 같이 들을 수 있을 거야.”

“아.”

“호위 명목으로 데리고 다니는 걸 허락받은 거라, 마나 코어가 멀쩡하다는 걸 숨길 필요도 없어.”

“…….”

“아, 이제 와서 싫다고 하면 안 된다? 나 이오나 교수님한테 널 데려오는 조건으로 결석계 받기로 했거든. 그분이야 신분이고 나발이고 사교도만 때려잡으면 그만이라는 분이잖아?”

농담조로 그리 말했으나, 웃기기는커녕 눈물을 글썽이는 엘리샤.

“얀델…당신.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렇게 울 정도로 좋아하면 조금 부끄럽네. 일단 말해두지만 썩 편하지는 않을 거야. 학생이 아닌 시종으로 가는데다가, 너한테 설설 기던 사람들 앞에서 내 노예가 됐음을 알리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게 당신이 제게 거는 기대와 배려에 감사해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답니다.”

“…….”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리 말하면 좀 부끄럽잖아.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낸 뒤에야 헛기침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흠흠.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 말인데.”

“따로 맡길 연구라도 있느냐? 아니면 봐둔 던전이라도?”

흐뭇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이리스가 적극적으로 되물었다.

괜시리 그런 이리스의 길게 늘어진 백발을 만지작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맡길 연구는 없어. 던전도 마찬가지고. 라힘 시에 저택 하나를 구해줄 테니, 하고 싶은 연구 마음껏 해. …정령 소환만 빼고.”

“읏…아픈 데를 찌르는구나 주인이여. 알겠네. 일단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니 나중에 정리해서 보고하겠네.”

“좋아. 사실 이다음이 중요한 일인데….”

“실반 마탑의 비전을 전수하는 것 말인가?”

“맞아. 가능하면 지금 당장 기초라도 배우고 싶거든.”

아마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한동안 시비 붙을 일이 많을 테니까.

지금까지야 엘리샤가 방패막이 노릇을 해줬다지만, 이제는 내가 오롯이 내게 쏟아지는 관심과 악의를 감당해야 하지 않는가.

카를라와 엘리샤를 동시에 노예로 부리며 아카데미 생활을 한다? 그것도 평민이?

물론 둘을 노예로 샀다는 점에서 보통 평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게 보통이겠지.

거기에 내가 대주교인 에드메렉을 쓰러뜨렸다는 소문도 있으니 더더욱 조심할 테고.

…하지만 세상에는 상식적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잖은가.

내 신분이 낮다는 점을 이유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다.

그게 학생이든. 교수든.

“결국 뭔가 보여주긴 해야 한단 말이지.”

“대충 알겠네. 지금 당장 주변을 닥치게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뜻이지?”

“바로 그거야. 비전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심화 단계라 지금의 내가 익히기 어려운 게 대부분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뭔가 없을까?”

“그런 거라면 딱 좋은 게 있네. 원소 조합이라는 건데, 전적으로 원소 친화력에 의존하는 마법이라 조금 익히기 까다롭긴 하다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하다네. 우선 주인의 친화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 잠깐만. 아무튼 있다는 거지? 그럼 자세한 건 나중에 마차 안에서 이동하며 들을게. 지금은 더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남았거든.”

“으음…알겠네. 아직 아카데미에 도착하려면 며칠 더 필요하니 시간이 부족하진 않겠지. 그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니. 대체 무엇인가?”

“내가 이번에 너희를 사면서 현찰로 10만 골드를 박았잖아?”

“실로 인상적이었네.”

“막 뒤에 뭔가 엄청난 뒷배가 있다는 티도 좀 냈고.”

“아하? 주인의 후원자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길 꺼리는 겐가? 그러고 보니 이오나 교수의 허가를 받고 왔다고 했지. 대전쟁 이전부터 살아온 흡혈귀의 재력이라면 10만 골드를 감당할 수 있을 터. 설마…?”

“아. 그건 아냐. 나 애초에 뒷배랄게 없거든.”

“???”

의아해하는 이리스에게 미리 생각해둔 적당한 변명거리를 말했다.

“내가 펑펑 쓰고 있는 골드. 이거 전부 버려진 드래곤 레어에서 얻은 거거든.”

“드…래곤 레어?”

이제는 멸종한 지 오래라 알려진 종족의 이름에 눈만 끔뻑이는 주변 사람들.

오직 카를라만이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부분은 나중에 설명할게. 중요한 건 내가 출처를 증명할 수 없는 돈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고, 이걸 다른 높으신 분들이 알게 됐다는 거지.”

“…각 잡고 조사하면 주인이 뒷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개 아카데미 생도인 게 들통나겠구나.”

“맞아. 그래서 말인데.”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서야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우리 이참에 비밀 조직 하나 만들지 않을래?”

내가 생각해도 조금 정신 나간 발언이었지만.

“우리 이참에 비밀 조직 하나 만들지 않을래?”

뒷배가, 흑막이 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정신 나간 발언인데,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어떻겠는가.

내가 숨만 쉬어도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는 카를라마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니 말 다했지.

“주인님…진심이세요?”

“당연히 진심이지. 사실 비밀 조직이 있었다! 로 밀고 나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 음. 그게 말이죠….”

입술을 우물거리며 차마 다음 말을 내뱉지 못하는 카를라.

사실 H&A에서는 비밀 조직 같은 게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빌런인 사교도 자체가 비밀 조직 같은 녀석이니, 또 다른 비밀 조직이 나올 이유가 없잖은가.

현실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범죄 조직이나 첩보 조직 같은 거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흑막 짓을 하는 집단은 하나도 없다.

물론 정말 존재 자체가 비밀이라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겠지.

게임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나도 모르는 내용이잖은가.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사교도 이외의 비밀스러운 집단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사교도들은 슬슬 전면에 나설 준비를 하는 단계다.

앞으로 2년 정도만 지나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대륙을 뒤집어놓을 테고.

플레이어가 없었다면 순조롭게 세상을 멸망시켰을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주변 정리 하나 안 했을 리가 없지.

제법 탄탄한 비밀 조직 같은 게 있더라도, 진작에 사교도들에게 몰살당하거나 흡수당했으리라.

그렇기에 현시점에서는 사교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비밀 조직 같은 게 없는 거고.

덕분에 뭔가 수상한 일이 생기면 대부분 사교도 놈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치부해도 절반 이상은 들어맞을 지경이고.

뭐…여기 있는 이들은 한때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자들이다.

사교도 놈들이 이제 곧 대대적으로 봉기할 거라는 미래는 몰라도, 이래저래 들은 건 많겠지.

적어도 강대한 비밀 조직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일까. 이리스가 아이의 환상을 깨고 싶어 하지 않는 어른의 눈빛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인이여. 비밀 조직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네. 이웃한 범죄 집단은 물론이요, 깊숙한 곳에 숨은 사교도와, 밝은 곳에서 눈을 부라리는 공권력을 전부 적대하고 있는 조직이잖나.”

“스승님 말대로랍니다 얀델. 그래서 범죄 조직조차 귀족가나 거대 상단의 비호를 받는다고들 하죠. 언제든 꼬리를 자를 수 있게 느슨한 협력 체재긴 하지만요.”

“으음…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요. 음지에 손을 대신다는 것도 신경 쓰이구요. 물론, 주인님께서 명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따르겠지만….”

하나같이 회의적인 반응들. 아직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쪽을 살피는 엘프 가족들도 따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비슷한 느낌이다.

아니, 그런데 다들 핀트가 좀 어긋난 것 같네.

“누가 정말로 비밀 조직을 운영하자고 했어?”

“어머? 당신이 조금 전에 자신의 뒷배처럼 보일 조직을 스스로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생각을 해봐. 그런 조직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졌겠지.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의심부터 할걸?”

“…얀델 당신이 만든다고 했잖아요!”

조금 억울해 보이는 엘리샤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말을 이었다.

“만들긴 할 거야. 다만 실제로 뭔가 할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있어 보여야 한다는 거지.”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만 주면 된다는 게냐?”

씩씩대는 엘리샤를 토닥여주는 이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어. 그냥 폼만 잡으면 된다는 거지.”

“그게 말처럼 쉽게 통할 것 같지는 않네만….”

“맞아. 그래서 우선 지르기 전에 괜찮을지 물어보려고 이렇게 말 꺼낸 거야.”

이번 경매장에서의 돈지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긴 했으나, 어떻게 해야 내가 가진 능력들이나 골드를 설명할 수 있을지 자체는 예전부터 고민해온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끼워 맞추기지만…방법은 있더라고.

일전에 시스템 보정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카를라에게 간접적으로 둘러댔던 설정. 격세 유전을 일으킨 용의 후손.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아까 말했지? 내가 가진 골드는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거라고.”

“…아무리 10만 골드를 앉은 자리에서 써버린 주인의 말이라도 여전히 믿기 힘든 내용이네만.”

“나도 알아. 근데 사실이야. 어느날 갑자기 눈앞에 이상한 풍경이 보이고, 거기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거기가 드래곤 레어더라고.”

“허. 그게 무슨…?”

어이없어하는 이리스. 하긴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해.

하지만 카를라에게는 무척 설득력 있는 소리였나 보다.

“역시! 주인님의 피가…아니, 마나가 주인님을 이끈 게 분명해요!”

“그게 무슨 소리죠 카를라? 얀델은 그냥 평민 아니었나요?”

“언니라고 부르래두? 사실 나도 지금까지 긴가민가하던 건데,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어.”

조금 몽롱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를라.

“주인님은 용의 인자를 발현하신 분이야. …그것도 린델하이트 가의 시조님과 같은 용의 마나를 일깨우신 분.”

여느 판타지 세상이 그러하듯, 에우렐리아 대륙의 드래곤도 굉장히 특별한 종족이다.

무한한 마나, 본능에 새겨진 마법, 하이엘프보다도 긴 수명 등등.

드래곤은 명실상부한 정점에 달한 종족이었다.

어째서인지 동족보다 인간에게 흥분하는 이상한 습성 탓에 개체수가 적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니느라, 이 세상에는 용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 제법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극히 드물게 자기 피에 흐르는 용의 인자를 발현시키는 자들이 있고.

그런 이들은 한가지 이상 비범한 구석을 지니게 된다.

힘이 엄청 강하다거나, 초월적인 카리스마를 뿜는다거나, 숨 쉬듯 자연스레 오러를 다루는 등등.

드래곤의 능력 일부를 계승하기 때문.

다만 예외로 용의 마나를 타고나면, 이를 연약한 인간의 몸이 감당하지 못해 마나 불구가 되고 수명도 짧아진다.

그걸 자력으로 해결한 게 바로 린델하이트 가문의 시조고.

…나는 그냥 시작할 때 좋은 특성 몇 개 골랐더니 랜덤 패널티로 마나 감응 불능을 받았을 뿐이지만.

어쨌든 카를라에게는 내가 자신의 시조와 같은 경우로 보였으리라.

내가 유도한 반응이긴 하지만, 자꾸 거짓말이 늘어나는 것 같아 양심에 찔리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일단은 모르는 척하며 태연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용의 피를?”

“주인님 마법 쓰실 때도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 하는 걸 아신다면서요? 그거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거기에 타고난 마나가 몸을 망가뜨릴 정도로 많다? 이것도 저희 선조님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구요!”

잔뜩 흥분한 카를라. 그런 카를라의 턱밑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좀 진정해봐. 어째 당사자인 나보다 더 신난 것 같다?”

“이걸 어떻게 진정해요! 그나저나 레어에 다녀오셨단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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