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80화 (80/230)

“조사관들이 잘못 판단할 만큼 아카데미에서의 엘리샤의 평판이 나빴다…그리 생각하고 있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프들을 단호히 부정했다.

“이거 착오가 아니라 누명이야. 그것도 교단 연합에 숨어든 사교도가 뒤집어씌운 누명.”

“!!!”

어찌나 놀랐는지 선홍빛 혓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입을 떡 벌린 엘리샤와 이리스.

괜히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담으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려던 순간.

꾹꾹.

미약한 손길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카를라가 무언가를 바라는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스해달라고? 나 지금 중요한 말 하려는 중이잖아. 조금만 있다가….”

“읍! 으븝!”

그게 아니라는 듯 격하게 도리질하는 카를라.

“후…잠깐만이다?”

카를라의 턱 밑을 간질여주자, 나른하게 잔뜩 힘 주고 있던 눈매가 느물느물 녹아내린다.

이제는 거의 내게 몸을 들이미는 것만 같은 자세가 된 것도 잠시.

다시 정신을 차린 카를라가 자신의 턱을 붙잡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아냐? 대체 뭔데 말을 안 하고…아, 너도 같이 명령 대상이 됐구나?”

“읍읍!”

“[카를라 너는 이제 말해도 괜찮아.]”

“프하! 여러분 보셨죠? 주인님은 이런 분이니까 너무 겁먹지 마세요! 아까 엘리샤가 말한 것처럼 괜히 기대하게 했다가 뒤통수를 친다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말하려고 풀어달라고 한 거야? 너무 뒷북인데.”

“아뇨? 일단 경매장에서 연기하자는 말은 제가 꺼냈으니, 제가 설명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무엇보다 지금의 주인님은 무슨 말을 해도 영 불안한 이미지인걸요?”

“이게 누구 때문인데…뭐, 됐어. 알아서 설명해준다면 나야 입 안 아프고 편하지. 그럼 맡길게.”

“네! 맡겨 주세요!”

카를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운을 띄웠다.

“어디 보자…그럼 우선 들끓는 고요 교단이 어떤 목적의 사교도인지부터 말씀드리자면….”

낭랑한 카를라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그렇게 된 거예요.”

셜명을 끝마치며 방긋 웃는 카를라.

내용 자체는 정확했다. …이상할 정도로 나를 미화하고 있긴 했지만.

이오나에게 결석계 부탁하고 오는 건 아카데미를 등질 각오를, 경매장에서 대놓고 돈지랄한 건 아카데미 졸업 이후의 안전을 대가로 올려놓은 것이며.

엘프 목장 같은 미친 소리는 어디까지나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된 케이스…였던가.

대충 그런 식으로 엄청나게 미화를 해대니, 듣는 내 쪽에서도 얼굴이 헛헛해질 정도.

괜히 손부채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고 있자니, 우물쭈물하는 엘리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시 말해도 돼.] 왜 그래 엘리샤?”

“저기…얀델? 그러니까…정말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다 차분히 기다려 봤으나, 얼굴을 붉힌 채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엘리샤.

그 모습이 답답했던 걸까. 이리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우선 인사가 좀 늦었지만, 오랜만이오 린델하이트 영애.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구려.”

“지금은 그냥 카를라라고 불러주세요.”

“알겠네 카를라. 설명 고마웠네. 린델하이트의 마법이 끊기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오.”

그리고는 내 쪽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주인이여.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건 알겠네. 허나 여전히 내가 노예고 주인이 주인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 그렇기에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만…대체 우리를 사들인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일단 기본적으로는 엘리샤의 덤이지.”

“덤?”

“엘리샤는 들끓는 고요 교단이 직접 힘을 써서라도 날개를 꺾고 싶어 할 정도의 인재니까. 나한테 지금껏 잘해준 것도 이유 중 하나고.”

“…고작 그런 이유로 10만 골드를 지불했단 말인가? 엘리샤 하나만 사도 괜찮지 않나.”

“고작이라니. 나한텐 중대 사항이거든? 거기에 덤이라고는 하나, 고위 마법사 하나에 중위 마법사 셋이면 여러모로 쓸데도 많을 테고.”

“그러고 보니 카를라가 마법을 사용했었구려. 혹시…?”

“그래. 너희 마나 코어도 멀쩡히 놔둘 생각이야. 아까 스스로 말했었지? 비전이고 나발이고 전부 내놓겠다고.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원소 친화력이 좀 높거든. 골수까지 싹싹 긁어먹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오, 오히려 바라던 바네. 내가 이리 급하게 사라지며 실반 마탑의 몇몇 비의가 묻힐 위기였으니, 이렇게라도 이어지면 좋겠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에게 낄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좋아하진 말고. 기본적으로는 연구 셔틀 겸 호위로 쓰긴 할 건데…어찌 됐든 노예로도 부려 먹을 거니까. 알지? 너희가 엘리샤의 인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엘리샤가 너희의 인질이기도 한 거.”

“걱정말게. 그 부분은 이미 받아들였다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슬쩍 뒤를 살펴보니 다른 엘프 셋도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이다.

실제로 정령 소환을 하려 하긴 했으니, 결과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좋은 자세다.

“일단 마부는 돌려보내긴 했지만, 아카데미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들끓는 고요 교단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는 전제하에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명심하겠네. 눈에 띄는 짓은 삼가토록 하지.”

“좋아 좋아. 이걸로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끝! 이제 너희 셋은 옆방으로 가서 가족끼리 회포라도 풀고 있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 시키는 대로 옆 방으로 향하는 셋.

이에 무언가 느낀 걸까.

지금껏 우물쭈물대던 엘리샤가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얀델…? 왜 저랑 스승님만 남겨둔 거죠?”

“아, 난 NTR은 취향이 아니라서.”

“???”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더 확실히 말해주기로 했다.

“내가 좀 느슨하게 풀어주긴 하지만…어찌 됐건 너희는 노예고 내가 주인이잖아.”

“그…렇죠?”

“심지어 비싸게 주고 산 노예지?”

“자, 잠깐. 설마…?”

슬슬 감이 오는지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는 엘리샤에게 히죽 웃어주었다.

“샀으니까 싸야지.”

“샀으니까 싸야지.”

그 노골적인 말에 엘리샤가 기겁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죠?! 조금 전까지 얀델 당신이 사교도의 모함을 받아 노예가 된 저를 거금을 들여 구해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요?!”

“그랬지?”

“엘프 목장 같은 무시무시한 발상은 전부 거짓말이었다면서요!”

“맞아.”

“그럼 여기서는 우리의 신분이 반대가 되었지만, 네가 그러했듯 나 또한 너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약속할 터이니 안심해라…같은 말이 나올 타이밍이잖아요!”

“엥? 그치만 노예는 인간이 아닌데?”

“그, 그러니까 그 부분을 어떻게든…!”

답답하다는 듯이 팔을 짧게 붕붕 흔들던 엘리샤가 흠칫 멈춰서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당신. 혹시 절 놀리고 있나요?”

“아. 들켰어?”

“이…이익…!”

잇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엘리샤.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10만 골드야 10만 골드.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

“…….”

돈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문 엘리샤. 대신 옆에 있던 이리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리스. 탑주였으니 넌 알지? 10만 골드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물론. 별다른 프로젝트가 없다는 가정하에, 마탑을 1년가량 운영할 수 있는 거금이네.”

“맞아. 돈 많이 들기로 유명한 마탑이 그 정도라니까? 평범한 귀족가는 어떻겠어. 평민인 나는 어떻게 10만 골드를 구해왔을 것 같아?”

정답은 다회차 클리어지만…그런 대답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 마지막 질문에 뛰어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엘리샤.

아마 뛰어난 마법사의 덕목인 상상력을 풀로 발휘하는 중이겠지.

여기서 엘리샤를 한발짝 더 몰아붙였다.

“나는 내 인생을 걸었어 엘리샤.”

틀린 말은 아니다. 시간을 들여 게임을 한다는 건, 수명을 갈아 넣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목숨 걸고 게임한게 맞다.

…지금은 진짜로 목숨 걸고 사교도랑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내가 지금도 엄청 배려해주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

“그, 그건….”

“난 그냥 명령을 내리는 게 훨씬 편해. 지금도 그럴 수 있고. [엘리샤. 무릎 꿇고 손들어.] 이렇게 말이야.”

“…….”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바닥에 꿇어앉아 손을 번쩍 든 엘리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처음에 보았던 불안이 다시금 스쳐 지나간다.

“얀델…? 그게 말이죠…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그게….”

아까부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듯, 입술만 오물거리는 엘리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애완동물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적당히 거친 느낌으로.

“엘리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는 더 이상 고귀한 영애가 아니야.”

“저, 저는….”

“내 노예지.”

“…….”

완전히 시무룩해진 엘리샤.

…너무 심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경매장에서 노예 교육을 받은 카를라나, 진작부터 바짝 엎드린 이리스와 달리, 엘리샤는 아직 자기 처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대로 놔두기는 뭐하니, 옆에 있던 카를라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것만으로도 뜻이 전해진 걸까.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카를라는 알아서 엘리샤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이리스 하나.

아까부터 엘리샤가 낑낑대는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던 이리스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순간.

“난 감사히 생각하고 있네.”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이리스.

“아무리 마탑에 처박혀있었다고 하나, 내 나이가 나이잖은가.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노예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다네. 이 정도면 최고의 대우나 다름없지. 암.”

“젊은…?”

소녀에 가까운 외형을 가진 이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후후. 어리다고 해도 좋네. 어쨌든 예쁜 건 사실이지 않나. …그보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만.”

“뭔데.”

“주인이여. 나나 엘리샤의 말투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나름 공손하게 말해보려 하고 있으나, 지금 말투가 몸에 배어 쉽지 않네.”

“됐어. 마나 코어도 가만 놔두는데 말투가 뭐가 대수야.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럴 때만 좀 주의해주고.”

“명심하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네만…그…마나 코어 말일세. 정말로 괜찮겠나?”

“왜? 설마 각인 풀자마자 나 죽이고 도망치려고?”

대마법사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나, 고위 마법사의 끝자락에 달한 이리스다.

시간만 주어지면 노예 각인 정도는 스스로도 해제할 수 있을 터.

슬쩍 떠볼 생각이었으나…이리스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엘리샤가 주인에게 메여있는 한 도망갈 생각도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여도 주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인은 우리의 은인이고, 나는 은인을 공격할 만큼 막돼먹은 엘프가 아니니.”

“오늘밤 이후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네.”

“맹세하지. 나는 주인의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순종적인 노예로서 받은 은혜를 갚겠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