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무슨 뜻이지?”
“조금 전에도 말했듯, 부탁할 것이 있기에 그에 걸맞은 자세를 취했을 뿐이라네.”
차분한 태도로 답한 이리스가 한층 더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나나 다른 이들은 이유야 어찌 됐건, 실제로 정령 소환을 행하려 했으니 이리되는 게 당연한 일일세. 허나 엘리샤는 다르네.”
“계속해봐.”
“주인도 대충 눈치챈 것 같지만, 엘리샤는 본래 노예가 될 아이가 아니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쨌든 지금은 내 노예잖아.”
“…맞는 말이네. 그렇기에 이 미천한 노예는 그저 간곡히 부탁할 뿐.”
무릎 걸음으로 다가온 이리스가 내 발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주인이 하라는 건 뭐든 하겠네.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리를 벌리라면 벌릴 것이고, 비전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이며, 아이를 낳으라면 낳겠네. …그러니 부디 엘리샤만은 주인의 계획에서 제외해주지 않겠는가?”
“흠.”
이러려고 자기를 엘리샤랑 같이 사달라고 한 거였구만.
진짜 엘리샤를 아끼긴 하나 보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조금 신기하다는 듯 이리스와 엘리샤를 번갈아 바라보자, 그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건지 다급히 말을 덧붙이는 이리스.
“마, 마침 엘리샤가 빠지면 남녀 성비가 딱 맞지 않는가! 거기에 저 둘은 부부라네! 남은 한명은 둘의 아들이고!”
“허? 그럼 가족 전체가 노예가 된 건가?”
“맞네. 그러니 주인이 만들 목장에 조금 더 잘 적응하지 않겠는가.”
“너는?”
“나는 하이엘프 중에서도 풍부한 생명력을 타고난 몸이라 유독 튼튼한 편이네. …조금쯤은 험하게 굴려도 쉬이 망가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짐짓 의연한 태도로 그리 말하는 이리스.
엘리샤가 기겁하며 그런 스승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이리스는 기어이 내 발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반대쪽 다리에 매달리는 엘리샤.
“……!!”
조금 전의 무기력한 모습은 벗어던지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마구 젓는 것이 자못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기운을 차려서 다행…인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노예 주제에 주인에게 뭘 요구하는 건 좀 아니꼽긴 한데…뭐, 좋아. 한번 생각해보지. 어느 쪽이건 지금 일에 대한 벌은 줄 거지만.”
“그거면 충분하다네 나의 주인이여.”
“됐고. 난 이제부터 좀 쉴 테니까 조용히 해. [그사이에 괜히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쉬어.]”
“명령에 따르겠네.”
노예 각인을 통한 명령까지 내리고서야,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카를라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베개.”
“앗, 넵!”
카를라가 즉시 옆으로 멀어져 자리를 벌리더니, 이내 자신의 말랑한 허벅지를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여기요!”
“잘했어. 도착하면 깨우고.”
“넹!”
뭔가 더 이야기해보려 해도, 그게 전부 엘리샤 괴롭히기로 귀결될 것 같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
다음 날 저녁. 적당히 한적하고, 적당히 큰 마을에 들렀을 쯤에 마부에게 이만 가보라고 했다.
다행히 평범한 인부였는지 팁까지 두둑이 얹어주자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돌아가더라.
일단 주변에서 가장 괜찮은 여관을 찾아 방 2개를 빌리고, 내가 쓰려던 방에 전원을 불러 모았다.
“카를라.”
“네 주인님.”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탐지 마법을 쓰는 카를라.
그럭저럭 넓은 방 안을 가볍게 훑는 카를라의 마력에 엘리샤를 제외한 나머지 엘프들이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하기야. 내가 이제 차례로 마나 코어를 부수라 명령할 줄 알았건만, 정작 내가 데리고 다니던 노예는 잘만 마법을 쓰니 당황한 거겠지.
“옆방까지 확인했는데, 괜찮은 것 같아요 주인님. 누가 이쪽을 지켜본다거나 그런 마도구를 설치해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 다행이네. 혹시 모르니 일단 이쪽의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사일런트는 써두자고.”
“헤헤. 그 정도는 진작 해놨죠. 이제 걱정 말고 이야기하셔도 돼요 주인님.”
카를라의 확답에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엘프들에게 말했다.
“흠흠.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하지.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내 말은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 ……!!”
“[이제 말해도 괜찮아 엘리샤.]”
“뭐, 뭔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이래서야 마치 누군가에게 들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못되게 군 것 같잖아요!”
겨우 하루 만에 나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저버렸는지,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
너무하네.
어떻게 하면 엘리샤에게 지금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짜잔! 서프라이즈!”
“…….”
아,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좋은 대사가 생각 안 났단 말이야.
어떻게 하면 엘리샤에게 지금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짜잔! 서프라이즈!”
“…….”
그리 말하며 어색하게 웃자, 싸늘한 시선으로 화답하는 엘리샤.
아,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좋은 대사가 생각 안 났단 말이야!
이게 아닌가 싶어 슬쩍 뒤통수를 긁적이던 것도 잠시.
이내, 엘리샤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당신…그렇게 날 가지고 놀고 싶었나요?”
“엥?”
예상치 못한 날 선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리샤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 당신이 누군가에게 들킬 걸 염려해 일부러 못되게 군 것처럼 말하긴 했죠.”
“아니, 그런 것처럼 말한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거라니까?”
“…하지만 얀델 당신이 마차 안에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은 미소에는 진심이 담겨있었어요. 거기에 경매장에서 지배인에게 했던 말에는 확신이 묻어나왔고요.”
“그건….”
“본래 낙차가 클수록 절망도 커지는 법. 제게 기대를 심어주고 싶으셨나요?”
“기대가 아니라 안심했으면 하는 건데.”
“하! 안 됐네요.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속지 않을 거랍니다.”
내가 속이려던 건 어디까지나 내 주변에 숨어있을 사교도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엘리샤도 같이 속이긴 했지만.
엘리샤가 언제 마음이 무너졌었냐는 듯, 강한 의지가 담긴 푸른 눈동자를 반짝였다.
“자!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세요! 제 몸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그러지 못할 테니까요!”
“허…?”
여기서 그 대사가?
나를 도발하듯, 양팔을 활짝 벌린 엘리샤가 당당히 선언했다.
“전 절대 당신이 원하는 반응 같은 건 보여주지 않을 거예요!”
“에잇.”
몰캉.
“꺄아아아악! 어딜 만지는 건가요?!”
“어디긴. 가슴이지.”
몰캉몰캉.
음. 이 정도면 카를라보다 조금 작은가.
대신 허벅지는 엘리샤 쪽이 앞서는 것 같지만.
그렇게 나도 모르게 카를라와 엘리샤의 차이를 알아보려는 듯 집요하게 만지작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우…우으….”
“아.”
엘리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신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황급히 손을 떼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완벽히 오해 중인 엘리샤가 수치심과 무력감에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지, 진짜 만졌어요…마구 주물러졌어요…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는 곳을 우악스레…!”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절 엉망진창을 범할 생각이죠?! 한 마리 짐승처럼…도서관에서 읽은 100일 뒤에 암캐가 되는 영애님이란 책 내용처럼!”
그거 너도 읽었니?
전체이용가 수준의 성 지식만 가지고 있던 엘리샤에게 저런 대사를 내뱉게 만드는 아카데미 도서실은 대체 어떤 곳일까.
“하지만 저,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을 우습게 보지 마시죠! 100일이 아니라 100년이 지난다 해도 절대 얀델 당신에게는 굴하지 않겠……읍읍!”
“거기까지 하거라 멍청한 제자야!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노예 신세니라. 그런데 왜 자꾸 도발하고 그러는 게냐!”
폭주하려는 엘리샤를 빠르게 제압한 이리스가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내게 사과했다.
“주인이여. 엘리샤의 잘못은 스승인 나의 잘못이라네. 그러니 부디, 이 어린 것이 아니라 내게 대신 벌을 내려주시게.”
“일단 나랑 엘리샤는 동갑이다만?”
“하이엘프의 수명을 생각해보면 인간 기준으로 5살이나 다름없는 아이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마치 오리너구리의 수명은 17살이니, 16살 먹은 오리너구리는 인간으로 치면 80살쯤 된다는 소리 같잖아.
그냥 걔는 16살 된 오리너구리일 뿐이라고!
“하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한숨.
그런 내 모습을 본 카를라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주인님 주인님.”
“왜?”
“조금 전에 엘리샤가 했던 말은 100일 뒤에 암캐가 되는 영애님에 나오는 대사를 조금만 고친 거예요. 정말 재밌게 봤나 보네요.”
“…….”
“하긴. 원래 처음 보는 야설…아니, 어른들의 로맨스 소설이 좀 자극적이긴 하죠.”
나중에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꼭 도서관부터 가보도록 하자.
절대 판타지 세상의 야설이 궁금한 건 아니고, 대륙 최고의 교육시설에는 무슨 책이 있을지 기대돼서 그런 거다.
그나저나 점점 상황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네.
이쯤에서 한번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다들 다물어.]”
“““…….”””
그 한마디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들려오는 것은 누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지 뼈저리게 알아챈, 노예들의 불안한 숨소리뿐.
엘리샤의 푸른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 엘프 목장 그거 거짓말이야.”
이렇게까지 딱 잘라 말했음에도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 이는 이리스나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엘리샤가 억울하게 노예가 됐다는 건 알아도, 그게 누군가가 덮어씌운 누명이라는 생각은 못 하나 보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선신 교단의 성직자 중에 부패한 사람은 없으니까.
부패하는 순간 신성력을 박탈당하며 사제직에서 쫒겨나거나, 심하면 천벌 받고 죽는데 어떻게 성직자들이 부패할 수 있겠는가.
하여 성직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의 정설이다.
…그 틈을 노려 숨어든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