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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78화 (78/230)

엘리샤 아니면, 전 탑주인 이리스. 둘중 하나일 것이다.

저 고자 사디스트 놈의 취향이 바뀌지 않았다면 말이다.

물론 다른 누구도 아닌 키프로스 후작에게 누굴 넘겨줄 생각은 쥐뿔도 없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백금화 한 움큼을 꺼내 사회자에게 과시하듯 보여주었다.

“비율을 조정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누가 얼마를 부르건, 그 입찰액보다 10,000골드 더 비싸게 입찰하겠습니다.”

“오오…! 그렇다고 하네요. 얼마를 입찰하시겠습니까?”

“끄으윽….”

내가 카를라를 끼고 있는 모습에서, 지금의 나와 변장한 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눈치챈 탓일까.

두 번이나 점찍은 노예를 빼앗기게 생긴 키프로스 후작은 분한 표정으로 이를 갈더니,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입찰을…포기하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10만 골드에 오늘의 마지막 물건이 낙찰되었음을 알립니다.”

땅! 땅! 땅!

경쾌한 나무망치 소리가 경매의 끝을 알렸다.

***

카를라를 사며 본 적 있던 지배인이 굉장히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혹시 날파리들이 달라붙을까 걱정되어 그러는데, 마차를 하나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VIP께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필요하시다면 목적지까지 호위도 붙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 호위는 저한테도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냥 귀찮은 시선만 피할 수 있게끔 몰래 준비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해했습니다. 바로 준비해드리죠.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금액이 금액이다 보니 어지간한 서비스는 가능합니다만.”

“따로 없네요. 굳이 말하자면 빨리 물건을 받아보고 싶다는 정도…?”

“하하! 워낙 낙찰받으신 물건이 많아, 확인하는데 포장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군요. 그래도 슬슬 나올 때가…오. 마침 저기 나오네요.”

내 뒤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배인.

그곳에는 작은 대기실 문 너머로 들어오는 다섯 명의 엘프와, 내가 산 나머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단하게 물건들을 확인하고, 노예각인에 내 마력을 새겨 주인 인식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깔끔하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 경매장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아랫것들에게 말을 전해놓았으니, 저 시종을 따라 뒷문으로 나가시면 마차가 나올 겁니다.”

“좋군요.”

물건은 전부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대기실을 나가려 하자, 대신 문을 열어주어 배웅하던 지배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감히 손님의 사정을 캐물으려는 건 아닙니다만…대체 이렇게나 많은 엘프를 사서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혹시 괜찮다면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

문을 열다 말고 지배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굉장히 죄송스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듯한 표정.

혹시 엘프 세트에 자기도 모르는 가치가 있는 건가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눈빛에 살짝 감돈다.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걸맞지 않지만, 지위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 가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평소라면 적당히 둘러댔겠지.

게프 경매장의 지배인이 직접 이렇게 봐도, H&A에서 나오는 모습에도 이상한 점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괜히 카를라가 오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실반 마탑의 몰락의 배후에 들끓는 고요 교단이 있다면, 분명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처리를 확인하기 위해 경매장에 들를 거라던 말.

나와 카를라와 있을 때가 아닌, 문도 반쯤 열리고 시종들도 몇 명 들어온 상태에서 저런 걸 묻는 이유는?

레반틴 제국의 황실은 물론이요, 선신 교단 연합에도 세작을 심어놓은 녀석들이다.

그런 들끓는 고요 교단이 대륙 최고의 경매장이라는 게프 경매장을 가만 놔뒀을까?

지배인이 교단원은 아니더라도, 교단과 유착 상태일 가능성은?

게임에서 아무 문제 없었다고 무조건 안심할 수 있는 걸까?

짧은 시간. 본능에 가까운 위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물론 이 모든 게 착각일 수 있지.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흠…사업 기밀이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게프 경매장이 알고 있는 것도 괜찮겠죠.”

“오오…! 너무 궁금해서 며칠은 밤잠을 설칠 예정이었는데…감사합니다!”

대충 있어 보이는 말로 둘러댄 뒤, 최대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냈다.

그리고.

“노예의 자식은 똑같이 노예라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특별한 계기로 사면받지 않는 한, 대대손손 노예지요.”

“그럼 여기 있는 엘프 남녀를 교접시켜 나온 엘프도 노예겠군요.”

“……!”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지배인.

“엘프는 수명이 깁니다. 하지만 임신 기간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고, 성장 속도도 비슷합니다. …거기에 운이 좋으면 하이엘프를 뽑을 수도 있겠고요.”

엘리샤와 이리스를 보며 입맛을 다시자,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배인.

“…목장을 만들 생각이시군요.”

“대충 그런 겁니다.”

좋아. 이 정도면 완전 쓰레기 같았겠지?

어차피 몇 년 지나면 들통날 거짓말이지만, 만약 여기에 들끓는 고요의 손이 닿아있다면 그 몇 년이 정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지배인에게 되물었다.

“어때요. 답변이 됐나요?”

“물론입니다. 손님의 사업은 아마도 저희를 통할 터. 그때 이런저런 편의를 봐달라는 소리겠지요.”

“이야기가 통하네요.”

“저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족속. 그게 무엇이든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다만….”

“다만?”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 분들은 몇몇 있습니다.”

“…….”

아니. 이게 진짜로 있던 시도라고? 엘프 목장이?

미쳤네 판타지 노예제.

“앞선 시도는 전부 실패했지만, 손님은 시작 규모부터가 다르시니 어쩌면 성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말한 지배인은 재차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만날 날을 즐겁게 기대하겠습니다.”

굉장히 찝찝한 작별 인사였다.

“얀델 당신…! 당신이 어떻게…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당신만은…당신만은 나한테 이래선 안 되잖아!”

앗. 엘리샤를 울려버렸다!

“얀델 당신…! 당신이 어떻게…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당신만은…당신만은 나한테 이래선 안 되잖아!”

앗. 엘리샤를 울려버렸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선명한 분노를 내비치는 엘리샤.

엘프 목장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혐오의 시선을 내비치던 다른 엘프들마저 깜짝 놀라 엘리샤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잠시.

전 탑주인 이리스가 허둥대며 엘리샤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제, 제자야. 왜 그러느냐. 대체 이 자가 누구이길래 그리도 서럽게 우는 게야. …잠깐, 얀델이라면 설마…?”

그제야 내 정체를 눈치챈 것처럼, 나와 엘리샤를 번갈아보며 황망한 표정을 짓는 이리스.

하지만 엘리샤는 스승에게 그렇노라 확답해주는 대신,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원망의 말을 마저 쏟아 부었다.

“내가…내가 얼마나 그동안 당신에게 잘해줬는데! 던전에서는 당신 말만 믿고 목숨을 걸기까지 했는데!”

“음…엘리샤? 잠시 진정하고….”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아니, 일단 내가 주인이고 넌 노예거든? 아무리 그래도 이전처럼 글렌시엘 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을 감싸주려다…안 좋은 소문을 감수한 탓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난!”

눈을 부릅뜨며 크게 외친 것도 잠시.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리샤의 눈동자 위로 억울함과 서러움. 그리고 허탈함이 순서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언제 격분했냐는 듯, 잔뜩 지친 사람처럼 스르륵 무너지는 엘리샤.

“난…당신이 절 구하러 온 줄 알았어요.”

“…….”

“내가 당신에게 해준 게 있으니까…그러니까 내가 힘들 때 당신도 날 도와줄 거라고…히끅.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에요…흐윽…그런데 엘프 목장이라니…왜…대체 왜…흐아아앙….”

이제는 아예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엘리샤.

고운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화려한 화장은 눈물에 녹아 흘러내린다.

이 와중에 눈치 없이 반짝이는 장신구와, 중요 부위를 제외한 전신을 반투명하게 비추는 시스루 드레스가 묘한 퇴폐미를 발한다.

…카를라 때도 그렇더니, 경매장 애들이 옷을 참 잘 입히네.

갑작스런 엘리샤의 오열.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배인 앞에서 했던 말은 단순한 쇼라는 걸 알리고 싶었지만….

일단 이 마차도 경매장에서 빌려온 물건이 아닌가.

내부에 도청 마도구 같은 게 설치되어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지금껏 들끓는 고요 교단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였는데, 잠깐 마음이 약해졌다고 전부 허사로 만들 수는 없지.

턱 쪽에서부터 검지와 중지로 엘리샤의 양 볼을 붙잡아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리게 했다.

그리고는 찬찬히 엉망이 된 엘리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네. 이 얼굴이 보고 싶었어.”

“…네?”

“언제나 자기가 최고라는 듯한 표정으로 남을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

“이제 좀 볼만해졌어.”

그 말에 무언가 부서진 것처럼 눈이 죽어버린 엘리샤.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무엇 하나 비추지 않는 탁한 시선이 내 양심을 콕콕 찌른다.

아니진짜존나미안하잖아!!!

하지만 이를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겉으로는 냉소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도 시끄러운 건 좀 거슬리는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있어라.]”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는 엘리샤.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마차 돌려보내고, 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야지.

생각해둔 방법은 있다.

본거지까지 외부인을 데려갈 수 없고, 시선을 피한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이만 가보라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

마부가 단순한 잡부라면 일이 일찍 끝나 좋다고 돌아갈 것이며, 내 동향을 살피려던 놈이라도 명분이 없으니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

마음속으로 딱 하루만을 외치며 엘리샤에게 마구 사과하는 사이.

아까부터 짧은 팔로 엘리샤를 보듬던 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아니, 주인이여.”

“뭐지?”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그리 운을 띄우고는 마차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는 이리스.

아니, 무릎을 꿇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더니, 아예 이마를 바닥에 처박고 손은 공손히 모았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큰절이라니.

공간 왜곡 마법이나 균형 유지 마법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달려, 넓고 흔들림 없는 고오급 마차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내 발치에 엎드린 이리스의 가녀린 등짝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런 이리스를 따라 똑같이 바닥에 엎드리는 다른 엘프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엘리샤만이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

엘리샤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조금 전의 명령 때문인지 읍읍 거리는 소리밖에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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