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77화 (77/230)

지금껏 사회자와 출품 물건을 비추던 조명이 뒤쪽의 두꺼운 커튼을 비추었다.

벽면 대용으로 쓰던 만큼 면적이 넓은 커튼이었기에 주변이 확 밝아진다.

살짝 옆으로 비켜선 사회자가 가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히죽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메인 디쉬긴 합니다만…솔직히 하나씩 보여드리면 좀 감질나시죠? 여기까지 기다리셨는데. 그래서 한꺼번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처억.

느릿하게 올라가는 커튼.

사회자에 이어 또 한 번 비출 대상을 잃은 조명이 향한 곳은…커튼 너머에서 일렬로 주르륵 늘어선 엘프들이었다.

분노와 치욕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력 봉인 아티팩트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다섯 명의 남녀.

과거의 카를라가 그러했듯 과할 정도로 아찔한 의상을 입은 엘프들을 가리키며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실반 마탑! 원소 마법으로 정령술을 대체할 거라던 엘프의 자존심! 하지만 이들은 지금은 한낱 노예일 뿐이죠! 그것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나운 노예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지금껏 조용히 있던 손님들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VIP석에 달린 마도구를 이용해 노예로 나온 엘프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자 셋에 남자 둘.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내게도 익숙한 푸른 롤빵 머리와 푸른 눈동자. 그리고 괘씸한 허벅지를 가진 엘리샤였고.

다른 하나는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작은 소녀였다.

하지만 진짜 어린아이가 마탑의 수뇌부를 차지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저 사람이 실반 마탑주이리라.

탑주는 엘리샤와 같은 하이엘프라 들었거든.

게임에서는 어느 날 사형당했다는 소식으로만 등장하는지라 얼굴은 오늘 처음 봤지만 확실하다.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슬렌더한 몸매가 엘프의 종특이지만…하이엘프는 그렇지만도 않으니까.

세계수와 처음 교감을 나눈 무녀. 그녀의 혈통을 타고 세계수의 가호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탓이다.

막대한 생명력을 부여해, 안 그래도 오래 사는 엘프의 수명을 더더욱 늘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 생명력이 몸에 영향을 미쳐 평범한 엘프와는 다른 체형으로 자라게 된다는 그런 설정이었지.

보통은 엘리샤처럼 여기저기 풍만한 몸매가 된다고 들었지만….

가끔 하이엘프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많은 생명력을 타고난 이는, 반대로 어느 시점에서 성장이 멈춘다고 들었다.

아마 저 실반 마탑주가 그런 경우겠지.

내 예상이 맞았는지, 사회자가 이 부분에 대해 주절주절 길게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으나…다른 이들은 집중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더라.

하긴. 그냥 엘프면 모를까 하이엘프가 흔한 존재는 아니니, 흥미로울 수도 있지.

객석의 반응이 좋자 흥이 오른 사회자가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몇 가지 썰을 더 풀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다들 아십니까? 먼 과거에는 불로장생을 노린 몇몇 권력자들이 하이엘프를 사냥해 잡아먹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우적우적하고요.”

엄멤메.

그런 일도 있었다고?

H&A에 나오는 설정은 뛰어난 기억력 특성 탓에 빠삭하게 알고 있지만, 에우렐리아 대륙의 역사 같은 게임에 잘 안 나오는 부분은 나도 모르는 게 많다.

“하이엘프의 몸에 깃든 막대한 생명력을 노린 거겠죠. 하지만 아무도 목적하는 바를 이룬 자는 없었으니, 혹시라도 비슷한 실수를 하는 분들이 없길 바랍니다. …뭐어. 다른 방법으로 먹는 건 올바른 사용법이겠지만요!”

사회자가 마지막에 덧붙인 농담에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화기애애해진 경매장 분위기.

물론 당사자인 엘프들은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은 엘리샤.

자기 스승 격인 탑주를 농지거리로 삼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바로 그 스승 때문에 억울하게 노예살이를 하게 됐음에도.

…이럴 때 보면 참 한결같은 성격이라는 생각이 드네.

나 때문에 평판을 조지고도 내 나름의 처세술이었다는 걸 이해하자 뭐라 하지 않았었지.

예전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제대로 노예 교육을 받아 기를 죽여놓은 카를라와 달리, 의도적으로 고고한 모습을 살리기 위해 교육을 생략했기 때문일까.

엘리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찰나.

“이…!”

“그만.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가만있거라 엘리샤. 네가 성내봤자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될 뿐이다.”

유일하게 덤덤한 표정이던 마탑주가 그런 엘리샤를 말렸다.

그래. 오래 산 엘프가 다른 종족이 엘프를 향해 품은 이런저런 환상을 모를 리가 없지.

뭐, 알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 게 엘프라는 종족이지만…탑주는 조금 다른가 보네.

절그럭.

손과 발에 감긴 족쇄에서 쇠사슬 소리를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탑주가 가녀린 목소리로 외쳤다.

“듣거라! 여유가 있다면 나와 이 아이를 같이 데려가다오. 만약 그리 해준다면 상대가 누가 됐건 나는 기꺼이 새 주인의 말에 뭐든 따르마. 내 평생의 마도를 내놓는 것은 물론이요.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을 터이니 부디 한번 재고해다오.”

그리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탑주.

하지만 그녀는 알까.

저러면 저럴수록 더 불타오르는 종자도 있다는걸.

…어쩌면 알면서도 유도한 걸 수도 있겠네.

목적이 엘리샤와 같은 곳에 팔려 가는 거라면 저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까.

실제로 척 보기에도 작고 여리여리한, 심지어 정신적으로도 강해 보이는 탑주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까 이제 경매를 시작해라!”

“그래! 하이엘프가 아니라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여기저기서 경매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난처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회자.

“으음…아직 준비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만…그래도 여러분이 이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좋습니다! 바로 상품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가장 오른쪽 끝에 있는 남자 엘프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 사회자.

“우선 저 엘프의 이름은….”

별 관심도 없는 남자 엘프를 시작으로 왼쪽으로 한명씩 설명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이쪽은 한때 미래의 대마법사로 촉망받았던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 아, 이젠 실반 마탑에서 제적당했으니 실반은 빼야겠지만요! 몸매를 보고 얼추 짐작하셨겠지만, 스승인 전 마탑주와 같은 하이엘프입니다! 나이는 20살. 당연히 처녀!”

“마지막으로! 감히 고객님들을 상대로 조건을 제안했던 전 실반 마탑주, 이리스 실반 바나티스! 나이는 무려 517살! 그런데도 처녀! 517년 묵은 처녀라니! 이건 프리미엄이 붙을 수밖에 없네요!”

사회자의 설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긴장어린 침묵이 경매장을 가득 채운다.

엘프 노예는 비싸다.

다들 평균 이상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도 그렇지만, 긴 수명 덕에 그 아름다움이 오래 간다는 것도 이유다.

그 외에도 적은 매물, 엘프라는 종족이 가진 환상, 강한 정조 관념 등등.

인기 있을 만한 이유는 싸그리 긁어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그러니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가진 돈으로 원하는 엘프를 살 수 있을까. 옆 사람이 노리는 게 내가 노리는 엘프와 같은가 등등.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떠보듯 웅성거리는 장내.

욕망과 이성이 질척하게 뒤섞이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자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입찰을 시작하죠! 원하는 노예를 순서 상관없이 지목해 금액을 제시해주시면 됩니다!”

“““…….”””

기껏 사회자가 판을 깔아줬건만 서로 눈치만 보며 먼저 나서려 들지 않으려 하길래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오오! 지금껏 출품된 물건을 대부분 구매해주신 VIP 손님! 이번에도 손을 들어주셨군요! 어느 노예에 얼마를 입찰하시겠습니까?”

이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엘리샤에게 히죽 웃어주며 대답했다.

“전부. 총합 10만 골드.”

경악이 자아낸 침묵.

그 속에서 카를라가 눈치 없이 포도알을 물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얌.”

…지금은 가만히 좀 있어.

멋있는 장면이었단 말이야.

“얌.”

눈치 없이 포도알을 물어 내 입에 집어넣어 주는 카를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의외로 그런 카를라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내가 부른 10만골드에 경악해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어안이 벙벙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만 골드…말씀이십니까?”

“다섯 전부를 합쳐서 10만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한번 확답해주자, 이를 기점으로 경매장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말도 안 돼! 지금까지 쓴 돈이 얼마인데 여기서 더? 그것도 10만 골드를?!”

“그보다 총합이라고 했나요? 그럼 한명에 2만 골드 꼴이잖아요! 대체 누구의 대리인이길래….”

“노예는 거들떠보지도 않길래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냥 눈이 높은 거였군. 그보다 남자까지 사가다니…맛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건가? 거, 취향 참.”

마지막 아저씨 뭐야. 그런 거 아니거든?

무릎에 앉은 카를라를 조금 더 끈적하게 쓰다듬으며, 최대한 그런 취향 없다는 어필을 했다.

…어째서인지 엘리샤의 표정이 배신감으로 일그러졌지만.

아냐. 이게 네 미래다! 같은 메세지 아니라고.

애써 엘리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자니, 사회자가 어찌어찌 소란을 잠재우고서 입을 열었다.

“흠흠. 손님? 제가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으…10만 골드가 워낙 큰 금액이잖습니까? 저희 경매장 규칙상….”

“알고 있습니다. 현금 혹은 그에 준하는 환금성을 가진 물건으로만 대금을 치를 수 있다는 거죠?”

“맞습니다. 호옥시. 호오오옥시 괜찮다면 손님의 진정성을 제게 조금만 보여주실 수 있을런지요?”

쉽게 말해 정말로 살 능력이 있는지 증명해달라는 소리구만.

뭐어…10만 골드면 어디 공작가나 후작가쯤 되는 가문의 자산을 싹싹 긁어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만한 현금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있고,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백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절그럭.

1개에 100골드의 가치를 가진 가장 높은 단위의 통화.

말이 백금화지, 실제 백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한 연금합금으로 만들어진 동전이다.

온갖 희귀광물과 고위 연금술사의 노오오력으로만 만들 수 있기에 위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화폐.

그런 백금화가 1,000개 담긴 묵직한 주머니를 염력으로 띄워 사회자를 향해 날려 보냈다.

“어이쿠 저희가 직원을 보내도 되는데 이렇게 직접 보내주시다니. 친절에 감사드…으으?!”

너스레를 떨며 받아든 주머니. 그 입구를 열자마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백금화의 광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회자.

그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안을 휘저어, 다른 동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위조하기 힘든 백금화도 못 알아본다면, 게프 경매장에서 사회자를 보지도 못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만 골드…확인했습니다. 혹시 더 부르실 분 있습니까…?”

“““…….”””

있을 리가.

모두가 닭쫒던 개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노예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없군요. 그럼 실반 마탑 출신의 노예는 전부 합쳐서 10만 골드에 낙찰….”

“잠깐!”

누군가 다급히 손을 들어 사회자의 말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좀 익숙한 사람이다.

일전에 카를라를 사기 위해 1만 골드를 불렀던, 나만 없었으면 무난히 카를라를 낙찰받았을 키프로스 후작.

이놈의 고자 사디스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묻겠소 사회자 양반. 저 노예들은 묶음으로만 판매하오?”

“아닙니다. 본래 개별로 판매하는 걸 저 손님이 전부 사들이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럼 한명당 2만골드라는 소리구려.”

“입찰하신 분이 세세한 설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손님?”

내게 은근한 기대가 담긴 시선을 보내는 사회자.

만약 내가 여기서 누구는 비싸게 하고, 누구는 싸게 한다면 싼 노예를 노리고 다시금 경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여긴 것이리라.

뭐, 키프로스 후작이 눈독 들이는 노예는 안 봐도 뻔하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