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사겸사죠. 겸사겸사!”
그리 말하는 것과 동시에 어두운 복도가 끝나고, 휘황찬란한 경매장 내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콜로세움. 혹은 오페라 무대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공간.
방금까지 헤실거리던 카를라가 순간 움츠러들며 내게 몸을 기대왔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느낌.
하기야. 지금은 확 밝아지다 못해 즐기고 있는 느낌도 들지만, 아직 카를라는 내게 팔린 지 2달이 조금 안 됐다.
예전 생각이 떠올랐을 수도 있지.
가볍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엉덩이를 토닥여주자 천천히 진정하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감사해요 주인님.”
“무얼. 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 써주겠어?”
“흐으. 엘리샤도 이제 곧 주인님께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질투 나네요.”
“그렇다고 괴롭히지는 말고.”
“설마요. 그저 앞으로도 주인님께 계속해서 귀여움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보다 이제 슬슬 연기 시작해야죠.”
“그래. 일단 자리에 앉자고.”
팡!
“하윽!”
카를라의 엉덩이를 소리 나게 두드리자, 이를 신호 삼아 순식간에 분위기가 돌변한 카를라.
마치 팔려 가는 소처럼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모습이 실로 처량하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처음 카를라를 샀을 때의 묘한 가학심이 슬금슬금 올라올 정도.
“빨리 빨리 안 와? 내가 널 끌고 가야겠어?”
“힉! 지, 지금 가요 주인님.”
“쯧. 진작에 이럴 것이지.”
질질 끌던 다리를 잽싸게 내 보폭에 맞추는 카를라의 모습에 한차례 혀를 찼다.
그리고 향하는 곳은 VIP석으로 가는 통로.
오들오들 떨며 필사적으로 내게 따라붙는 카를라의 감촉을 즐기며, 걷다 보니 점점 주변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힐끔 대는 사람부터,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까지.
대부분은 카를라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왔으나…그것도 내가 VIP석에 앉자 대부분 사라졌다.
아마 자기랑 급이 다른 사람이라 여기는 거겠지.
실제로 게프 경매장의 VIP 회원권은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경매장에서 쓰거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가진 사람.
혹은 게프 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사람만이 받을 수 있으니까.
“허…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일반석과 달리 훨씬 푹신한 의자, 옆자리와의 널찍한 간격.
물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서의 영상을 송출하는 마도구는 물론이요.
오늘 뭐가 출품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카탈로그까지 있다.
거기에 간단한 식사나 간식거리를 주문할 수도 있는지, 옆자리의 이름 모를 귀부인이 느긋하게 고기를 썰고 있네.
H&A를 플레이하다 보면 어느 시점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연스레 얻게 되는 VIP 회원권이라 별 감흥이 없었으나….
실제로 누려보니 이거 진짜 맘에 든다.
이 세상에 떨어지며 갑자기 돈이 많아졌으니, 나도 일종의 졸부가 아닐까?
그런 이유로 괜히 졸부 티를 내며 히죽거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곁으로 다가오는 집사복을 입은 중년 사내.
아마 VIP석 전담 직원 같은 그에게 회원권을 보여주고, 간단한 과일을 몇 개 주문했다.
경매가 시작되려면 아직 좀 시간이 남은 것 같았으니까.
카를라를 한쪽 무릎에 앉혀놓고 한손으로는 여기저기를 주무르고, 다른 한손으로는 청포도를 한 알씩 따먹으며 카탈로그를 훑어봤다.
거물 마피아가 고양이를 쓰다듬는 장면에서, 고양이를 카를라로 바꾼 것 같은 모습.
하지만 이걸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아까 보니 대충 코트로 덮어놓고 펠라 받는 미친놈도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뭔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절대 조금 전의 복수는 아니다. 그냥 애드립이지.
과일 접시에서 손을 내려놓고, 대신 카탈로그를 들었다. 그리고는 턱을 까딱하며 카를라에게 명령했다.
“하나씩 입에 넣어 봐.”
“네…?”
내게 마구 쓰다듬 당하며 무력함을 곱씹던(입가는 살짝 올라가 있더라) 카를라가 덩그러니 놓인 과일 접시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내가 포도알을 하나를 집어 내 입에 집어넣는 카를라.
카탈로그를 팔랑팔랑 넘기며 이를 받아먹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뱉어낸다.
“퉷.”
“주, 주인님? 무언가 문제라도….”
“문제? 문제라고 했나?”
절로 튀어나오는 비아냥거리는듯한 목소리.
이에 카를라가 잔뜩 겁먹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죄송…죄송합니다 주인님.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부디 자비를….”
아직 채 지워지지 않은 자존심의 파편인 걸까.
카를라의 얼굴 위로 굴욕과, 수치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포가 피어오른다.
그야말로 굴복 직전의 노예 같은 모습.
…이거 진짜 연기 맞지?
일전에 엘리샤 앞에서 연기할 때는 그렇게 어색하더니, 이런 연기는 또 왜 이렇게 잘한담?
역시 즐기는 자 모드에 들어가서 그런가.
하긴. 요즘 들어 평범하게 꽁냥대는 야스만 했었지.
가끔은 이런 강압적인 플레이가 끌리기도 하는 것이리라.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최대한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을 쓰는 건 사람이나 하는 일이지. 너 아니잖아.”
“아.”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한 카를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무슨 뜻인지는 진작에 알아들었건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듯한 모양새.
하지만 나는 안다. 카를라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건 긴장해서가 아니라, 미소를 참으려 하는 중이라 그렇다는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카를라에게 조금 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입으로 옮겨. 짐승처럼.”
“…네 주인님.”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눈빛의 카를라가 천천히 고개를 과일 접시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포도알 하나를 똑 떼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작은 청포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는 입술과 입술.
보드라운 감촉. 뜨거운 숨결이 그 위를 덮어씌운다.
“으읏….”
마음만 먹으면 눈꺼풀 개수도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카를라가 내게만 보이는 각도로 말없이 눈웃음을 지었다.
만족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눈빛.
슬쩍 눈동자만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이쪽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몇몇 보인다.
그래. 이 정도면 되겠지.
누가 봐도 노예를 제 욕망대로 다루는 철부지 도련님처럼 보일 거다.
입으로는 카를라가 물어다 주는 과일을 받아먹으며, 태연히 카탈로그를 읽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로 우스꽝스런 가면을 쓴 사내가 올라왔다.
저번에도 봤던 경매의 사회자다.
할짝.
카를라의 침 약간과 과즙이 묻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조금 전에 봤던 카탈로그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번 경매의 메인은 당연히 엘리샤와 다른 엘프들.
하지만 구색 갖추기 용이건, 메인을 띄워주기 위한 들러리 용이건, 다른 괜찮은 물건들도 많이 나온다.
희귀 마법서, 영약, 고위 마도구, 그 외에도 이것저것.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사야지.
어차피 돈은 많다.
그리고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신분은 황금 고블린 같던 내게 좋은 방패가 되어줄 테고.
몰래몰래 돈지랄하는 거라면 지금껏 몇 번이고 해봤지만…이렇게 대놓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걸리는 미소.
“흐.”
“히끅.”
어째서인지 내 얼굴을 본 카를라가 딸꾹질하는 것과 동시에.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가면을 쓴 사내가 과장스런 몸짓으로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물건은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 클리프 경이 만든 단약으로, 무려 빠진 머리를 다시 자라게 하는….”
“1,000골드!”
“보이십니까? 이 아름다운 자태가. 오지에서 자연 마력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로라 마탑이 만든 명품 아티팩트입니다! 그 효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4대 원소의 내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4,000골드!”
“최근 벌어진 영지전에서 패배한 칼루아 자작가의 여식! 미르크 칼루아를 3년간 시종으로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이번 물건입니다! 아, 시종이라고는 해도…다들 아시죠? 그럼 5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다음은 예지 마법으로 미래를 엿보려다가 실패한 비운의 대주술사! 고점에서 물려 9만 골드를 빚진 야크 데칼챠의 눈물 젖은 부적을….”
“2,000골드!”
“바르면 피부 미용에도 좋고, 미약하지만 야릇한 기분도 들게 해준다는 핑크 오일! 물론 저급한 시중의 물건과는 급이 다릅니다! 여길 봐주세요! 래버넌트 공방에서 만든 정품 인증인 별 다섯 개가….”
“300골드!”
.
.
.
.
.
좀 쓸만해 보이는 건 죄다 긁어모으고 있자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어머? 다들 엘프를 노리고 경매에 참석한 틈을 타, 다른 물건들을 싸게 사려나 보네요.”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있으니 현명하다면 현명한 일이구려.”
“지금 거느린 노예에게 만족하는 것도 있겠죠. 보세요. 엘프에 뒤떨어지지 않는 미모잖아요? 다른 노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걸 보아 확실해요.”
“크흑…머리도 풍성한 놈이 탈모약은 대체 왜…!”
어, 음….
이 와중에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대머리 중년의 모습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거 나중에 제이슨 교수한테 선물하면서 근접전 과외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어차피 똑같은 대머리에게 갈 물건이니 얌전히 포기하도록.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경매를 진행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따라붙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돈찍누를 시전하며 자본주의의 희열을 느끼기를 몇 시간.
지금까지와 달리 요란하지 않고 조용한 흥분이 경매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일까.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걸맞게 한껏 과장된 언행을 선보이던 사회자가 침착한 태도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그럼 이제 여러분이 가장 기다리시던 물건이 나올 때가 됐군요.”
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