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반 마탑 정령 소환 사건의 주력 용의자들 전원이 외차원 접촉 미수로 노예형이 결정되었다.
그중에는 엘리샤도 끼어 있었고.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카를라. 준비해.”
오랜만에 게프 시를 다시 방문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만왕 님 후원 감사합니다! 자세한 건 공지에 있어요!
오늘 조금 일이 있어 늦었읍니다...
아, 추석 연휴 기간에는 전도 부치고, 다른 할 일도 많아서 일일 연재를 지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최대한 써보겠지만, 연휴 기간 동안은 부득이하게 안쓴영애는 비정기 연재가 될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립니다.
엘리샤가 노예가 됐다.
아니, 엘리샤를 포함한 실반 마탑의 수뇌부 대부분이 노예가 됐다.
본래 정령 소환은 사형감이지만…지레 겁을 먹은 내부 고발자가 계획단계에서 신고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기 때문.
내겐 정말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H&A의 본래 시나리오처럼 사형이었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노예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국 카를라 때처럼 돈으로 사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결석계 좀 끊어주세요 이오나 교수님.”
“얀델 학생…그러니까 지금 노예가 된 반 친구를 사러 가기 위해 합법적으로 결석하게 해달라는 거지?”
“바로 그거에요.”
“노예가 된 엘리샤는 얀델 학생의 시종이 되어 호위라는 명목으로 같이 수업 들을 거고?”
“나중에는 같이 사교도랑 몬스터를 때려잡을 생각이에요.”
“재미있네! 진행시켜!”
그렇게 나와 카를라는 아카데미를 잠시 떠났다.
자세한 사유는…뭐, 이오나가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
게프 시로 가는 마차 안.
내게 바짝 붙어 앉은 카를라가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을 해제했다.
요즘 카를라에게 배우고 있는 린델하이트 가문 비전 마법진 수업이 일단락났기 때문.
사실 처음에는 자신만 아는 직관적인 의미 전달이 가능한 문양이라길래, 한글이나 한자를 마법진에 대입해본 적이 있다.
영창과 같은 자기암시의 원리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이상하게 안 되더라.
이유는 간단했다.
한글이건 한자건 결국 ‘문자’ 일종이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을 도식화하여, 보는 순간 바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문자는 보고 해석을 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한두 개 정도야 마법진에 끼워 넣어도 제대로 작동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조합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단어는 문장이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해를 동반한다.
결국 직관이 아닌 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리기에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셈.
그런 이유로 카를라가 일전에 제안했던 린델하이트 가문의 비전 마법진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법진에 쓰려고 만든 문양이라 그런지, 마법에 쓰이는 각종 요소를 잘 표현해놨더라고.
오늘도 뿌듯한 표정으로 내 어설픈 마법진을 바라보던 카를라가 돌연 허벅지를 콕콕 찔러왔다.
“주인님 주인님.”
“응?”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말해봐.”
유지하고 있던 마법진에서 마력을 회수하고, 카를라의 루비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대체 엘리샤는 왜 같이 노예형을 받은 거예요?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주인님은 뭔가 아시나요?”
“…조금 짐작 가는 게 있긴 해.”
실반 마탑주가 엘리샤를 위해 정령을 소환하려 했지만, 정작 엘리샤 본인은 정령 소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럼에도 엘리샤가 같은 형벌을 받게 된 건….
툭 까놓고 말해 누명이다.
이번 정령 소환 계획이 엘리샤를 위한 것이라는 점과, 아카데미에 떠도는 안 좋은 소문을 짜집기해 소설을 한 편 써놨더라.
노예로 영락한 한때의 라이벌인 카를라를 보며, 갈 곳을 잃은 열등감이 차곡차곡 쌓였고.
이는 아카데미 안에서 카를라의 주인인 나를 압박하여 카를라에게 온갖 수치를 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나를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 했으나….
그런 내가 1학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위업인 에드메렉 토벌에 성공하자, 지금껏 쌓인 열등감이 폭주하여 정령 소환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그리하여 정점에 군림하기 위해서.
…대충 이런 느낌으로 엘리샤를 힘에 미친 마법사로 만들어놨더라고.
그걸 또 공식 조사 결과랍시고 발표해 노예형을 때렸다.
전형적이지만 꽤나 그럴듯한 내용인데다가, 무려 교단 연합의 공식 발표라 다들 믿고 넘겼겠지.
하지만 엘리샤에게 직접 자신이 악명을 자처하고 있다는 걸 들은 내겐 개소리에 불과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H&A에서의 몇 번이고 엘리샤를 보며, 그 정도로 나쁜 성격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누명이다.
“아마 들끓는 고요 교단의 수작이겠지.”
“…그거 악신 교단 아니에요?!”
“맞아. 멀쩡한 사람인 척 숨어들어서 이간질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지.”
혼탁한 합일이 식욕, 추악한 번성이 성욕의 자리를 차지한 악신이라면 들끓는 고요는 나태의 주인이다.
문제는 나태해지기 위해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상한 녀석이라는 거지만.
“들끓는 교단의 신도들은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된 놈들이야.”
영지전을 유도하거나, 누명을 씌워 처벌하거나, 주요 시설을 불바다로 만드는 등.
이쪽을 사분오열 시키는 대부분의 사건은 놈들이 원인이라고 보면 될 정도.
당장 린델하이트 가문에 사교도 혐의라는 누명을 씌운 것도, 레반틴 제국 황실에 숨어든 들끓는 고요의 사도다.
…카를라에게도 린델하이트 가문이 멸문한 진상에 대해 알려줘야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안된다.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백금색 머리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그냥 악신 교단에서 씌운 누명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되는 거 아닌가요?”
“누가 믿어주겠어?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설령 증거가 있어도,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역풍만 맞을걸? 이만한 조작이 가능하다는 건 상당한 권력자라는 소리잖아.”
애초에 들끓는 고요의 신도는 너무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거기에 본격적으로 들끓는 고요 교단에 대해 파헤치고, 그 사도를 쓰러뜨리는 스토리는 레반틴 제국이 무대고.
레반틴 제국 쪽이면 모를까, 교단 연합에 숨어든 놈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기에 어떻게 찌를 수도 없다.
“그러니 일단은 엘리샤의 일에만 신경 쓰자고.”
“으음. 그러네요. 주인님 말씀대로 까딱 잘못하면 더 곤란해지겠어요. …아, 그럼 경매장에서 제가 좀 불쌍한 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굳이?”
“어차피 주인님께서 전부 사실 거죠? 그런데 먼저 노예가 된 제가 옆에서 편하게 있으면 들끓는 고요 교단 쪽에서도 곤란할 거 아니에요. 기껏 노예로 만들어 망가뜨리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그러네.”
실반 마탑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빼낸 내용물이 멀쩡하면 의미가 없잖은가.
만약 내가 평소처럼 카를라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심지어 카를라의 마나 코어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놈들이 알게 되면.
그럼 어떻게 해서든 내가 낙찰받는 걸 견제하거나…심하면 나를 암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뛰어난 스파이는 뛰어난 암살자이기도 하니까.
“좋아. 그럼 카를라 네 말대로 해보자고. 악덕 노예 주인 같은 느낌이면 되려나?”
“헤헤. 제가 좀 생각해둔 게 있는데요….”
루비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의욕을 불태우는 카를라.
표정이나 대사,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늘어놓는 모습에서는 본인의 욕망이 진득이 묻어 나온다.
…이걸 무슨 플레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며칠 뒤. 정확히 경매가 열리는 날에 맞춰 도착한 게프 경매장.
여전히 대륙 최고의 경매장이라 불리는 곳답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곳이다.
아니, 평소 이상으로 떠들썩하네.
“오랜만이요 필라프 자작.”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라노 백작님.”
“오늘 아주 귀한 물건이 나온다 하여 급하게 나와봤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렇겠지요.”
“허허…하나라도 건질 생각으로 왔는데, 이거 지갑 끈을 생각보다 많이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려.”
그렇다.
오늘이 실반 마탑의 엘프들이 경매에 올라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본래 카를라가 그러했듯, 노예는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경매에 올렸는데…여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우선 대부분이 중위 마법사고 탑주는 상위 마법사이기까지 하니, 관리가 무척 힘들다는 점.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마탑 수뇌부 전체가 정령을 소환하려 했다는 화제성이 식기 전에 빨리 팔아버리려 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프라는 종족이 가지는 이미지 때문이다.
이쪽 세상에서도 엘프 능욕에 대한 환상이 상당하거든.
이미 마음이 꺾여 고분고분해진 엘프보다, 자존심이 살아있는 엘프를 직접 조교하고 싶어 하는 니즈를 외면하면 상인이 아니지.
그런 이유로 빠르게 열린 경매.
그리고 벌떼 같이 몰려든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
평소보다 들뜬 분위기의 게프 시에서 나는 무얼 하고 있느냐면.
주물주물.
카를라를 옆에 끼고, 엉덩이를 마구 주무르며 경매장 입구에 섰다.
“흑….”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품에 반쯤 안겨있는 카를라.
그 모습은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수치스러움에 떨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카를라의 목덜미에 가시덩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과, 내게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
멍하니 나와 카를라를 번갈아보던 문지기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어서 오십쇼!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뭐야. 나 이번엔 원래 얼굴로 왔는데 왜 VIP 취급이야?
“어서 오십쇼!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뭐야. 나 이번엔 원래 얼굴로 왔는데 왜 VIP 취급이야?
물론 일전에 게프 시 지하의 던전을 클리어 할 때, 숨어있는 사교도를 찾아내고 주교 하나를 쓰러뜨린 공적으로 VIP 회원권을 받긴 했다.
근데 그걸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VIP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지.
하물며 카를라는 지금 고개를 푹 숙인 상태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카를라를 알아본 것도 아닐 텐데.
떨떠름한 기색으로 경매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바로 옆에서 작게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쿡쿡.”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주무르던 카를라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으르렁거려봤지만…카를라는 그마저도 즐거워할 뿐이었다.
“히힛. 죄송해요 주인님. 그치만 그만큼 주인님의 연기가 완벽했다는 거 아닐까요?”
그 뻔뻔한 발언에 내 표정이 살짝 뾰족해지자, 바로 허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카를라.
자연스레 자신의 엉덩이를 내 손바닥에 비비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참. 이제 곧 저한테 복수할 기회가 많이 올 거잖아요. 그때 전부 풀어주세요. 약간의 애드립 정도는 괜찮다구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만, 지금 이 연기는 그냥 카를라 네 취향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