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나부터 시작해, 헬레나와 페이까지 만나고 난 뒤에야 돌아온 기숙사.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는 다시 카를라에게 마법을 배워야지.
이번에 에드메렉과 싸우면서 느낀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렇게 낮에는 내 방의 개인 수련실에서 이런저런 수련을 하고, 밤에는 침대에서 카를라와 뒹굴기를 며칠.
어느새 페이와 약속했던 주말이 되었고.
난데없이 실반 마탑이 정령 소환을 시도하다 적발됐다는 소식이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궜다.
조금 더 정확히는 마침 실반 마탑에 가 있던 엘리샤도 같이 잡혀갔다는 소식이지만.
“돌겠네.”
이게 이렇게 된다고?
실반 마탑이 정령 소환을 시도했고, 마침 고향에 들렀던 엘리샤도 같이 잡혀갔다.
이번에도 점심시간에 맞춰 페이의 공방에서 맡겼던 영약을 받아오는 길에 들린 소문이다.
아카데미 어딜 가나 지금 그 이야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
모두가 그래서 엘리샤가 연루되어있을 것이다 아니다로 온갖 루머를 양산하는 사이.
“돌겠네.”
나는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전에 3개월이면 엘리샤가 위협이 되지 못할 거라 하셨죠. 이렇게 될 걸 예상하셨나요?”
“예상했지. 그런데 아직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실반 마탑이 정령을 소환하는 것도, 엘리샤가 휘말리는 것도 예상 못했어.”
혹시 그냥 뜬 소문일지도 모르니 어디서 나온 소문인지도 조사해봤으나.
놀랍게도 피어오르는 새싹 교단에서 발표한 공식 성명이었다.
피어오르는 새싹은 풍요와 관련된 신이라 약간의 헌금을 받고 밭에 축복을 내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도 피어오르는 새싹의 사제 중 하나가 실반 마탑 근처의 마을에 축복을 내리러 갔다가 내부 고발자의 신고를 받았다나?
현재는 다른 교단과 협력하여 조사 중이라는데…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이라고 발표한 게 참 골때린다.
엘리샤가 아카데미에서 만난 어느 인간을 마음에 들어 하며 후원을 하건, 뭘 하건 어떻게든 지금 연을 맺어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그 탓에 실반 마탑 내부에서는 여러모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엘프 우월주의자부터 시작해서 단순히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타 종족이 연관되면 엘프들이 잃어버린 정령술을 대신할 마법을 연구한다는 순수성을 잃게 될 거라는 사람.
그 외에도 그냥 엘리샤를 질투하는 사람까지 끼어들어 극렬한 반대를 외쳤다.
반대로 실반 마탑도 이제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사람이나.
내가 카를라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에, 잘만하면 원소마법으로는 한발 앞서던 린델하이트 가문의 비전을 빼 올 수 있을 거라는 사람 등.
엘리샤에게 찬성하는 사람이 서로 나뉘어 싸웠다고 한다.
탑주는 그중에서도 전통 중시 반대파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엘리샤를 향한 애정 때문에 차마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중이었고.
그런 실반 마탑주는 이번 던전 실습에서 엘리샤가 에드메렉에게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쯤 눈이 뒤집혔다.
지금껏 망설이기만 하던 정령 소환에 지체 없이 손을 대려 했을 정도로.
문제는 너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킨 탓에, 다른 파벌의 마법사에게 계획을 들켰다는 거지만.
누군지 모를 내부 고발자는 그렇게 정령 소환 계획을 알게 된 사람 중 하나다.
가만있다가 같이 나가리 되느니, 직접 고발해서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으려 했던 것이리라.
“…이거 역시 나 때문이겠지?”
“으음. 그렇겠죠?”
H&A의 본래 스토리에서는 엘리샤가 누구에게도 후원 제의를 건네지 않았으며, 던전 실습 또한 아무 문제 없이 끝났었지만….
카를라를 노예로 들이며 내게 관심을 가진 엘리샤가 계속해서 나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입학 전에 어쩌다 죽인 피에트로 때문에 에드메렉이 실습 던전을 습격해오기까지 했다.
결국 내가 한 일들이 스노우 볼이 되어 실반 마탑의 정령 소환을 앞당기고, 덤으로 엘리샤까지 잡혀가게 만든 것.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이래저래 개입한 순간부터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달라질 거라는 건 에드메렉의 건으로 똑똑히 알게 됐다.
그런데 나랑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실반 마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아….”
연신 한숨만 내쉬는 꼴이 안타까웠던 걸까.
카를라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어쨌든 엘리샤는 정령 소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거잖아요? 그럼 큰 문제 없이 아카데미로 돌아올 거에요.”
“그렇겠지?”
아무리 시나리오가 틀어졌다지만, 엘리샤가 직접 정령 소환을 하려 들지는 않았으리라.
“사교도와 달리 정령 소환에는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잖아요.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연좌제로 노예가 된 카를라 네가 말하니 뭔가 그러네.”
“헤헤….”
어색하게 웃는 카를라의 볼을 괜시리 쓰다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바닥에서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내 안의 당황과, 그 당황에서 오는 불안을 씻어내린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어찌 됐건 카를라 말대로 엘리샤는 무혐의 처리로 풀려나지 않겠는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엘리샤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실반 마탑의 몰락을 막고 은혜를 파는 쪽으로 가볼까 고민하던 차에 사건이 터진 건 여전히 당황스럽긴 해도.
내가 진정된 걸 눈치챈 걸까. 얌전히 얼굴을 내어주고 있던 카를라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내 손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제가 노예가 되긴 했지만…그래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아요. 이렇게 주인님이 저를 귀여워해 주시잖아요?”
“허…그걸로 된 거야?”
“설마요. 이걸로는 부족하죠.”
그리 말한 카를라가 슬금슬금 다가와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의 심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제 불안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천천히 올라오는 카를라의 입술.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나를 간질인다.
“어디든 괜찮아요. 저를 좀 더 만져주세요 주인님.”
마지막으로 내 귓볼을 할짝이며 말하기를.
“카를라는 주인님의 애정에 굶주린 애완 노예랍니다?”
“…….”
누구라도 넘어갔을 완벽한 유혹.
이에 홀딱 넘어가, 카를라의 전신을 마구 쪼물쪼물하고 싶은 충동이 끓어 올랐지만…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카를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 천천히 밀어냈다.
“일단 이것부터 먹고 하자.”
그리고는 인벤토리에서 페이에게 받아온 영약을 꺼내 들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맞다. 이게 있었죠. 흡수하시는 거 도와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개인 수련실의 중앙에 앉은 채, 눈앞의 영약에 정신을 집중했다.
======================
【마혈단】
방대한 마나와 순수한 생명력이 조화를 이루어 상승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뛰어난 실력의 연금술사가 완벽하게 정제한 영약입니다.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육체 관련 스탯과 마력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
이름만 들으면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이걸 먹고 주화입마가 생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냥 먹어도 될 것 같다는 말은 그런 뜻이거든.
마혈단의 정보를 읽는 사이. 내 가슴팍에 손을 얹은 카를라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 다 됐어요 주인님!”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신나 보인다 카를라?”
“주인님에게 좋은 일은 저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본심은?”
“생명력이 풍부한 재료는 정력도 높여준다고 들었어요!”
“오케이. 진짠지 아닌지 확인해 보도록하자고.”
아까부터 조금 노골적이긴 하지만, 내 관심사를 돌리려는 카를라의 수작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리 엘리샤에 대해 걱정해도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엘리샤를 잡아간 교단에 쳐들어가는 게 아닌 이상 말이다.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마혈단을 한입에 삼켰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이내 무슨 크림 같은 상태가 되어 목구멍을 부드럽게 통과한다.
그렇게 마혈단을 삼키는 순간.
띠링!
【영약: 마혈단을 섭취하였습니다.】
【특성: 약성 체질로 인해 흡수가 한층 용이해집니다.】
【근력, 내구, 마력 스탯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간결한 알림창.
그걸로 끝이었다.
“……?”
“???”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와 카를라.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영약을 먹으면 그 기운을 흡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H&A에서조차 미니 게임으로 흡수 효율을 정하는 과정을 거쳤고, 현실이 된 지금은 직접 영약의 기운을 마나 코어에 안착시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하나 없이 삼키는 순간 알아서 몸이 마혈단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진짜 이걸로 끝인가 싶어 상태창을 확인해 봤지만.
======================
이름: 얀델
칭호: 어설픈 트레저 헌터
기초 능력
근력: 12 -> 13
내구: 12 -> 13
민첩: 13
재주: 15
마력: 19 -> 20
======================
오른 지 얼마나 지났다고 1포인트 더 오른 마력 스탯과, 민첩과 동수를 이룬 근력, 내구 스탯이 나를 맞이했다.
세상에 진짜네.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사실 원인은 명확했다. 당장 알림도 약성 체질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약성 체질은 약 종류의 흡수 효율을 10% 상승 시켜주는 능력일 뿐일 텐데….
“아.”
이거 설마 흡수량을 110%로 고정한다는 소리인가?
즉 미니 게임을 최고 등급을 클리어하는 걸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소리다.
그 탓에 내가 뭘 해보려 하기도 전에 자연스레 몸에 흡수된 것이고.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나, 그건 상태창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법을 쓸 때 상태창의 보정을 받듯이, 앞으로는 영약 흡수에도 상태창의 보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되리라.
“개꿀.”
그래. 심란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하나 있는 게 인생이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를라를 일으켜 세우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음은 카를라가 말했던 생명력과 정력의 상관관계를 확인해볼 차례다.
그렇게 애써 엘리샤의 문제에서 잠시 눈을 돌렸다.
엘리샤가 없는 채로 강의가 재개된 지 열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