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스노우 볼(6)
* * *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도망가려 하는 페이의 발목을 붙잡아 거꾸로 들어 올렸다.
하얀색이었다.
“놔, 놔줘! 이거 놔아앗…!”
“그렇겐 못 하죠. 선배가 제 돈을 전부 어디에 썼는지, 그게 정말 싸구려 흑빵을 어떻게 먹어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인지 확인해봐야겠어요.”
“그런 말을 할 거면 적어도 내 얼굴을 보면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아까부터 팬티만 보고 있잖아!”
“선배 얼굴은 가슴에 가려서 눈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리고 이건 본능…음….”
나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지는 눈살.
이에 빼액빼액 소리를 지르던 페이가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뭐야? 왜 내 팬티를 보고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야…?!”
“선배님. 그, 팬티는 제대로 빨아 입으시는 거 맞죠?”
“…….”
“어째 좀 꼬질꼬질한데….”
변색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꼬질꼬질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진 페이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오….”
“오?”
“오늘도 갈아입었거든?! 냄새라도 맡아볼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자, 기겁하며 발버둥 치는 페이.
막 잡힌 물고기 같은 펄떡거림이다
“미쳤어 미쳤어! 그걸 왜 진짜 맡으려고 그래!”
“선배가 맡아보라면서요.”
“그만큼 어이없다는 뜻이지! 그리고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야! 말할게! 정말로 뭐 샀는지 전부 말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놔줘!”
“그러죠 뭐.”
잠깐 욱해서 저지르긴 했는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지금 좀 위험한 상황이잖아.
천천히 놓아주자, 바닥에 손이 닿기 무섭게 엉금엉금 기어서 구석으로 도망치는 페이.
한번 거꾸로 매달린 탓인지 산발이 된 머리와 흐트러진 교복이 좀 안쓰럽네.
이제 와서 자신의 치마를 내리누른 페이가 내 쪽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후배님은 변태야! 신고하면 잡혀갈 정도의 변태야!”
아니, 지금 같은 몰골로 그런 대사를 하면 어떻게 해.
좀 재밌어지잖아.
“크큭….”
솟아오르는 장난기에 몸을 맡기고,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고라. 제가 잡혀가면 선배님 연구는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어…?”
“그렇잖아요. 저야 물론 선배님이 해낼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다른 사람도 그럴까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표정과 목소리를 지어내며 한 걸음 한 걸음 페이에게 다가갔다.
“히이익! 보, 본색을 드러냈구나…! 공방 앞에서 강아지 플레이 할 때부터 알아봤어! 역시 내 몸이 목적이었던 거지?!”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터벅 터벅.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페이의 눈동자에 불안이 섞이기 시작한다.
“저기…후배님? 이거 장난이지? 장난 맞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난 친구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장난이나 농담 같은 거에 약하단 말이야….”
“하! 이제 와서 그런 말로 제 동정심을 끌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이번 기회에 똑똑히 제가 선배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려드리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덥수룩한 페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흐이익…! 미, 믿었는데…난 후배님을 믿었는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건만, 지레짐작하고 배신감에 울먹이는 페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제가 선배님에게 바라는 것. 그건 바로 언젠가 선배가 만들 현자의 돌이에요!”
“…헤?”
멍한 표정을 짓는 페이에서 방긋 웃어주며 한 번 더 말했다.
“현자의 돌이요 현자의 돌. 선배가 추구하는 길은 결국 연금술의 본질 중 하나인 변화를 깊게 파고드는 길이잖아요?”
연금술 하나로 모든 걸 다 만들 수 있는 경지? 그건 변화의 극에 달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분명 선배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현자의 돌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원하는 게 너무 엄청난 거 아냐?!”
페이의 말대로 현자의 돌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만큼 얻는 과정이 쉽지 않고.
H&A에서의 이야기지만, 플레이어는 페이를 위해 온갖 고난이도 퀘스트를 진행해야 했다.
특정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재료라던가, 대전쟁은커녕 그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 국가를 멸망시킨 키메라의 샘플이라거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초의 대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의 숨겨진 공방을 털고, 그의 연구일지를 넘겨주는 등.
연금술 계열 종결템인 현자의 돌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 라인이라 그런지, 생산직 히로인의 퀘스트치고는 엄청 빡쎘지.
대신, 현자의 돌에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끝까지 성장한 페이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고.
지구에서 봤던 페이의 눈물 나는 성장 스토리를 떠올리고 있던 것도 잠시.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페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배님…후배님은 대체….”
혼란으로 가득 찬 그 시선에 좀 멋쩍게 느껴지는 바람에 냅다 주제를 돌려버렸다.
“그러니까 선배는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관리해야 해요.”
“응?”
“설비 마련하고 재료 사는 거? 좋죠. 그런데 겨우 그런 이유로 미래의 대연금술사인 선배가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건 곤란해요.”
“무거워! 신뢰가 무겁다구 후배님. 대연금술사라니…내가…?”
“네. 혹시 자신 없어요?”
“…당연히 나는 내 이론이 실현 가능한 거라 믿고 있지. 하지만 그게 대연금술사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어…후배도 자신이 대마법사가 될 거라 생각하며 마법을 배우는 건 아니잖아?”
“전 그리 생각하는데요?”
“???”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대마법사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경지다.
태연히 대답하는 내 모습에서 진심을 느낀 걸까. 페이가 광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너무하네.
약간의 서운함을 담아 페이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아얏!”
“어딜 하늘 같은 후원자에게 그런 불경한 시선을 보냅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선배도 졸업하기 전엔 대마법사, 대연금술사 소리 들을 테니까요.”
“졸업하기 전에…? 그건 진짜 현실성 없는 거 아냐?!”
느닷없는 기간 제한에 식겁하는 페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때쯤이면 이미 어떤 식으로든 모든 일이 엔딩을 맞이했을 테니까.
당연히 이를 말해줄 수는 없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적당히 둘러댔지만.
“괜찮아요. 만약 선배가 그사이에 대연금술사가 되지 못하고, 현자의 돌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그땐 진짜 몸으로 갚으시면 되죠.”
“여, 역시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구나…!”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된다는 듯 개운한 표정을 짓는 페이.
에이. 정말로 그런 거 아니래도?
***
한차례 소동이 있던 후.
조금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페이가 새로 산 도구들과, 재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보여주며 얼마가 들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따로 영수증을 남겨놓은 건 아니라 확인은 힘들지만…그래도 내 기억 속 가격과 얼추 맞아떨어지니 거짓말을 하진 않았으리라.
애초에 페이가 그럴 성격도 아니고.
“후…진짜 필요한 것 위주로 사서 뭐라 할 수가 없네요.”
“그치? 나도 다 계획을 세워서 산 거라니까?”
“그 계획에 페이 선배 본인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요.”
“읏….”
다시 쭈글쭈글해지는 페이. 그 모습을 보며 오늘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어쨌든 허투루 쓰진 않았다는 건 알겠어요. 이번에는 제가 따로 생활비를 추가로 드릴게요.”
“정말?! 다행이다아…이대로라면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을지도 몰랐는데….”
“…….”
어라? 생각해보니 기본적인 식사는 아카데미에서 무료로 제공해주잖아?
심지어 그 퀄리티도 상당한 걸로 알고 있다.
문제는 오랫동안 따돌림당했던 탓인지 페이가 사람 많은 곳을 꺼린다는 점.
나중에 한 번 페이를 데리고 식당에 가봐야겠다. 몇 번 같이 먹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래도 안 되면 뭐…그냥 생활비 따로 더 내주면 되고.
…이렇게 말하니 내가 페이를 먹여 살리는 것 같아 몬가 몬가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20골드를 페이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다음 후원금이 들어올 때까지 버티고도 남겠지.
반짝이는 금화를 보며 헤벌쭉한 표정을 짓는 페이에게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건 전부 페이 선배의 생활비로 써야 합니다? 제대로 된 걸 먹고, 옷도 좀 갈아입는 데 쓰라는 소리예요.”
“나 제대로 갈아입었다니까! …그래도 알았어. 이건 정말 나한테만 쓸게.”
고개를 끄덕이며 골드를 품에 끌어안는 페이.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짓눌리는 큼직한 진리 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문득 따로 페이에게 부탁하려던 게 생각났다.
“아, 맞다 선배. 후원자로서 선배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응? 뭐야 후배님? 또 저번에 만들었던 뿌리는 보조 포션을 만들어주면 돼?”
“거기에 더해서 이것도 좀 부탁드릴게요.”
인벤토리에서 실습 던전의 히든 피스였던 백화된 마력초와, 오늘 아침에 받은 이오나의 정혈을 꺼냈다.
“…….”
심상치않은 마나를 뿜어내는 새하얀 풀과, 요사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핏빛 구슬을 보고 입을 떡 벌린 페이.
“이 둘로 영약을 좀 만들어 주세요.”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어…? 백화된 마력초야 중하급 영초니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지만, 이건 뱀파이어의 정혈 아냐? 그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인 것 같은데….”
“이오나 교수님의 정혈이니 당연하죠.”
“…히끅!”
얘가 또 무슨 미친 짓을 한 걸까 하는 시선을 보내오는 페이.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이번 사건의 보상 같은 의미로 받은 거예요. 그냥 먹어도 효과가 좋겠지만 영약으로 만들면 더 좋을 테니 페이 선배에게 가져온 거고요.”
“으응. 그렇겠지. 설마 교수님한테 얼마면 정혈을 파냐고 그랬겠어?”
“…….”
내 이미지의 상태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페이를 노려보자 괜히 찔렸는지 잽싸게 재료를 받아든다.
“아, 아무튼! 영약이라고 했지? 이번에 새로 산 장비들이 있으니까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야.”
“기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어…한 일주일? 마력초는 날것 그대로지만, 정혈은 한번 정제된 거라 가공하기 쉬울 것 같거든.”
“좋아요. 그럼 다음 주말에 다시 한번 들를게요.”
“응! 맡겨만 둬!”
희귀한 재료를 봐서 기분이 좋은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
마침 다음 주말이 휴강 마지막 날이니 딱 좋네.
그 뒤로는 간단한 잡담을 좀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끝나갈 쯤에 페이와 헤어졌다.
아직 페이는 다음 강의가 남아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