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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72화 (72/230)

〈 72화 〉 스노우 볼(5)

* * *

“그럼 혹시 수녀복 좀 몇 벌 받을 수 있을까요?”

“…네?”

“3벌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

헬레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얀델 형제님은…남성분이시지요? 그럼 수녀복이 아니라 신부복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 제가 입을 게 아닙니다.”

“???”

더 알 수 없다는 듯, 황금색 눈동자만 깜빡이는 헬레나.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대답을 재촉했다.

“괜찮을까요 헬레나 사제님?”

“안 될 건 없지요. 다만 외부 반출인지라 저희 교단의 심볼은 빼고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문제없습니다. 수녀복처럼 생기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설마…?”

이쯤 되자 내가 어디에 쓰려는 건지 짐작 가는지, 슬쩍 카를라에게 시선을 돌리는 헬레나.

그리고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카를라의 모습을 보고 확신을 얻은 걸까.

헬레나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조금 전까지 열변을 토해가면 나를 찬양해대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차이.

그래도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는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예…뭐…남는 수녀복이 몇 개 있을 테니 적당히 수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나갔으나, 이미 어색해질 대로 어색해진 분위기라 별로 영양가 있는 대화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사교도를 향한 선신 교단의 경계심이 한층 더 올라갔다는 내용 정도?

단발적인 테러만 깔짝이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에는 본격적인 전투를 주도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내게는 다행인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본래의 H&A 시나리오와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나 듣고있던 것도 잠시.

서로 할 말도 떨어졌고, 마침 점심시간도 된 것 같아 밥이라도 같이 먹겠냐고 물었으나.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번 일로 본단에서 오신 사제분들과 선약이 있어서….”

“에이.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사제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걸요. 그럼 오늘은 슬슬 일어나고, 다음에 또 뵙죠.”

“예에. 얀델 형제님께서 정식으로 저희와 연을 맺기로 하셨으니, 앞으로 만날 일이 많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헬레나와 헤어져 중앙 광장 쪽으로 향했다.

이왕 나온 김에 페이까지 만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습격 사태로 휴강 중인 1학년 A반과 달리, 2학년 A반인 페이는 오늘도 수업이 있겠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이니 괜찮겠지.

“후우…아카데미가 넓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네. 움직이기가 귀찮아.”

“주인님도 이제 아카데미에 대한 환상이 깨질 때가 되셨군요. 보기에는 멋있고 시설도 좋지만 왔다 갔다 하기는 정말 귀찮죠.”

카를라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주인님. 저한테 그렇게나 수녀복을 입히고 싶으셨나요?”

“당연하지. 한번 죽을 뻔했더니, 못해본 게 막 떠오르면서 엄청 아쉽더라고.”

“그러니까…죽기 직전에 떠올린 사람이 저라는 거죠?”

“이게 그렇게 되나…?”

대충 그런 느낌으로 가볍게 잡담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문득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 스윽 주변을 둘러보자, 내 쪽을 보며 수군대는 학생들.

카를라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시선을 받아왔지만, 이번 건 조금 느낌이 다르다.

평소처럼 질투나 못마땅함이 담긴 시선이 아니라 감탄과 불신이 섞인 그런 느낌.

카를라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카를라야 카를라야. 어째 이쪽을 보는 눈들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실제로 주인님이 심상치 않은 일을 해냈으니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요?”

“나 쓰러진 채 아카데미에 실려 온 지 이제 3일…아니, 오늘로 4일째라며. 벌써 이렇게 소문이 퍼졌다고?”

“아카데미가 한번 뒤집힐 정도의 일이었잖아요. 심지어 내용도 믿기지 않는 일이구요. 저도 처음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이어진 카를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반응이 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야 H&A에서 질리도록 쓰러뜨린 에드메렉이라 별 감흥이 없다지만, 저들에게는 명백한 대사건일 테니까.

대주교급 사교도를 쓰러뜨린 나를 이전처럼 무시할 수는 없는 거겠지.

물론, 나 혼자 쓰러뜨린 것도 아니거니와, 에드메렉이 아닌 다른 대주교였으면 절대 못 이겼겠지만.

에드메렉 하나로 이런 반응이면, 앞으로든 어떻게 될지 조금 볼만하겠네.

혼자 키득대며 다음 목적지인 페이의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이는 친구가 없는 탓에, 식당 대신 공방에서 혼자 밥 먹는다는 설정이 있었거든.

아무리 내가 후원을 해주고 있다지만, 그 부분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

똑똑똑.

­후배님…? 일어났구나! 잠금 풀었으니 그냥 들어오면 돼!

공방 문을 두드리자 못 보던 장식에서 흘러나오는 페이의 목소리.

일종의 인터폰 같은 마도구인가. 원격으로 잠금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도 있는 것 같고.

아마 내가 저번에 후원해줬던 골드로 마련한 설비이리라.

하긴. 이제 보안에도 신경 쓸 때가 됐지. 지금까지는 돈이 없어 못 했지만, 이젠 아니잖은가.

흐뭇한 심정으로 문을 열자, 분명 아까까지 잠겨있던 두꺼운 강철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길을 내주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자 금세 페이의 공방이 우리를 맞이했다.

바닥에 빼곡히 널브러진 잡동사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그리고 수상한 형광빛으로 빛나는 물약들까지.

발 디디기도 힘들 정도로 정리가 안 된 모습과,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일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으니.

선반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재료들,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뀐 가마솥.

그 외에도 처음 보는 신기한 설비가 잔뜩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악취가 없었다.

냄새 제거 마도구를 어딘가에 설치해둔 거겠지.

이를 뒤늦게 깨달은 카를라가 참았던 숨을 들이키며,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후아…어질러진 건 그대로지만, 많이 달라졌네요!”

“그래야지. 내가 후원한 골드가 얼마인데.”

약간의 오해가 있던 탓에 한 달에 1000골드까지 말이 나오긴 했지만…그 오해가 풀린 뒤에는 다시 후원금을 조정했다.

그래도 월 500골드라 처음 제시했던 300골드보다는 훨씬 많은 금액이지만.

우리의 인기척을 느끼자 시험관 같은 것을 만지작대던 페이가 들고 있던 걸 조심스레 거치대에 고정시키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읏, 차. 얍.”

바닥에 깔린 잡동사니들 탓에 본인도 까치발을 들고 폴짝폴짝 뛰어왔지만.

그럴 때마다 출렁이는 묵직한 중량감. 펑퍼짐한 연구복 너머로도 선명히 알 수 있을 만큼 폭력적인 가슴이다.

카를라조차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정작 페이는 완전히 우리에 대한 경계를 풀었는지, 그저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와, 왔어? 잠시만 기다려 봐. 내가 후배님 주려고 몸에 좋은 거 만들어 놨거든. 어디 보자…분명 이쯤에 있을 텐데….”

쪼그려 앉아 바닥을 뒤적거리는 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랏빛 액체가 찰랑이는 포션병을 하나 발견하고 손을 뻗었으나.

“어? 어어…?”

워낙 거대한 가슴이 무릎과 상체 사이를 가로막아, 제대로 몸을 기울일 수 없었다.

거기에 페이는 짜리몽땅한 드워프 혼혈이 아닌가.

팔마저 짧으니 눈앞에 포션병을 두고도 파닥파닥 바동거리기만 할 뿐이더라.

세상에. 저게 가능한 일이야?

나도 카를라도 아연한 표정으로 페이를 내려다봤으나, 페이는 태연하게 자세를 바꿔 네발로 엎드려 포션병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려던 순간.

“아.”

나와 시선이 마주친 페이가 급격하게 쭈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보였는지 자각한 것처럼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포션을 건네는 페이.

“이, 이거…바로 마셔. 몸에 좋은 거야….”

“엇, 네. 근데 이게 뭐길래 몸에 좋은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으응? 그냥 몸에 좋은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페이가 더듬더듬 무어라 설명하긴 했으나,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워낙 설명을 못 하는 탓.

그래도 대충 눈치껏 알아들은 내용에 따르면, 이건 일종의 자양강장제인가 보다.

색깔이 보라색인 건 좀 찝찝하긴 하지만…설마 먹고 죽기야 하겠는가.

뚜껑을 따고 단번에 들이키자,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알림음.

띠링!

【아직 이름 없는 물약을 마셨습니다.】

【24시간 동안 회복력이 150% 상승합니다.】

【장복하면 건강해질 것 같습니다.】

“이게 뭔…?”

자양강장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버프 물약인데?

효과 자체는 약한 편이지만, 지속시간이 미쳤잖아.

“어, 어때…? 막 힘이 나고 그러진 않아?”

“네. 좀 기운이 나네요. 고마워요 선배님.”

“흐헤…후배님이 죽을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기껏 생긴 후원자가 이대로 사라지는 건가 싶었다구….”

“그래서 이렇게 낫자마자 안심시켜드리려고 왔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페이.

“일단 앉아서 쉬고 있어.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바로 갈게. 잠깐이면 되니까.”

“그러세요.”

카를라와 노닥거리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가 만지작대던 시험관을 들고 돌아왔다.

“선배? 그건….”

“이, 이거? 이건 말이지!”

내가 물어봐 준 게 기쁘다는 듯, 무언가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는 페이.

다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끊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여주는 게 더 낫겠지! 잘 봐봐.”

페이는 그리 말하고서 빵 한 덩이를 꺼냈다.

짙은 갈색의 거친 표면. 페이의 손에 전혀 눌리지 않는 것을 보아 딱딱한 흑빵, 그중에서도 밀의 함량이 극도로 적은 싸구려 빵인 것 같네.

“이걸 이렇게 하면….”

그 위로 시험관의 내용물을 뿌리는 페이. 분홍색 액체는 흘러내리지 않고, 모조리 흑빵에 흡수되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기나 벽돌 대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던 흑빵이 순식간에 눈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 것.

페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흑빵을 들이밀었다.

“짜잔! 딱딱한 흑빵이 이렇게 말랑말랑해져!”

이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어, 분홍색으로 변한 단면을 보여주기까지.

“우물우물…그리고 조금 전의 시약은 딸기 맛이라 잼을 바를 필요도 없어!”

“허어. 이건 확실히 대단하네요.”

“꿀꺽…그치?! 이거 재료도 싸서 많이 만들 수 있거든. 덕분에 딱딱한 빵을 물에 불려 먹지 않아도 돼!”

과할 정도로 뿌듯해하는 모습. 거기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고 슬쩍 물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뭐 드셨나요?”

“지금 먹고 있는데?”

“…제가 후원해드린 골드는요?”

“새 연금술 도구랑 사고 싶었던 재료 사느라 다 썼어! …잠깐. 표정이 왜 그래 후배님?”

“…….”

500골드나 후원해줬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면 누구나 정색하지 않을까?

물론, 이 흑빵 맛있게 먹는 물약을 제대로 팔아먹기 시작하면 엄청 돈이 될 것 같긴 한데…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리 와봐요 선배.”

“왜, 왜 그래 후배님…나 조오금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쓰읍! 빨리 와서 제가 준 500골드 어디에 썼는지 전부 말해보세요!”

“히이익! 재정 감사 안 한다며! 안 한다며!”

“오늘부터 할 거니까 도망치지 말고 순순히 이리 오세요!”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도망가려는 페이의 발목을 붙잡아 거꾸로 들어 올렸다.

하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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