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스노우 볼(4)
* * *
이오나가 카를라의 강아지 같은 모습에 놀란 건지, 마나 코어가 멀쩡한 부분에서 놀란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이해했어. 여차할 때 같이 싸워줄 호위가 있다면 엄청 든든하겠지.”
“그렇죠?”
장담컨데 카를라만 있었으면 훨씬 편하게 에드메렉을 쓰러뜨렸을 거다.
“그래도 너무 과한 건 안 된다? 예를 들어서 카를라가 한 일은 얀델 학생의 점수로 인정해달라던가 하는 거 말야.”
“걱정 마세요. 전 제 힘으로 점수 잘 받을 자신 있어요.”
“응응. 좋은 자세야! 그런 내용은 어지간하면 통과될 거야! 아니, 조금 거스름돈이 남으려나? 카를라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어?”
“네? 카를라만 있으면 충분한데요?”
“헉….”
어째서인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를 보며 이오나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따로 원하는 건 없는 것 같으니 남는 만큼 포인트로 환산해놓을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뭐어. 솔직히 말해 나도 얀델 학생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거든.”
이쪽을 바라보며 할짝 입맛을 다시는 이오나. 놀랍게도 저건 그냥 흐뭇해하는 거다.
뱀파이어는 기분 좋으면 입가를 할짝이는 습성이 있거든.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야릇해 보이지만.
이오나도 뒤늦게 이를 눈치챘는지, 아차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전달할게! 아침부터 찾아와서 미안! 앞으로 열흘은 휴강이니까 그동안 푹 쉬어!”
“엇. 네. 정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응응! 다음에 봐! …그리고 에드메렉 토벌 정말 수고했어!”
드륵. 탁.
짧은 한마디를 덧붙이고 그대로 치료실 바깥으로 나가는 이오나.
“…….”
묘한 정적이 흐르는 치료실.
있을 때는 조금 시끄럽다 생각했는데, 정작 없으니 너무 조용하네.
아직까지 헤실대는 카를라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아침이나 먹을까?”
기절해있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런지 엄청 배고프네.
***
카를라와 함께하던 식사를 마칠 때 쯤.
어느새 내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지, 아카데미 측에서 사람을 보내 사정 청취를 부탁해오더라.
그래서 게프 시 지하에 숨어있던 사교도들과 던전, 얼떨결에 죽인 피에트로로부터 시작된 혼탁한 합일의 달갑지 않은 집착에 관해 전부 말해주었다.
이미 조사한 게 있었는지 하나하나 캐묻는다기보다는 그냥 사실관계만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금방 끝났지만.
그 뒤에는 담당 치료 사제에게 이제 멀쩡해졌다는 걸 확인받고서, 집중 치료실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기숙사에 갈 수 있겠네요!”
“기껏해야 나흘만인데 호들갑은. 그리고 기숙사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
“넹? 어디요?”
“여자 기숙사.”
“…….”
왜지…어째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지금 무슨 생각해 카를라?”
“주인님께서 경비대에 잡혀가면 전 이제부터 어디서 자야 하나…그런 생각을 했죠.”
“침입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방문하는 거거든? 적어도 기절한 사이에 병문안 와준 사람들에게는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려야지.”
“아하. 그럼 제가 몰래 빠져나갈 때 쓰던 비밀 통로 같은 건 안 알려줘도 되겠네요!”
“뭐야 그거. 자세히 좀 알려줘 봐.”
대충 그런 느낌으로 카를라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1학년 A반 여자 기숙사.
생긴 건 남자 기숙사랑 똑같다. 아마 구조도 그렇겠지. 경비는 좀 더 삼엄하지만.
참고로 A반 인원이 워낙 적은 데다가 건물은 큰지라, 한 기숙사 안에 모든 학부가 모여있다.
덕분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고는 덜었네.
기숙사 앞에 작게 세워진 사감실에 들러, 엘리샤와 헬레나를 불러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으음. 엘리샤 학생은 이번 휴강 기간 동안 실반 마탑에 돌아가 있겠다고 하셔서 지금 안 계시네요. 헬레나 학생만이라도 불러드릴까요?”
“어쩔 수 없죠. 헬레나 사제님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예. 그럼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리 말하고는 책상에 가지런히 늘어선 마도구 중 하나를 조작하는 사감.
뭐어…위험한 일이 있었으니, 마탑에 얼굴 정도는 비춰서 무사함을 알려야겠지. 조금 타이밍이 안 맞았네.
나 같은 방문자를 위해 마련된 작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헬레나가 들어왔다.
태양 빛을 닮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자애로움을 형상화한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까지.
던전에서의 광전사 같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천생 성직자 같은 모습을 한 헬레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얀델 형제님! 일어나셨군요!”
“헬레나 사제님 덕분이죠. 쓰러진 제가 아카데미로 옮겨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치유 신성술을 걸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에이. 얀델 형제님이 비싼 포션을 나눠주신 덕에 제가 신성력을 온존할 수 있었잖습니까. 그걸 다시 얀델 형제님에게 쓴 건데 무어가 아깝겠습니까.”
“이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
한번 목숨 걸고 같이 싸워봤기 때문일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이후로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의 최선의 판단이었다던가, 포션과 스크롤을 대량으로 들고 다니는 준비성 등등.
헬레나는 온갖 것들을 예로 들며 나를 마구 띄워 주었다.
적당히 맞장구쳐주긴 했는데 솔직히 지금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거다.
이건 뭐, 거의 찬양이 아닌가.
“역시 정의로운 광명께서 가호하시고, 직접 성물을 내리신 분…!”
“아하하….”
아니, 실제로 찬양이 맞잖아?!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정의로운 광명이 총애하는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그런 나를 찾아낸 정의로운 광명은 얼마나 위대한지 같은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카를라를 알아보고도 나니까 다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하며 별말 않더라.
사교도라면 치를 떠는 정의로운 광명 교단, 그 안에서도 특히 심한 헬레나가 사교도 혐의로 가문이 몰락한 카를라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다니.
헬레나의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있는지 조금 물어보는 게 두려울 정도다.
그렇게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얼마나 받아주었을까. 드디어 제정신이 들었는지 헬레나가 돌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형제님. 제가 너무 흥분했지요?”
“그럴 수도 있죠. 잘못한 것도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헬레나 님.”
“감사합니다…아, 그래도 이건 말씀드려야겠네요. 이제 곧 본단에서 얀델 형제님을 정식으로 후원하고자 하는데…괜찮을까요?”
“예? 후원이요? 저를요?”
정 뭣하면 내 쪽에서 먼저 말 꺼내려고 했는데, 이게 이렇게 흘러가네?
하지만 내 놀란 반응이 헬레나에게는 안 좋은 의미로 비쳤던 걸까.
“거, 걱정 마세요! 후원이라고 해도 교단의 후원은 다른 곳의 후원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거든요! 꼭 형제님이 빛의 품에 귀의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저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사교도와 몬스터를 쳐 죽여주시기만 하면 충분해요!”
“진정하세요. 그냥 놀란 것뿐이니까요. 광명 교단에서 저를 그리 높이 평가해주니 감사합니다. 다만 제가 금전적으로 부족한 편은 아닌지라…혹시 괜찮다면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다른 부분이라 하심은…?”
“던전 정보 공유나, 사교도 토벌에 끼워주셨으면 합니다. 아, 물론 염치없이 무임 승차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 수준에 맞는 곳이면 됩니다. 없으면 어쩔 수 없고요.”
가만 놔두면 광명 교단은 온갖 곳을 들쑤신 끝에, 함정에 빠져 역으로 사교도들에게 당하고 만다.
운 좋으면 전멸이요, 재수 없으면 교단 전체가 타락하기까지 하니 내게는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이벤트.
이렇게 미리미리 광명 교단의 토벌에 꼽사리 끼며 영향력을 키워놔야, 여차할 때 이거 수상하다고 말릴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이게 정석 루트기도 하고.
다만 아까부터 멍하니 굳어있는 헬레나가 좀 신경 쓰인다.
“헬레나 님?”
“…….”
“헬레나 사제님?”
“예, 예에…듣고 있답니다. 그러니까…금전도 마다하고 간악한 악신의 개들을 찢어 죽일 기회를 달라고 하신 거죠?”
“네? 뭔가 표현이 과격하긴 하지만 그렇죠.”
“아아! 주여…!”
뜬금없이 잔뜩 감동한 표정으로 양손을 깍지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헬레나.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 내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보내며 말하기를.
“얀델 형제님. 이것이 예의가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만, 잠시 무례를 저질러도 괜찮을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하게 해주세요.”
“정의로운 광명님 믿고 천국 가실래요?”
“…….”
포교 뭐야.
“그으, 저는 아직 세속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꼭 저처럼 주께 귀의하여 모든 걸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죄송합니다.”
재차 거절하자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얀델 형제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죠. 그저 언제나 정의로운 광명께서는 품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앙루트는 효율적이긴 하지만, 교리에 따라 여러모로 제약이 생긴다.
설령 신성력을 받아 쓰는 사제가 아니더라도, 이는 마찬가지.
거기에 어느 교단에서건 정식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 신이 나를 지켜보게 된다.
무슨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애초에 선신이건 악신이건 사이좋게 봉인된 신세라 이런 식으로 세상을 둘러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여러모로 찔리는 점이 많지 않은가.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바깥세상인 지구에서 온 존재라는 것도 그렇고.
잘못하면 내가 토벌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다른 건 몰라도 절대 세례만큼은 받아선 안 된다.
하지만 너무 일언지하에 거절한 탓일까. 조금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차.
헬레나가 방긋 웃으며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럼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형제님은 금전적인 지원은 괜찮다 하셨지만, 그래서야 후원하는 저희 쪽도 마음이 편치 않답니다.”
“으음. 다른 거라….”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수녀복 좀 몇 벌 받을 수 있을까요?”
“…네?”
“3벌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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