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스노우 볼(3)
* * *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이오나가 있었다.
“안녕! 안녕! 어젯밤은 즐거웠어?”
“???”
교수님이 왜 저랑 같은 침대에 누워있어요?
검붉은 머리카락.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장난스런 목소리.
어딜 어떻게 봐도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은 이오나였다.
잠이 덜 깼나 싶어 한차례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떴지만.
“이건 또 뭔…?”
눈앞에 이오나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내 의아함 가득 담긴 목소리에도 이오나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익숙한 자세를 취했다.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몸은 앞으로 쭈욱 내미는…평소에 강의실에 입장할 때마다 취하던 그 자세.
난데없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큼직한 흉부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제는 못 들으면 허전한 그 대사가 귓가를 울렸다.
“이오나 등장!”
“아니, 여기서 등장하시면 안 되죠 교수님.”
내 정색 아닌 정색에도 이오나는 히히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엣헴! 엣헴! 난 착한 교수님이라 다친 학생을 병문안하러 온 거야!”
“병문안이 언제부터 같은 침대를 쓴다는 의미가 됐나요.”
그보다 분명 난 어제 카를라를 만지작대며 잠들었을 텐데…?
주변을 스윽 둘러보자, 바로 옆에서 시무룩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는 카를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확 밝아지는 표정.
“일어나셨나요 주인님? 목마르시지 않으세요? 물 떠다 드릴까요?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이것저것 물어오는 카를라.
어떻게든 나를 침대에서 일으키겠다는 집념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자리 뺏겼구나?”
“…네. 교수님이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잠시 일어나 보라고 하시더니 그대로 누우셨어요.”
카를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리 말했다.
졸지에 어떻게든 자기 학생 옆에 누워보려던 교수가 된 이오나는 펄쩍 뛰었지만.
“너무해 너무해! 카를라는 심술쟁이야! 나는 좋은 뜻에서 같이 누운 거란 말이야!”
“음흉한 뜻이 아니라요?”
“진짜라니까! 그리고 음흉한 건 내가 아니라 얀델 학생이겠지! 방금 내 가슴을 한번 훑어본 거 다 알 거든?”
“그야 뭐….”
뱀파이어의 특성상 오로지 이성을 홀리기 위해 만들어진 부위가 코앞까지 들이밀어지는데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그나저나. 이오나 교수님은 카를라를 되게 편하게 대하시네요. 다들 갑자기 노예가 돼서 돌아온 모습에 어색해하던데.”
“후후! 내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나요 얀델 학생!”
“372살이요.”
“…어? 으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이오나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했지만, 실은 H&A 카페에 누가 정리해놓은 캐릭터 프로필에서 봤다.
이오나는 수상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 캐릭터라, 공략 불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정보가 돌아다녔거든.
별 생각 없이 대답했건만, 조금 당황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오나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엣흠. 잘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 이 정도 나이를 먹다 보면 다른 사람의 흥망성쇠에도 조금 무뎌지는 법이야! 300년간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 자퇴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거든!”
어…대전쟁이 끝난 게 대략 300년 전. 그 직후에 세워진 게 아카데미니까 얼추 반올림하면 틀린 말은 아닌데….
새삼 이오나의 나이를 실감하게 돼서 몬가 몬가다.
설정상으로만 아는 나이와, 눈앞에서 느껴지는 연륜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오나가 카를라를 예전처럼 평범하게 대하리라는 것은 잘 알겠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묘한 표정으로 이오나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표정을 싹 바꾼 이오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무튼! 내가 얀델 학생 옆에 누운 이유는 따로 있어! 상처는 전부 회복한 걸 알고 있지만 기력이 쇠해있을 수도 있잖아? 그랬으면 내 정혈을 조금 나눠 주려고 했는데…그럴 필요까진 없겠네!”
“교수님의 정혈이요…?”
“응! 젊어서 그런지 회복이 빠른가 봐!”
뱀파이어의 정혈은 그들의 피를 정제해 만들어낸 특수한 결정이다.
이런저런 잡다한 기운을 전부 덜어내고, 순수한 생명력을 뭉쳐둔 것인데…사실상 준영약이라고 해도 좋은 물건.
그만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일정 수준 이상의 뱀파이어가 아니면 아예 만들지도 못한다.
아, 정혈을 먹었다고 해서 뱀파이어가 될 걱정은 없다.
새로운 뱀파이어를 만드는 데는 정혈 이외에도 필요한 게 이것저것 많으니까.
뭣보다 이오나는 자신의 권속을 늘릴 생각이 없고.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뱀파이어의 번식 방법 같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저한테 정혈을 줄 생각이셨다는 말씀이시죠?”
“응? 그렇지?”
잽싸게 고개를 푹 숙이고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앗! 머리가…배가…! 갑자기 몸이 아픈 게 뭔가 좋은 걸 하나 먹어야 할 것 같은데…구체적으로는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 시키는 거라던가…!”
“…으응?”
“으아아악! 부러졌던 뼈가…! 숨만 쉬어도 아프다아…이런 건 포션으로도 회복이 안 되는데…어디서 강하고 예쁘고 착한 교수님 같은 뱀파이어가 정혈 하나 주지 않을까나….”
힐끔거리며 어색한 연기를 이어 나가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새빨간 구슬 하나를 꺼내는 이오나.
“처음부터 필요하면 줄 생각이었으니 상관없긴 한데….”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오나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냉큼 결정화된 정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백화된 마력초로 영약 만드는 데 써먹어야지.
생명력과 마력을 잘 조화시키면 영약의 퀄리티가 높아지거든.
대신 삐끗하면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나오지만, 페이의 실력이라면 어련히 잘 조율해내겠지.
히히 웃으며 정혈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있자니, 그제야 이오나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조금! 조오금 그렇긴 한데! 아무튼 기운차 보이니 다행이야! 그럼 이제 두 번째 본론으로 넘어갈게! 얀델 학생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대충은요. 카를라에게 들은 게 있거든요. 다만 어디까지나 제가 기절한 뒤에 있던 대략적인 일 정도예요.”
“아하? 그럼 내가 좀 더 보충해줄게! 우선 얀델 학생이 기절한 사이에 아카데미가 한번 왈칵 뒤집혔어. 1학년 병아리들을 데리고 실습 갔더니, 사교도들에게 몰살당할 뻔한 거잖아?”
아카데미에 있던 다른 교수는 물론이고, 학생들의 가문에서도 난리가 났었다는 내용은 카를라에게 얼추 들었다.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얀델 학생을 탓하는 소리도 있었거든? 혼탁한 합일 교단의 공적이 있으니, 다른 학생들도 덩달아 습격을 당한 게 아니냐! 그 학생에게 죄를 물어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뭐, 자기 자식이 죽거나 죽을 뻔했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설마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공적이 된 것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주교 하나를 죽여서 그런 거라며? 사교도랑 싸우다 원수가 된 게 뭐가 문제야. 애초에 모든 사교도는 전부 원수나 다름없는데.”
순간 싸늘해진 목소리. 그 냉소적인 태도에서 사교도를 향한 이오나의 원망이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니까 좀 흠칫하게 되네.
그런 내 반응을 알아챈 걸까. 이오나가 배시시 웃으며 평소의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해주려고 했거든? 근데 정의로운 광명의 사제님들이 나보다 먼저 나서는 거 있지? 그렇게 얀델 학생을 쫒아내서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려 하다니, 사실 그쪽이 사교도인 거 아니냐면서 말이야!”
“허어….”
이 세상의 사제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
부정부패에 물드는 순간 신성력 회수는 기본이요, 심하면 저놈 개새끼야! 같은 신탁이 내려오기도 하니 당연한 일이겠지.
일종의 수렴진화라고 보면 된다.
나쁜 사제는 전부 죽었으니, 선한 사제만 남은 셈.
아무튼 그런 사제들이 너 이 자식 사교도 아냐? 같은 말을 한다는 건, 아무리 호전적인 정의로운 광명 교단이라도 흔치 않은 일이다.
왜 그러는지 이해는 가지만.
태양신의 가호를 상당한 수준으로 받고 있으면서, 그들의 성물로 사교도를 썰고 다녔다?
사교도에 치를 떠는 정의로운 광명 교단이 나를 싸고돌 만하지.
정의로운 광명 교단만큼은 아니어도, 사교도 혐오는 선신 교단의 패시브나 다름없으니 다른 곳에서도 실드 쳐줬을 테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오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어쨌든!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오히려 얀델 학생에게 상을 줘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뭐야?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1학년이 대주교급 사교도를 쓰러뜨린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거든!”
어느새 정치적인 목적도 강해졌다지만, 아카데미의 설립 목표는 결국 초대 용사 라힘이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짓는 것.
즉, 모든 던전을 클리어하고 사교도와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이다.
이제야 시스템 창에서 봤던 아카데미의 자랑이자, 선신 교단의 귀인이라는 소리가 이해되네.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간 거구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필요한 거 없어? 원한다면 포인트로 교환할 수도 있고!”
“오. 그건 좀 솔깃하네요.”
얼마나 교환해줄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학기 성적까지 결산하면 업적 상점에서 꽤 많은 걸 살 수 있으리라.
다만,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은 없다.
가장 비싼 녀석인 드래곤 하트 파편 정도면 모를까, 나머지는 무리하게 취하기보다 진작에 세워둔 성장 플랜대로 가는 게 더 나으리라.
여기선 역시 그거지.
“아카데미에서 제 편의를 좀 봐주셨으면 해요.”
“편의? 이미 A반 학생인데 여기서 더 필요한 게 있어?”
“별건 아니고…실습이건, 수업이건, 다른 뭐가 됐건. 제가 가는 곳에 항상 카를라를 동행시킬 수 있게 해주세요.”
“어려운 일은 아닌데…정말 괜찮겠어? 얀델 학생이 카를라를 아끼는 건 좋지만, 위험할 수도 있잖아.”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카를라?”
“네!”
이름을 불리자 쪼르르 달려오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에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왼손.”
“넹!”
“오른손.”
“여기요!”
“파이어 볼.”
“타올라라. 비산하라. 파이어 볼.”
화르륵.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전개되는 마법.
허공에 피어오른 화염구를 멍하니 바라보는 이오나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위험하니까 데려가야죠.”
참고로 위험한 건 내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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