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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68화 (68/230)

〈 68화 〉 스노우 볼

* * *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빵떡이 있었다.

아니, 빵떡 같은 가슴이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크기와 형태에 나도 모르게 툭 흘러나온 한마디.

“카…를라?”

“주인님…? 일어나셨나요?!”

말없이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카를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가.

너무 가까이서 들여다보느라 내 시점에서는 아랫가슴밖에 안 보였던 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돌연 카를라가 울먹이며 내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주인님…다행이다…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사제님들이 괜찮을 거라고 하셨지만 너무 걱정돼서…그래서….”

이마를 시작으로 눈썹, 코, 볼 등.

카를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어루만지는 감각.

묘하게 어린애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맞닿은 부분이 간지럽기도 해서 턱을 움츠리긴 했으나…차마 그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카를라의 표정이 너무 서글퍼 보였으니까.

“전 주인님 없으면 안 되는데…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

이제는 아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대기까지.

히끅히끅 소리죽여 우는 그 모습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멍하던 머릿속이 확 하고 개였다.

“이리 와.”

반사적으로 가느다란 팔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자, 별다른 저항 없이 침대 위로 올라오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를 내 옆에 눕히고는 뒤통수부터 등까지 천천히 쓸어 주었다.

“내가 방금 막 깨서 정신이 없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거 보니 전부 잘 해결된 거 같은데 왜 울고 그래.”

“…잘 해결되긴요. 주인님이 다쳤잖아요.”

“에이. 나 기절하기 전에 최상급 포션 몇 개 꺼내두고 기절했거든? 다른 애들이 치료해줬을 테니 여기 도착했을 때는 상처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그렇죠. 상처는 다 아물었죠. 상처는요. 하지만 포션은 만능이 아니에요 주인님. 이 정도로 심하게 다치시면 보통 후유증이 남는단 말이에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말한 카를라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수업 시간에 들은 적 있는 거다. 신성력을 통한 치유와, 포션을 사용한 치유의 차이점이었지.

분명 골절이 심한 경우 치료 이전에 어느 정도 뼈를 맞춰야 한다거나, 치료 이후에 환상통이 남을 수 있다던가 하는 내용이었는데….

“난 멀쩡한데?”

“그야 아카데미의 집중 치료실에서 3일 내내 최고의 치료를 받았으니까요.”

“…….”

여기가 집중 치료실이었구나. 어쩐지 천장이 낯설더라.

이어진 카를라의 말에 따르면 신성학부 교수님들이 번갈아 가며 신성력을 쏟아붓는다거나, 마법학부 교수님들이 온갖 정신 안정 마법을 걸어주고, 제작학부 교수님들이 비싼 물약을 먹이는 등.

거의 귀빈 취급에 준할 정도의 지극정성을 보였다나.

뭐어…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나는 무려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를 쓰러뜨린 1학년 아닌가.

물론 나 혼자 싸운 게 아니긴 한데, 그래도 내가 주동자 격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사교도와 몬스터의 척살을 위한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에서 나를 대충 치료할 리가 없지.

무엇보다 나는 이미 엘리샤에게 에드메렉의 목적이 나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게 아니더라도 에드메렉이 집요하게 나만 노리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봤을 테고.

이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멀쩡히 나를 치료해놔야 했겠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카를라로서는 덜컥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만한 치료를 해야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다쳤던 걸까. 하고.

품에 안긴 카를라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좀 무리해서 싸우느라 여기저기 많이 다치긴 했는데, 치명상이라고 할만한 건 없었어. 아카데미에서 조금 호들갑을 떨었나 보네.”

“호들갑이요? 저…주인님을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면서 원래 입던 옷이 어떤 꼴인지 전부 봤어요. 등짝은 완전히 뜯어져 나갔고, 다른 부분도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옆구리는 완전히 피에 절었던데요? 그래도 호들갑이라구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부 말해달라는 듯한 단호한 눈빛.

하지만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있어서 그런지 애처롭기만 하다.

조금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카를라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고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주인님이 제대로 알려주시기 전까지 엉엉 울 거예요.”

“지금도 울고 있는데?”

“막 소리 내서 대성통곡할 거에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입술을 삐죽 내민 카를라의 모습에 낄낄대며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쪽.

짧은 입맞춤. 하지만 제법 오래 가는 여운.

잔상처럼 남은 간지러움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걸까.

뾰로통하던 카를라의 입가는 어느새 흐물흐물 풀려있었다.

“으으…주인님은 비겁해요. 이러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잖아요….”

“괜찮아. 카를라 네가 안 궁금하다고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진짜 개쩔었거든. 어디 보자…일단 거기서 만난 파티원들부터가 특이했는데….”

.

.

.

.

.

“뭐, 대충 그렇게 된 거야. 한때는 단단히 좆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찌어찌 잘 해결됐네 이 정도면.”

“네? 주인님 좆이 단단해졌다고요? 아직 말랑한데…아, 딱딱해졌다.”

“쓰읍! 여기 집중 치료실이라며. 여기서 하면 다 들킬 테니까 자꾸 유혹하지 마.”

“넹.”

내가 중상을 입긴 했어도 치명상까지 가진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카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편해진 목소리네. 적어도 조금 전 같은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슬슬 괜찮겠지.

카를라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내 쪽에서 물어볼 차례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던전은? 에드메렉은 어떻게 됐고?”

“아. 주인님은 지금 막 일어나셨었죠.”

내 의문에 고개를 끄덕인 카를라가 하나둘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에드메렉의 본체를 쓰러뜨리자, 분신체도 일제히 쓰러졌다고 한다.

그게 분신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다만 특이한 것은 던전 안의 일반 몬스터까지 죄다 사라져버린 것…즉, 실습 던전이 클리어된 점이려나.

아마 에드메렉 녀석이 보스를 삼켜서 자기 분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보스의 역할도 이어받은 게 아닐까?

한창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부상자를 치료하던 학생들은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걸 깨닫자마자 잽싸게 빠져나왔다고 한다.

한시도 그 지긋지긋한 던전에 있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클리어 보상은 최고 공로자인 내게 주어졌다는데, 하얀 빛 덩어리가 내 몸에 흡수되는 것밖에 보이지 않아 정확히 어떤 보상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이거는 나중에 상태창 한번 열어보면 되겠지.

사실 지금도 시야의 구석에서 깜빡거리며 자기를 확인해달라는 알림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어쨌든 그렇게 간신히 탈출한 학생들 앞에 나타난 것은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교수님들이 아니라, 난장판이 된 기지였던 것이라고 한다.

교수진은 교수진대로 습격받았기 때문.

그나마 다행인 건 학생들이 빠져나왔을 무렵에는 전투가 일단락되는 중이었다는 정도?

내 예상대로네. 이쪽에 신경 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뒤에는 뭐…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깨달은 놈들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오나는 이를 갈면서도 추적하는 대신 아카데미로 이어지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열었다.

던전 실습은 그걸로 끝.

나를 비롯한 부상자들은 곧장 치료시설로 옮겨졌고, 그렇게 지금에 다다른 것이라 한다.

“헤에…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오나 교수님이 있는데 그렇게 시간을 끌며 싸웠다고? 대체 어떤 놈들이 왔길래?”

“그건 저도 잘….”

하기야. 노예이자 시종 신분인 지금의 카를라가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소문 정도겠지.

어쨌든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정 뭣하면 나중에 이오나에게 물어보면 될 테고.

“아, 그리고 A반은 2주일 정도 임시 휴강이라고 했어요 주인님.”

“뭐? 그렇게 길게?”

“네. 이번에 죽은 학생도 꽤 있고, 주인님만큼은 아니어도 다친 학생이 제법 많았거든요. 거기에 학생들의 가문에서 보내는 항의 문제도 있고요.”

“그건…어쩔 수 없네. 응.”

학교 보내놨더니 애가 죽거나 죽을 뻔했다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입학시험 습격 사건을 막았더니, 더 큰 전면전이 돼서 돌아올 줄이야.

나비효과라고 해야 하나? 이거 정말 상상도 못 한 스노우 볼이었다.

그래도 나와 엘리샤가 발 빠르게 대처한 덕에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포션을 풀어 부상자를 전부 치료한 것도 있고.

그나저나 입학시험 습격 사건을 막았을 뿐인데 이번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의 피해와 사교도 중에서도 유독 성가신 에드메렉을 잡은 일.

어느 쪽이건 가벼운 사건이 아니기에 H&A의 시나리오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들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뭐…이번 일로 내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능력이 없다는 건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그냥 최대한 이런저런 경우를 경계하며 최선을 다해 강해지는 수밖에.

속으로 내린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아까부터 조용하던 카를라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이 어두운 것을 보아 꽤 늦은 시간이겠지.

카를라가 조금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팔베개를 해주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한숨 더 자는 것도 괜찮겠지만…그 전에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상태창.’

대체 뭔데 이렇게 아까부터 깜빡거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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