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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67화 (67/230)

〈 67화 〉 이변(9)

* * *

“후우….”

깊숙히 숨을 내쉬며, 떨리는 팔다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지금 나는 어느 유명 소설의 도입부처럼 단단히 좆된 상태다.

H&A의 공략 지식과 넘쳐나는 골드로 안전하게 헤쳐나왔던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

어차피 안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잖은가.

적어도 상대가 거는 만큼은 나 또한 내걸어야겠지.

도망치며 시간을 끌려던 계획은 내다 버렸다.

내가 에드메렉을 쓰러뜨린다.

그리 다짐하며 단검과 스태프를 양손에 단단히 말아 쥐었다.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녀석의 모가지에 마법과 단검을 박아넣을 수 있도록.

.

.

.

.

.

파차앙­!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지는 물의 장벽. 그 파쇄음을 신호 삼아 땅을 박찼다.

옆이 아닌 앞으로.

“회복했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다시 한번 씹어먹으면 그만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에드메렉의 허공 포식. 쩍 벌어진 반투명한 턱과 뾰족뾰족한 이빨.

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해뒀던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실드!”

본래 실드는 전방위를 감싸는 투명한 보호막이다. 유사시에 자동으로 내 몸을 보호해야 하니 당연한 일.

하지만 결국 마법은 상상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시스템 보정 덕에 자연스레 표준 값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내게도 적용되는 당연한 이치.

강렬한 이미지에 이끌린 실드가 그 모습을 달리한다.

H자를 옆으로 돌려놓은 것 같은 형태.

오로지 저 반투명한 짐승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역장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으드득.

실드가 으스러지며 들려오는 심상찮은 소리. 그래도 이전처럼 단번에 부서지진 않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력을 듬뿍 담아 기초마법 하나를 발현했다.

“테라!”

발치에 솟아오른 큼직한 흙무더기. 이를 발판 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그렇게 허공 포식의 범위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음 마법의 영창을 외우며 다시 에드메렉에게 달려들었다.

어째서인지 이에 격분한 에드메렉이 실핏줄이 선 눈으로 외쳤다.

“기사조차 그분의 입에서 벗어날 수 없거늘! 마법사 주제에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포식.

아직 등 뒤에 턱이 멀쩡히 남아있음에도, 새로운 이빨들이 양옆에서 나를 덮쳐온다.

실드로는 둘 중 하나밖에 막지 못하고, 발판을 만들어봤자 점프하는 속도가 달리는 속도보다 빠를 수 없으니 공중에서 잡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내가 영창하던 주문은 어느 쪽도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라! 포스 그랩!”

염력 계열 마법 중 하나인 포스 그랩.

보통은 적을 끌어오거나 구속하는 데 쓰는 마법이지만…지금은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우득.

“커헉!”

전신의 뼈마디는 섬뜩한 소리를 냈으며,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멀리 떨어진 앞쪽에서 구현된 투명한 손이 우악스레 내 몸을 잡아당겼기 때문.

숨이 턱 막혀왔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허공에 붕 뜬 몸뚱이가 빠르게 가속하며 에드메렉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뭣…?”

깔짝대며 도망 다니던 이전과는 명백히 달라진, 저돌적이라 해도 좋은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는 내게 당황한 에드메렉.

아직 놀라긴 이른데.

포스 그랩의 충격 속에서도 꿋꿋이 영창한 다음 마법이 남아있었으니까.

“작열하는 불길. 날카로운 화살. 너는 내 적을 꿰뚫는 섬광이어라.”

화륵.

길쭉한 꼬챙이 같은 불화살 3개가 내 머리 위에 떠오른다.

“파이어 애로우!”

시동어와 함께 빠르게 쏘아진 불화살.

화염계열 치고는 다소 위력이 약하지만, 대신 동시에 3개나 날릴 수 있는데다가 투사 속도가 빠르다.

거기에 불길이 몸에 들러붙어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는 특성까지.

쉽게 말해 맞으면 귀찮은데, 피하기도 힘든 마법.

보통은 막아내야 하지만…연쇄포식을 방금 막 사용한 에드메렉에겐 뚜렷한 방어 수단이 없다.

그럴줄 알았다.

“혼탁한 합일이시여! 제 몸을 바치나이다! 그 대가로 당신의 숨결을 내려주소서!”

팍!

짧은 기도와 함께 터져나가는 에드메렉의 한쪽 눈.

자기희생 주문인가.

그래. 악신의 사제도 일단 사제는 맞다는 거겠지.

이 또한 H&A에서는 나오지 않는 패턴이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거에 놀라기도 뭐하다.

대주교쯤 되는 자가 신체 일부를 대가로 일으킨 기적. 효과는 생각보다 심플했다.

돌연 허공에 떠오른 작은 구멍. 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인력이 발생했다.

후웅­

그리고는 에드메렉 본인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여 집어삼킨다.

마치 작은 블랙홀 같은 광경.

내가 던진 파이어 애로우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에드메렉을 향해 날아가던 불화살의 궤적이 급격하게 꺾이더니, 아예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마 한동안 내가 사용할 다른 마법도 전부 빨려 들어가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녀석이 한쪽 눈을 버렸다면, 나 또한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임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멀리서도 느껴지는 인력에 버티는 대신, 되려 몸을 맡기고 몸을 던졌다.

내 힘만으로 달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

혼탁한 합일의 힘을 내가 역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에드메렉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권능을 발현했다.

“감히…!”

이번에는 아예 빠져나갈 길을 주지 않겠다는 듯, 전방과 양옆에서 동시에 덮쳐드는 반투명한 아가리.

옆구리가 꿰뚫릴 때의 고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우려 든다.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이를 떨쳐내고는 타이밍에 맞춰 한 번 더 포스 그랩을 시전했다.

우드득.

“끄윽….”

상황이 급박한지라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하게 발현한 탓일까.

몸을 붙잡기만 했을 뿐인데, 갈비뼈 중 몇 개가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허나 강행한다.

후웅.

공중으로 내팽개치다시피 한 몸뚱이. 그 반동에 전신의 뼈가 삐걱이며 비명을 질러댔고.

아까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갈비뼈에서는 뇌를 콕콕 찌르는듯한 고통이 올라온다.

아마도 부러진 거겠지.

“쿨럭.”

절로 흘러나오는 토혈.

아프다. 살면서 이만한 수준의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던가.

거기에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악신의 숨결과, 시뻘건 눈으로 다음 권능의 발현을 준비하는 에드메렉이 남아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칼날 위에서 까치발을 서고 있는 듯한 섬짓한 감각.

하지만 실수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스템 보정 덕이라고 하나, 육체와 마력의 제어에는 자신이 있다.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의 높이에서 에드메렉과 시선이 마주쳤다.

짜증과 귀찮음. 그리고 약간의 지긋지긋함이 묻어나오는 표정.

아무리 자기 신의 명령으로 싸우고 있다지만, 다 잡은 놈을 2번이나 놓치면 열받기 마련이겠지.

그래서 히죽 웃어주며 들고 있던 스태프를 집어 던졌다.

공중에 떠 있는 채로 포션을 마시려면 한쪽 손을 비워야만 하니까. 스태프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기도 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보조 주문 하나 걸지 않은 스태프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를 알고 있으니 에드메렉은 별다른 조치 없이 그저 입처럼 벌린 손을 내게 뻗었지만.

툭.

머리에 맞으면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스태프를 쥐고 있던 손으로 회복 포션을 꺼내 마시며 히죽이자, 에드메렉이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이제 그만 그분의 한끼 식사가 되어라!”

일대를 뒤덮는 날카로운 이빨들.

허공 포식 여럿을 연속적으로 혹은 동시에 사용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하나의 크기를 미친 듯이 키운듯한 느낌.

기껏 도발까지 했건만 소용없는 짓이었나.

대주교 자리를 날로 먹은 게 아닌지, 녀석은 내가 상정한 경우 중 최악의 경우를 강요해오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포션을 마시느라 다음 마법을 준비하지 못한데다가, 공중이라 뛰어서 피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마력 폭발.

마법이 채 되지 못한 마력을 폭주시켜 터뜨리기에 그 어떤 마법보다도 빠르지만.

마법이 아니기에 시전자 보호 기능 따윈 없고, 연비도 개나 준 비상시를 위한 기예.

딱 지금을 위한 것이 아닌가.

퍼엉!

“흡!”

등 뒤에서 일어나는 거센 폭발이 내 몸을 떠민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시야. 터져나간 등짝의 고통. 허나 방향은 제대로 맞췄다.

으적. 쿵!

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묵직한 저작음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빠르게 에드메렉을 향해 쏘아지는 몸뚱이.

“이…! 그런다고 해서 그분의 기적을 뚫을 수 있을 것 같나!”

분명 에드메렉을 향해 날아가던 몸뚱이가 조금씩 허공의 구멍을 향해 끌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니 계속해서 마력을 폭발시켰다.

퍼엉! 펑! 펑!

마력 폭발의 반동으로 날아가는 궤도를 수정한다.

그럴때마다 등뿐만 아니라 어깨나 다리 등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졌지만…입에 남겨둔 포션을 삼키며 조금씩 회복해갔다.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핑퐁이라도 하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

혼탁한 합일이 불러낸 구멍을 지나쳤을 무렵. 내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접근만 하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더냐? 그런 몸으로? 오냐! 이대로 끝장내주마!”

운석처럼 자신의 머리 위로 추락하는 나를 보며 앙상한 손에 검붉은 기운을 머금는 에드메렉.

별다른 기술이랄 것도 없다. 그저 혼탁한 합일의 신성력을 예리하게 빚어 칼처럼 둘렀을 뿐.

이미 중상을 입은 내겐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공격이긴 하겠지만….

본체가 워낙 비실비실한 녀석이다 보니, 휘둘러지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과도한 통증 탓에 흐릿해진 정신을 강제로 부여잡고 녀석의 수도가 그리는 궤적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속도와 몸무게를 고스란히 담아 지금껏 꼭 쥐고있던 빛나는 사자 단검을 그 위에 겹쳤다.

“아아아아아아!!”

악을 지르며 쏘아낸 일격과 에드메렉의 손이 맞부딪힌다. 그리고.

콰아아앙!

백색 섬광이 눈부시게 번쩍이며, 에드메렉의 손이 절반으로 잘려나갔다.

조금 전까지 위협적으로 번들거리던 혼탁한 합일의 신성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뭣…?”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에드메렉.

그래. 내가 처음부터 노렸던 게 바로 이거다.

애초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나, 아직 어쭙잖은 내 마법으로는 뭘 어떻게 해도 에드메렉에게 유효타를 꽂아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초중반 한정 죽창이라 불리는 빛나는 사자 단검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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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사자 단검】

폼멜에 울부짖는 사자 조각이 새겨진 순백의 단검.

금속이라기보다 뼈에 가까운 질감의 검신은 때때로 따스한 빛을 내뿜는다.

성스러운 광휘를 두른 단검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광휘는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리라.

­공격 시 10% 확률로 광 속성 추가 데미지 부여.

­치명타 데미지 30% 증가.

­사교도를 상대할 경우 추가타 확률과 치명타 확률이 100%로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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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치명타가 높은 단검이, 악신 계열의 약점이라는 광 속성 추가 데미지까지 뻥튀기시킨다.

여기에 태양신의 가호 효과로 광속성 데미지에 한해 한층 더 강해지기까지 했고.

제대로 근접전을 파고든 놈이라면 모를까, 권능에 특화된 에드메렉은 이를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다급하게 반대쪽 손으로 내 옆구리를 노리는 에드메렉에게 마력 폭발을 먹여주었다.

콰앙!

“크아악!”

안 그래도 나뭇가지 같던 팔이 뚝 하고 부러지며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녀석.

워낙 지근거리에서 터진 폭발인지라, 내 옆구리 살점도 한 움큼 뜯겨나간다.

처음 에드메렉의 허공 포식에 당했을 때와 비슷한 상처.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와 정 반대였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건지, 다시금 기도를 올리려는 에드메렉.

“혼탁한 합일이시…”

녀석의 입을 한쪽 손으로 틀어막고 외쳤다.

“틴더!”

화륵.

“끄으읍!”

동물이나 몬스터는 잘 먹으면서 이건 좀 별로였는지, 고통스런 신음을 내지르는 녀석.

그래도 한 번으로 끝나면 섭하지.

“틴더. 틴더. 틴더. 틴더.”

끊임없이 녀석의 얼굴을 불꽃으로 지지며, 다시금 단검을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검신을 본 녀석의 눈빛이 원통함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푸욱.

그대로 에드메렉의 가슴팍에 빛나는 사자 단검을 쑤셔 넣었다.

잠깐의 번쩍임. 그리고 축 늘어지는 몸뚱이.

하나 남은 에드메렉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핫.”

몸은 뒤지게 아프고, 정신은 몽롱하다.

그래도 내가 이겼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이를 자각하자마자 핑 도는 시야.

뒤늦게 울리는 시끄러운 알림음과 눈앞을 어지럽히는 시스템 창으로도 이 어지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기야. 이 지랄을 했는데 멀쩡하길 바라는 건 사치겠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인벤토리에서 포션 몇 개를 꺼냈다.

땡그랑.

마실 힘도 없긴 한데, 누군가 알아서 치료해주겠지 뭐.

이제는 완전히 감긴 눈동자.

…다음부터는 어딜 가면 꼭 카를라 데리고 간다 진짜.

정신을 잃기 전.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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