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이변(6)
* * *
자이언트 이블 래빗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분신체의 습격으로 죽거나 중상을 입은 학생이 좀 있다지만….
그래도 혼자서 실습 던전을 쓸어버릴 수 있는 A반 학생이 20명 가까이 모인 것이다.
심지어 내 포션과 스크롤. 경우에 따라서는 마도구까지 빌리고 있으니 평소 이상의 역량을 뽐내고 있었고.
컨디션도 좋은데 우르르 몰려다니기까지 하는 상태다. 당연히 기세등등해질 수밖에.
다만 목적지인 거대한 토끼굴 앞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육편과 핏자국. 거대한 맹수가 먹다 버린 것처럼 뜯겨진 시체들.
본래 이 자리에서 보스가 나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누군가 보스를 죽이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처참히 죽어있었다.
“우욱….”
안 그래도 비위가 약한 빈센트가 눈앞의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들도 충격받았는지, 구토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전까지의 자신만만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야 상대가 악신의 대주교라는 걸 실감한 걸까.
까딱 잘못하면 우리 모두 저 시체들처럼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괜찮다.
플레이 타임 7,000시간.
게임이 인생이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고인물 소리 듣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다.
지금 시점에서 싸워본 적은 없지만…에드메렉 자체는 몇 번이고 잡아봤다.
당연히 패턴 또한 줄줄이 꿰고 있고.
이리저리 각을 재본 결과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노라고.
괜히 빈센트의 등을 두드려주고서 한발 앞으로 나섰다.
“더 토해낼 것도 없잖아. 가자.”
“그윽…그래. 가야지.”
입가를 스윽 닦고는 검을 뽑아든 빈센트. 헬레나와 엘리샤 또한 말없이 내 곁에 함께 섰다.
사실상 여기까지 다른 이들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가 앞장서자, 나머지 학생들도 하나둘 각오를 다지며 뒤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굴속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토굴의 길이는 생각보다 길었다. 당연히 어느 순간부터 더는 햇빛이 닿지 않았고.
“너무 어둡네.”
“라이트 마법을 쓸까요?”
“괜찮습니다 글렌시엘님. 괜히 집중력 분산시킬 필요 없어요.”
인벤토리에서 꺼낸 라이트 스크롤을 다섯 장 정도 차례로 찢었다.
화아악.
작은 빛 무리가 연달아 나타다너니 우리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광원도 해결됐으니, 거리낄 것 없이 더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주기적으로 염력을 이용한 유사 탐지도 잊지 않았고.
하지만 이러한 경계는 별 의미가 없었다.
쭉 이어진 길을 따라 큼직한 공동에 다다를 때까지 함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대신.
“끼에에엑.”
“샤아아악.”
“끄르르륽.”
공동 안이 무수히 많은 분신체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부터 회수한 분신체를 전부 여기로 데려온 건가. 예상대로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분신체들은 이쪽을 노려보며 목을 울렸을 뿐,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혼종들의 으르렁거림 사이에서 명확한 인간의 말이 들려왔다.
“우욱…! 배가 고프군. 아무리 먹어도 전부 토해내니 당연한 일이겠…구웨엑!”
구역질 소리가 섞인 목소리.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로브를 두른 사내가 하나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까지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겨누었으나,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거 아는가? 혼탁한 합일께서는…구윽…배불리 먹고 싶다는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웨에에엑.”
철퍽.
녀석의 입에서 토해지는 회색 덩어리.
분명 평범한 크기의 입에서 토해낸 것이건만, 기이하게도 토사물은 사내의 체격보다도 거대했다.
회색 덩어리는 잠시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 거인의 형상을 취했다.
물론 평범한 거인은 아니었다.
녀석의 어깨 위에는 머리 대신 꿈틀거리는 촉수 다발이 가득했으니까.
아마 이곳의 보스인 자이언트 이블 래빗을 자신의 분신체로 만든 것이겠지.
이블 래빗이 혼탁한 합일 계열 몬스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숨줄을 붙여두면서 분신으로 재탄생시키는 게 가능할 줄이야.
자신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토해내는 것이나, 그렇게 토해낸 덩어리가 순식간에 괴인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나.
어느 쪽이건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저건 권능이다. 악신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신좌의 일석을 차지한 혼탁한 합일의 권능.
역시 저 녀석이 에드메렉인가.
보스전 시작과 동시에 보여주는 컷신과 비슷한 광경이라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권능의 발현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다른 학생들은 아연해하며 주춤대기 시작했으나.
정작 에드메렉은 다른 이들의 감상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오직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지. 먹을 수 없던 것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군. 그분께는 실로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걸 전부 토해내는데도?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배고프다고.”
“아아…착각하고 있구나. 그분께서는 내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셨다. 내가 매일 그날 먹은 걸 전부 토하는 건 오로지 내 의지로 그분의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내 분신이 너희를 죽인 건 내가 그분께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말한 에드메렉은 깊게 눌러쓴 후드를 뒤로 넘겨,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친 갈색 머리카락.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메말랐다.
거기에 피골이 상접해 광대뼈가 도드라지기까지.
탐식을 상징하는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가 아사 직전의 몰골을 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깎다 만 것 같은 수염에 묻은 토사물을 대충 소매로 닦아낸 에드메렉이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허나, 최근 그분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 있었다.”
“뭔지 알 것 같은데 그거.”
“그래. 어느 고얀 놈이 그분의 원대한 계획을, 운명을 뒤틀었다고 하더군.”
“사교도가 보여서 죽였다.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흔한 일이잖아. 기껏해야 주교급 하나 죽은 걸로 운명은 개뿔. 애초에 순리를 뒤트는 건 네놈들이 하는 일 아냐?”
내 빈정거림에 에드메렉이 히죽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애송아. 잘 들어라.”
구에에엑.
이번에는 평범한 이블 래빗으로 만든 분신체를 토해낸 에드메렉이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 순리다. 그분의 계획이 운명이다.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네놈들이란 말이다.”
자신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조.
슬금슬금 자세를 잡는 분신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토해내는 에드메렉이 비쩍 마른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너희도 잘 알고 있는 진리가 하나 있지.”
육식 동물처럼 예리하게 날이 선 손톱이 허공에서 반짝였다.
“약육강식의 섭리가 바로 그러하다.”
에드메렉이 침을 뚝뚝 흘리며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순명??하라.”
꽉 쥐어지는 녀석의 주먹.
잘 알고 있는 패턴의 준비 동작이었기에 즉시 바닥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생겨난 반투명한 턱이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강하게 깨물었다.
파앙!
분명 피했을 텐데 여기까지 전해지는 오싹함.
공간 자체를 씹어 삼키는 공격이다. 만약 제때 눈치채지 못했다면, 죽지는 않겠으나 실드고 뭐고 죄다 부서졌으리라.
“끄르르아!”
“까아아악!”
“궤에에엑!”
조금 전의 공격을 신호 삼아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분신체.
그리고 놈들 사이에서 아직도 토해낼 게 남았는지 헛구역질 중인 에드메렉.
그런 에드메렉과 마찬가지로 토악질을 하던 빈센트가 아직 일어서지 못한 내 몸을 뒤로 잡아당겼다.
동시에 여느 때보다 강렬한 신성력을 두른 헬레나가 분신체를 향해 마주 달려들더니.
“듣고 있자니 귀가 썩어버릴 것 같네요! 감히 삿된 광인 주제에 순리를 입에 담는 겁니까!”
가장 먼저 달려오던 분신체의 길쭉한 코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으직!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녀석.
그렇게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녀석이 뒤따라오던 분신과 뒤섞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솟구치는 신성력의 물결.
공격용은 아니다. 그저 거대한 방벽을 세웠을 뿐이지.
당연히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잠깐이면 충분하다.
후우웅…퍼엉!
머리 위로 넘어 날아가는 각양각색의 마법들.
내가 잠깐 시간을 버는 사이에 영창을 끝마친 마법사들이 나선 것이다.
순식간에 쓸려나간 전열의 분신체.
뒤이어 다시금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 기사학부 학생들이 헬레나와 함께 정면에서 분신체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뭣…?”
우리가 이렇게 잘 싸울 건 예상치 못했는지 에드메렉의 표정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런 에드메렉을 보며 얄밉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많이 허접하네. 아 혹시 그 신이 병신이라 그런가.”
“건방진 놈…!”
좋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언제나 에드메렉은 허공 포식과 동시에 분신체를 돌진시키는 걸로 선빵을 쳤거든.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으면 당연히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쿵. 쿵. 쿵.
이블 래빗으로 만든 거대한 분신체.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에드메렉.
이 둘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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