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이변(5)
* * *
H&A는 RPG게임이다.
내가 H&A를 오래 플레이하긴 했지만, RPG라는 장르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플레이해봤다.
그리고 RPG 장르의 코어 유저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몇 가지 있는데.
예를 들자면 시작 위치에서 반드시 뒤를 돌아 뭐가 없나 확인해야 하는 강박증이나.
말 걸 수 있는 모든 NPC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강박증.
그리고 최종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든 서브 퀘스트를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증 등이 있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어째 RPG유저들이 강박증 환자 같아 보이네.
아무튼 이러한 RPG유저들의 고질적인 강박 중 하나가 바로 포션 쟁여두기다.
이는 성능 좋은 포션일수록 아끼다가, 너무 아낀 탓에 최종전에서도 안 쓰게 되어버리는 기괴한 강박과도 연관이 있다.
플레이 후반부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골드. 하지만 상점제 아이템은 졸업한 지 오래다.
결국 더 좋은 장비를 얻기 위해서는 노가다나 고난이도 퀘스트를 달성해야 하는데.
그정도 진행 시점이면 노가다건 고난이도 퀘스트건 어쨌든 전투를 해야 하니 포션은 필수다.
하지만 좋은 포션은 아껴야 하므로, 결국 상점에서 살 수 있는 포션을 대량으로 구매하게 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어차피 골드는 넘쳐나니까.
그렇게 한번 상점에 들를 때마다 포션을 대량 구매하고,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며 종류별로도 구매해보는 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순간부터인가 고난이도 퀘스트를 준비하는 게 아니더라도, 온갖 소모품을 한계치까지 쟁여두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H&A의 인벤토리는 같은 종류라면 100개까지 겹쳐서 저장할 수 있기에 대량으로 쟁여두기도 편하고.
뭐어…RPG를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공감 받지 못하는 내용인 것 같지만.
“다, 당신 대체 포션을 얼마나 사둔 거예요?! 심지어 전부 상급 이상이잖아요!”
“제가 좀 상비약을 중요하게 여기는 타입이라서요.”
“이건 상비약 수준이 아니잖아! 보급물자지!”
발치에 쌓인 포션 더미를 보며 평소의 경칭조차 잊은 채, 소리를 빼액 지르는 엘리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나머지 포션을 떨어뜨렸다.
“방금 건 회복 포션이고요.”
와르르.
“요건 활력 포션.”
와르르.
“마나 포션도 있어요.”
와르르.
“아, 그리고 혹시 몰라 준비해둔 해독 포션이랑 마비 해제 포션이에요. 독을 쓰는 녀석도 있더라고요.”
처음 만난 뱀이나, 마지막에 만난 오리인지 너구리인지 모를 인자를 가진 녀석이 그러했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분신체의 모습을 떠올리던 것도 잠시.
형형색색의 포션병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본 엘리샤가 어버버 거리며 내 어깨를 퍽퍽 때려대기 시작했다.
“어, 어디서 이만한 포션을…? 아니, 애초에 이만한 양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다른 걸 집어넣을 여유가 없잖아요!”
“음…그게 말이죠. 원래는 비밀인데….”
엘리샤의 길쭉한 귀에 대고 사실 이건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라, 던전을 공략하며 얻은 신들의 권능이라는 내용을 속삭였다.
일전에 카를라에게 했던 거짓말과 같은 내용.
이에 엘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은총이라면 그럴 수 있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겁니다. 마침 널널한 아공간이 생겼으니, 이걸 놀리기도 뭐해 포션 같은 걸 많이 챙겨다니는 편이고요.”
“…이걸 많이 라는 말로 퉁치기엔 좀 과한 것 같지만, 어쨌든 덕분에 살았네요.”
엘리샤도 내심 부상자들이 신경 쓰였는지, 자신이 데려온 이들을 힐끔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진지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얀델 당신이 노예가 된 카를라를 소유하고 있는 시점에서 평범한 평민이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답니다.”
“제가 좀 돈이 많긴 해요.”
어깨를 으쓱이며 한차례 능청을 떨자 그런 건 집어치우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엘리샤.
“포션의 양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돌리시는 건가요? 뭐, 괜찮겠죠. 제가 묻고 싶은 건 단 하나뿐이니까요.”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겁니까?”
“얀델. 당신은 이번 습격은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가 일으킨 일이라고 했죠?”
“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죽일 겁니다.”
“대주교라면서요?”
“그러니 더더욱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획은 있는 거죠?”
내 단호한 대답에 되려 당황한 엘리샤. 그런 그녀에게 히죽 웃어주었다.
“당연히 있죠.”
“좋아요.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죠. 타당한 이야기라면 저 또한 전력으로 당신을 돕지요.”
“글렌시엘 님이 도와주시면 저야 좋죠. 아, 그래도 잠시만요. 아직 꺼낼 게 더 있거든요.”
“네? 여기서 더 꺼낼 포션이 있나요?”
후두둑.
“아.”
포션 더미 위로 떨어진 스크롤 뭉치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
“혹시…이것도 종류별로 있는….”
후두둑. 후두둑.
“…….”
***
엘리샤의 일행을 치료해주며 그동안 알아낸 것들을 서로 공유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나를 보물 고블린처럼 바라보던 엘리샤의 눈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왜 얀델 당신이 도망칠 생각이 아니라 싸울 생각부터 했는지 알겠네요. 당신이 광명교도라 그런 줄 알았는데…그냥 이쪽이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군요.”
“…설마 저번에 말했던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후원을 받을 생각이라는 그거 때문인가요.”
“다른 이유도 있나요? 흥! 그래도 잘 됐네요.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어느 교단이건 당신에게 기꺼이 후원하려 들 테니까요.”
일전의 후원 제안을 거절 당한 게 아직 신경 쓰이는지 조금 뾰족한 엘리샤의 말투.
다만 지금껏 보아온 헬레나의 전투 장면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제가 착한 사교도는 죽은 사교도뿐이라 생각하는 건 사실이나, 광명교의 사제님들 수준은 아닙니다.”
그쪽은 완전히 미쳤다고. 나 같은 패션 광기와는 수준이 다르다.
아니, 이건 헬레나가 유독 사교도와 몬스터에 크게 반응하는 건가?
헬레나가 맨손으로 적들을 찢어발기는 모습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던 것도 잠시.
엘리샤는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며 내 부정을 부정했다.
“글쎄요. 지금껏 자신의 능력을 보이지 않고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가던 당신이 에드메렉이라는 자를 잡기 위해 이렇게까지 전면에 나선 시점에서 충분히 오해할만하지 않나요?”
“에이. 그건 별로 숨기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보여줄 일이 없었던 거지.”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치죠. 다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
의미심장한 엘리샤의 말에 반사적으로 헬레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런 상황에도 밝게 웃어주는 헬레나.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동지를 향한 친애와 존경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니야…마치 사교도 토벌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부은 의인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보지 마…!
말없이 파르르 떠는 나를 보며 그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어느새 꺼낸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키득대는 엘리샤.
저놈의 부채는 진짜 항상 가지고 다니는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내게 엘리샤가 말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얀델 당신의 말이 맞다면 분명 습격자를 역으로 치는 쪽이 더 안전하겠군요.”
“후우…그렇죠.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메렉이 상대라 불행 중 다행이에요.”
“에드메렉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워낙 유명한 사교도니까요.”
“조금 굵직한 사건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녀석이긴 하죠.”
에드메렉은 능력의 특성상 전면전보다 게릴라전이나 테러에 능한 녀석이다.
그리고 사도가 탄생하기 이전…플레이 초반의 사교도는 테러리스트 집단이나 다름없고.
당연히 에드메렉은 유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여도 그 모습을 바꿔 다시 나타나는 불사자. 막을 수 없는 습격자.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괴물. 이런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에드메렉에게 알기 쉬운 약점이 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지요.”
“뭔 별명이 그리 거창해요? 그놈은 그냥 구토하는 에드메렉이면 충분합니다. 토쟁이라 불러도 되고요.”
내 퉁명스레 대답에도, 엘리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을 뿐.
“대충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는 조사하면 금방 알 수 있다지만, 약점은 다른 문제랍니다. 얀델 당신이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을 경우도 있다는 거죠?”
“바로 그거죠. 제가 당신에게 제 목숨을 맡겨도 될지 아직은 판단이 안 선다는 소리에요.”
하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녀석이 사실 우린 평범한 사교도가 아닌 대주교의 습격을 받은 것이며, 녀석은 대단한 테러리스트지만 나는 아무도 모르는 그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러니 돌진하자!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엘리샤의 입장이었어도 믿기 힘들겠지. 어쩌면 이놈이 우리를 죄다 함정에 빠뜨리려는 스파이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고.
어떻게 하면 엘리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스윽.
“빛나는 사자 단검이라는 녀석입니다.”
“멋있는 이름이네요. 평범한 물건도 아닌 것 같고요.”
“그야 그렇죠. 이거 정의로운 광명께서 직접 뽑은 자신의 송곳니로 만든 단검이니까요.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서는 신물로 통하는 겁니다.”
“네?”
뜬금없이 등장한 신물에 눈을 크게 뜬 엘리샤. 아직 놀라긴 이른데.
“제 아공간처럼 던전을 공략하고 받은 거예요. 그리고 저는 입학하기도 전에 이 단검으로 혼탁한 합일의 주교 하나를 죽였어요.”
“…당신 그땐 마법도 못 썼잖아요?”
“저는 못 썼지만 카를라는 쓸 줄 알았죠. 그리고 이게 괜히 신물이 아니에요. 한번 찔리면 사교도는 꼼짝을 못합니다.”
“역시 카를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어차피 반쯤 들킨 거 그냥 내 입으로 불어도 문제는 없겠지.
“던전 공략 건은 게프 시 경비대가 증인이 되어줄 겁니다. 빛나는 사자 단검은 저어기 헬레나 사제님이 신물이라 인정해줄 거고요.”
“갑자기 이 말을 꺼내시는 이유가 뭔가요. 신물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 말을 믿어달라는 건가요?”
“아뇨. 이건 제 순수를 증명하려는 거죠.”
엘리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내 반대쪽 손바닥을 빛나는 사자 단검으로 냅다 찔렀다.
푸욱.
“큭….”
“야, 얀델?!”
아. 뒤지게 아프네. 그래도 참을만하다.
갑자기 자해를 시작한 내게 당황한 엘리샤가 바닥에 남은 포션 중 하나를 잽싸게 뿌렸다.
단검을 밀어내며 빠르게 재생하는 손바닥.
그 모습을 보며 완전히 단검을 뽑아내고는 덧붙였다.
“이 단검은 사교도거나, 놈들과 내통하는 배신자의 피에 젖으면 빛을 뿜어내며 살갗을 태우는 공능이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자기 손을 찌른 건가요?! 미쳤어요?!”
“아니…여기 포션도 많은데 손 한방 찌르는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없잖아요.”
“아프잖아요! 보통은 아프다는 이유 하나로 안 찌른다고요!”
정말 깜짝 놀랐는지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진 엘리샤. 근데 이게 제일 쉽고 빠른 건 사실이잖아….
조금 시무룩해진 심정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스파이 같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혼탁한 합일의 주교를 죽이며 공적으로 지정 됐죠. 분신체들이 절 보고 목표를 찾았다는 말도 하더라고요.”
“잠깐. 공적이요?”
주교를 죽였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공적으로 지정되기에는 부족하다.
혼탁한 합일은 자신의 모든 안배를 백지로 되돌리고,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피에트로를 죽인 것에 분노한 것이나….
여기서는 조금 양념을 쳐야지.
“네. 공적이요. 아무리 악신이 자기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놈들이라 해도, 주교 하나 죽인 놈을 공적으로 지정하지는 않죠.”
“…알아서는 안 될 걸 알아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요.”
“예를 들자면 교단 핵심 간부의 약점 같은 거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대답하자, 잠시 고민하던 엘리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전적으로 얀델 당신의 말을 믿도록 하죠. 대신 앞으로 안 믿어줄 것 같다고 다짜고짜 손을 찌르는 무식한 짓은 하지 마시길.”
“명심하겠습니다 글렌시엘 님.”
그 사이에 멀쩡해진 내 손바닥을 자꾸만 만지작대는 엘리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에드메렉이 있을만한 장소로 짚이는 곳이 있답니다.”
엘리샤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 던전의 보스. 자이언트 이블 래빗이 있는 곳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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