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이변(4)
* * *
에드메렉이 여기에 있다.
그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제법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바깥의 지원이 오지 못하는 이유는, 에드메렉의 부하들과 한창 싸우는 중이라 그런 게 틀림없겠지.
정작 에드메렉 본인은 몸을 숨겨 홀로 던전 안에 들어왔을 테고.
부하로 혼란을 일으키고, 자신은 홀로 침입해 목적을 달성한다.
이게 녀석이 자주 쓰는 전법이니까. 나도 뉴비 시절에 몇 번 당해봤다.
열심히 습격 막아내고 있는데 본진에서 분신체가 쫙 풀릴 때만큼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도 없더라.
“다만, 여기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어.”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알아 온 건지는 모르겠다만…궁금하긴 하군. 무려 대주교의 약점이 아닌가.”
“예. 저도 꼭 듣고 싶습니다 얀델 형제님.”
다음 구조 신호가 있던 곳을 향해 달려가며 지금껏 알아낸 것들을 말하자, 눈을 반짝이는 빈센트와 헬레나.
하기야. 주교도 아니고 대주교다. 절대 학생…그것도 1학년 수준에서 상대할 녀석이 아니지.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걱정이 많았으리라. 나도 상대가 에드메렉만 아니었으면 당장 몇몇 인원만 챙겨서 도망쳤을 테고.
“에드메렉의 권능은 너무 강해. 생각해봐. 삼켰다가 며칠 뒤에 토하기만 하면 다양한 능력을 가진 분신을 마구 찍어낼 수 있다고? 아무런 제약도 없을 리가 없잖아.”
그랬으면 진작에 혼탁한 합일 교단이 분신체로 밀어붙여 나라 몇 개는 거꾸러뜨린 상태였겠지.
에드메렉의 권능은 대단하지만…아주 심플한 문제가 있다.
바로 분신을 만들 때마다 그 분신에 투자하는 만큼의 힘이 깎여나간다는 점.
그리고 만약 분신이 죽으면, 분신에 들인 힘을 영영 되찾을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우리가 조금 전에 죽인 분신체가 대주교의 분신치고 약했던 건 그래서야.”
“하긴. 누구나 제힘은 아까운 법. 딱 이길 수 있는 정도로만 힘을 부여했나 보군. 혹은 실패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수준이거나.”
빈센트의 말대로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눈치챘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정리할게.”
가까운 순서대로 구조 신호가 있던 곳을 찾아가 에드메렉의 분신을 죽인다.
아쉽게도 조금 전의 파티는 사실상 전멸 상태였지만, 아직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와 합류한다.
그렇게 에드메렉의 힘은 줄여가고, 우리 쪽은 몸집을 불려가며 최종적으로는 에드메렉을 다굴쳐서 잡는다.
일단 이게 기본 골자긴 하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야. 에드메렉이 바보도 아니고 자기 약점이 공략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이지만, 자기 목 앞까지 칼이 들이밀어져도 고집부릴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
중간에 느낌이 쎄하면 바로 도망쳐야겠지만…아마 입구 쪽이 오히려 더 위험할 거다.
에드메렉이 유일한 탈출구를 멀쩡히 놔뒀을 리 없으니까.
그렇다고 바깥의 교수님들이 도와주러 올 때까지 버티는 것도 쉽지는 않으리라.
당연히 자기가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준비해 왔을 테니.
H&A에서 몇 번이고 당해봐서 잘 안다. 에드메렉 이놈은 절대 도망칠 수 없는 판을 짜는 데는 도가 텄다는걸.
결국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우리를 사냥할 생각에 신난 에드메렉을 역으로 사냥하는 정도.
위기는 곧 기회라 했다.
튜토리얼을 스킵했더니, 까딱 잘못하면 싹 다 죽을 수 있는 이벤트가 튀어나온 건 예상치 못했으나.
만약 이기기만 한다면 혼탁한 합일 교단은 단번에 약화되겠지.
중반부에 에드메렉과 얽히게 될 큼직한 음모도 자연스레 분쇄될 테고.
에드메렉 공략의 정석인 딜찍누에서 벗어난 건 좀 불안하지만…그래도 자신은 있다.
내가 에드메렉을 몇 번이나 잡아봤는데 설마 실패하겠어?
***
막무가내인 계획이지만, 빈센트와 헬레나는 잘 따라주었다.
아무리 포션으로 계속 체력을 회복시켜주었다지만, 숲속을 달리고 또 달리며 쉬지 않고 에드메렉의 분신체를 처리했으니까.
덕분에 결과는 좋았다.
발차기로 바위도 때려 부수는 토끼형 분신체나, 단단한 껍질에 숨어 고압의 물줄기를 뿝어대는 거북이형 분신체.
그 외에도 사마귀, 고양이, 늑대. 거기에 2마리를 한꺼번에 먹기라도 한건지 오리랑 너구리를 닮은 분신체까지.
상당한 수의 분신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에드메렉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쪽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싸울 수 있는 이들을 우르르 데리고 달려오면 분신체가 냅다 도망치더라.
만약 도주에 실패하면 어떻게든 우리 중 한명에게 중상을 입히려 들었고.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인벤토리에는 아직도 넉넉하게 포션이 저장되어있고, 합류한 사제가 제법 있다는 점이려나.
아무리 중상이라도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었다.
뭐어…살아있다고 해서 무조건 전부 싸울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조금씩 전력이 주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에드메렉은 우리에게 소모를 강요하고, 이쪽은 그걸 넉넉한 포션빨로 최소화하며 다른 학생을 구해낸다.
어느 순간부터 이어진 지지부진한 소모전.
아무리 온갖 포션과 버프로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한다 해도, 정신적인 소모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지쳐가는 학생들. 하지만 여전히 찾지 못한 에드메렉의 본체.
조금씩 꺾여가는 의지를 억지로 붙들어 도착한 다음 장소에서…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오호호호홋! 겨우 이 정도로 제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요?”
음색은 좋지만 어조는 좀 과할 정도로 아가씨스러운 목소리.
머리카락은 보기 드문 푸른색이었으며, 이를 더더욱 보기 드문 롤빵 스타일로 꾸몄다.
하이엘프의 상징인 길쭉한 귀는 기고만장하게 위아래로 까딱거렸으며, 단정한 이목구비는 묘하게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
날개 달린 분신체 하나를 찢어발긴 그녀가 나를 보며…아니, 내 뒤에 우르르 몰려있는 학생들을 보며 눈을 땡그랗게 떴다.
“어머? 얀델 당신 설마…?”
그도 그럴 것이 엘리샤의 뒤에도 똑같이 다른 학생들이 모여있었으니까.
왜 에드메렉이 예상보다 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했는지 알 것 같네.
나뿐만이 아니라 엘리샤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신체를 쓰러뜨리고 다른 학생을 구하고 있었을 줄이야.
사방팔방에서 자기 분신이 죽어 나가니, 굳이 고집부려봤자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놀란 표정을 짓는 엘리샤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글렌시엘 님.”
“당신도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제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겨우 이 정도 수준의 사교도들에게 픽 쓰러질 리가 없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는 엘리샤의 모습에 지금껏 쌓인 긴장과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생각보다 많은 분신체가 죽었을 것이며, 우리는 단번에 전력이 확충된 셈 아닌가.
내 표정이 너무 밝았던 탓일까. 엘리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카를라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마나통이 부각되는 자세.
“후후. 저를 만난 게 그리고 반가웠나요? 그렇겠죠. 얀델 당신도 저처럼 다른 이들을 구하며 온 것 같지만, 지치고 다친 이들을 이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네?”
우리 애들은 전부 멀쩡한데요? 정신적으로야 좀 지쳤지만.
“심지어 평민인 당신에겐 익숙지 못한 일일 테니 더더욱 힘에 부쳤겠죠!”
“뭐어…그건 그렇지만요.”
그래서 내가 아닌 빈센트와 헬레나를 전면에 내세웠다.
빈센트는 저래 보여도 누구나 인정해주는 뼈대 굵은 무가, 그레나딘 출신이며.
헬레나는 따로 특별 취급을 받지 않을 뿐, 성녀 후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태다.
전체적으로 콧대 높은 A반 학생이라도 둘의 말이라면 잘만 고개를 끄덕이더라.
물론 엘리샤는 그걸 모르니, 무척이나 안쓰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지만.
“하지만 안심하시길. 실반 마탑의 후계자이자 하이엘프인 저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이 당신의 짐을 대신 들어드리겠어요!”
“으음….”
“어머? 혹시 제가 당신의 공을 가로챌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저는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여길 빠져나가면 보고서는 같이 쓰도록 하죠.”
“아뇨. 그 부분에서는 믿고 있습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뭐죠? 설마…설마설마…저를 못 믿겠다는, 뭐 그런 건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리는 엘리샤의 눈동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여길 나갈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네?”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가 작정하고 쳐들어왔거든요. 아마 입구 쪽에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함정이나 매복이 있을 거예요.”
“대주교요? 그런 거물이 왜…아니, 어떻게 여기에…?”
역시 사교도의 습격이라는 건 알아도 어떤 놈이 온 건지는 모르고 있었나 보네.
“일단 글렌시엘 님 쪽 학생들부터 치료하면서 설명하죠.”
“어엇…네…아, 아니죠. 신성력은 회복하기 어려운 힘이니 아껴 써야 한답니다 얀델.”
“네. 알고 있어요. 포션으로 간단히 회복할 수 있는 마력이나 오러와 달리, 기도나 자연 회복으로만 채울 수 있잖아요. 그러니 몇몇 특이한 상처를 제외하면 전부 포션으로 회복할 거예요.”
“하지만 포션은 너무 낭비가 크잖아요. 당신 말대로 정말 대주교가 저희를 노리고 있다면, 회복 수단은 최대한 아껴둬야죠.”
“제가 포션이 좀 많아요.”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이 많은 인원을 전부 치료하려면….”
슬슬 설명하기도 귀찮아져서 그냥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와르르.
“…….”
순식간에 바닥에 쌓인 포션 더미를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린 엘리샤.
“다, 당신 대체 포션을 얼마나 사둔 거예요?! 심지어 전부 상급 이상이잖아요!”
“제가 좀 상비약을 중요하게 여기는 타입이라서요.”
“이건 상비약 수준이 아니잖아! 보급물자지!”
결국 엘리샤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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