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이변
* * *
이미 한번 크게 삐그덕댄 덕분일까.
포지션을 재정비한 이후로 우리 파티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주여! 당신의 빛을 내려주소서! 저로 하여금 역겨운 종자들에게 신벌을 내려 주소서!”
헬레나는 여전히 광전사에 가까운 모습으로 미쳐 날뛰었다.
찢고 죽인다.
그야말로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 같은 모습.
몬스터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절절하게 배어 나오는 그녀의 흉험한 기세와, 만인을 공평하게 비추는 햇볕처럼 따사로운 신성력이 참 언밸런스하다.
다만 저렇게 몬스터를 죽이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빈틈을 드러내고 말 터.
실제로 반쯤 눈이 뒤집힌 헬레나를 노리고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려던 이블 래빗이 한 마리 있었지만.
“흐아아아악!”
서걱.
악에 받친 기합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검이 녀석을 간단히 두동강 냈으니, 이젠 걱정할 필요 없겠지.
여전히 이블 래빗을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운 걸까. 빈센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덜덜 떨고 있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제대로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본 실력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으나, 싸울 수 있게 된 게 어디인가.
마지막으로 나는.
“빈센트! 헬레나 뒤에 한 놈 더 있다!”
“지금 가겠네!”
후방의 넓은 시야를 활용해 간단한 오더를 내리기도 했고.
“작열하고, 폭발하여, 집어삼켜라. 파이어 볼!”
틈틈히 몬스터들이 몰린 곳을 마법으로 조져주기도 했으며.
“어딜 광폭화도 안 한 게!”
“끼에에에에엑!!”
헬레나와 빈센트를 피해 직접 나를 노리려던 몇몇 몬스터의 배때지에 단검을 쑤셔주기도 했다.
…이상하게 나만 할 일이 많지 않아?
아무튼 그런 식으로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놀랍게도 그럭저럭 파티가 굴러가는 게 아닌가.
덕분에 처음에는 이거 맞나? 하면서 싸우던 빈센트와 헬레나의 입에도 싱글벙글한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처음에는 어떻게 되나 걱정이 많았는데…생각보다 좋은 파티지 않나!”
“전부 저희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준 얀델 형제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금칠하지 말아주세요 헬레나 사제님.”
“그렇죠. 누구나 떠올릴 수는 있죠. 하지만 이걸 어찌어찌 굴러가도록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형제님의 능력이니 순순히 저희의 찬사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헬레나 사제의 말이 맞네!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아니…여기 겨우 최하급 던전이라니까?
시간만 있으면 A반 학생 혼자서도 보스 빼고는 다 조질 수 있다니까?
물론 실전에서 히에엑 거리는 빈센트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놈은 각성 이벤트를 거치기 전까지는 진짜 걸림돌 그 자체거든.
대신 각성만 하면 진짜 좋은 캐릭이긴 한데…솔직히 말해 남캐라 그리 자주 키워보진 않았었다.
예쁘고 좋은 여캐가 널려있는데 굳이 남캐를…?
아무튼 둘이 너무 들떠있는지라, 어떻게 하면 몰래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가 좀 미안해지네.
그런 이유로 어색하게 웃으며 주제를 전환했다.
“됐고. 이제 뿔이나 뽑아가죠.”
“부끄러워하는군.”
“부끄러워하네요.”
빈센트와 헬레나가 키득거리며 이블 래빗의 부산물인 뿔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상대한 이블 래빗이 제법 많았던 탓에 한참을 갈무리 작업에 몰두하던 도중.
돌연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이블 래빗이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라지만, 갑자기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이 정도면 거의 유인 함정을 밟았을 때랑 비슷한 수준이잖아요.”
“무얼. 토끼굴 근처라도 왔나 보지. 우리에게는 점수가 굴러들어오는 일이니 기뻐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아직 몬스터 시체에 적응 못해서 실눈 뜨고 작업하는 주제에 호탕하게 웃는 빈센트.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A반이 된 뒤에도…아니, A반이기에 더더욱 점수가 중요하거든.
아카데미는 성적에 따라 반을 나누고, 반에 따라 대우가 극명하게 갈린다.
학생들의 향상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일종의 미끼라고도 할 수 있지.
하위 반이라고 패널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윗반이 특혜를 받는 걸 보면 아니꼬운 게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꼬우면 더 열심히 수련해서, 더 강해지면 된다.
하지만 상위반인 A반은 무엇을 미끼로 써야 할까.
간단하다. 일반적으로는 구할 수 없는 귀물을 내걸면 된다.
A반에서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성적을 결산해 포인트를 정산한다.
그리고 이 포인트로는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만든 마도구나 영약, 혹은 비급 같은 걸 구매할 수 있고.
아, 물론 그냥 돈으로도 바꿀 수 있긴 하다.
이게 꽤나 교환비가 좋아서, 가난 속성이 붙은 학생들은 우선적으로 일정 금액을 포인트로 구매하더라고.
아무튼 빈센트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업적 상점으로 불린 그 시스템을 노리고 있는 거겠지.
다만 사제계열답게 물욕은 옅은 헬레나는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마침 말 나온 김에 헬레나의 걱정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다.
“헬레나 사제님 말대로 갑자기 이블 래빗이 확 늘어난 건 사실이죠. 마침 가까운 곳에 큼직한 바위가 있으니, 그 위에서 한번 주변을 살펴보죠. 뭔가 이상하면 바로 몸을 빼고요.”
“아! 좋네요! 그럼 그렇게 하죠!”
조금 안심된다는 듯이 수줍게 웃는 헬레나. 겨우 5분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를 맨손으로 해체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갭이네.
사실 이 근방에 몬스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조금 전에 내가 가리킨 바위에 있을 히든피스…백화된 마력초가 풍기는 기운에 이끌렸기 때문.
안 그래도 마력을 풍부하게 머금은 풀인 마력초가 과도한 마력에 노출되어 변이를 일으킨 것이 백화된 마력초다.
제대로 만든 영약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초반에는 쏠쏠한 성장을 거둘 수 있는 영초고.
거기에 마력이라면 마법사인 내게 꼭 필요한 스탯이 아닌가.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리젠형 던전은 몬스터나 평범한 자원과 달리, 백화된 마력초 같은 명백히 특수한 물건은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려나.
게임에서야 귀한 아이템을 무한 파밍하지 못하게 막아두는 게 당연하지만, 여긴 현실이잖은가.
아마 무언가 리젠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뿔까지 인벤토리에 집어넣고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사이에 몬스터와 조우하는 일은 없었다.
***
“허…이러니까 못 찾지.”
탐지를 하겠다느니 뭐니 하는 이유를 둘러대며 혼자 올라간 바위 위.
그 구석에는 손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균열이 있었는데, 이 안쪽에서 자라난 새하얀 풀이 바로 백화된 마력초다.
누가 볼세라 잽싸게 뜯어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맑은 알림음.
띠링!
【던전의 숨겨진 보물을 찾았습니다!】
【업적 달성! 새로운 칭호 ‘어설픈 트레저 헌터’ 를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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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어설픈 트레저 헌터】
당신은 던전에 숨겨진 보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부터, 300년 전에 몬스터와 함께 봉인된 강력한 유물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만약 얻을 수만 있다면, 분명 당신의 여정에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조심하세요.
이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던전에서의 모든 행위에 긍정적인 효과 1% 추가.
던전 안에서 모험가에게 습격받을 확률이 3%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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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를 얻으면 자연스레 얻는 칭호다. 히든 피스를 계속 모으면 그 효과가 강화되기도 하고.
저 모험가의 습격이라는 건 공개된 외부 던전을 돌 때나 발생하는 이벤트다.
적어도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니, 사실상 노 리스크라는 소리.
마침 한 달이 지나, 재능있는 신입생의 칭호가 효과를 다했으니 이걸로 바꿔 껴야지.
그나저나 이 백화된 마력초는 어떻게 할까.
바로 먹어도 괜찮은 효과가 있겠지만…백화된 마력초의 마나를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니 어차피 지금은 못 먹는다.
무엇보다 내게는 페이가 있잖은가.
이걸 영약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주지 않을까?
영약까지는 아니어도 흡수하기 좋게 정제만 할 수 있어도 이득이다.
생각만 해도 든든해지는 상상에 괜시리 배를 두어번 두드리고서야 바위에서 내려왔다.
아, 일단 핑계로 댔던 탐지도 잊진 않았고.
“왔나? 무슨 이상은 없었고?”
“그래.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어. 아직 제대로 된 탐지마법을 못 써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단순히 여기가 이블 래빗이 살기 좋은 환경이라 그런 것 같은데?”
“으으.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네요. 그럼 여기서 조금 더 사냥하다 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
히든 피스도 회수했으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려던 찰나.
콰아아아앙!!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
설마 벌써 실습이 끝난 건 아닐 텐데?
의아함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다 같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허공을 수놓는 큼직한 폭발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는 것만 같은 마법.
심지어 이는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퍼엉! 퍼어엉! 펑!
여기가 실습용 던전인 이상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구조 신호의 향연 앞에 정신이 멍해졌다.
뭐지?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난…이런 이벤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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