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던전 실습(8)
* * *
“우와! 우와! 이걸 도망치네?”
“…빈센트 이놈. 검에 담긴 의지가 날카롭지 않으니, 여차할 때 약할 건 알고 있었는데…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허허. 처음부터 잘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실전은 완전히 처음인 것 같구려. 이제부터 잘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요.”
“그렇겠죠…하아….”
던전 앞에 세워진 가장 큰 건물. 그 안에 모인 각 학부 교수들이 허공에 떠오른 화면을 보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떠오른 화면에는 작은 여러 장면이 동시에 비치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같이 실습용 던전에 들어간 학생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리 던전 안에 설치해둔 특수한 마도구로, 공간의 격리를 뚫고 내부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나, 오랜 시간 관리하며 내부의 마력 패턴을 완벽히 파악한 실습용 던전에서는 어떻게든 가능한 일.
덕분에 이오나, 제이슨, 크리스티나 교수는 전투 내내 얼타다가 마지막에는 헬레나를 보고 도망친 빈센트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고.
“그나저나 역시 헬레나 학생은 대단하구려. 신성술도 대단한데, 체술까지 상당한 경지에 오르다니.”
“후우…그 아이도 아직 갈 길이 멀답니다. 정의로운 광명의 사제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헬레나는 특히 더 몬스터 상대로 격분하는지라….”
“그래도 겁먹고 도망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글쎄요…여기가 최하급 던전이라 그렇지, 다른 곳이었다면 혼자 도망치는 것보다 전투 시에 멋대로 뛰쳐나가는 쪽이 더 위험할 것 같습니다만.”
서로 자기 학생들이 걱정이라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제이슨과 크리스티나.
그 사이에서 이오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히히. 역시 우리 마법학부가 최고야! 그렇지 제이슨?”
“…저도 이제 교수니 교수를 붙여주시오 이오나 교수. 그리고 이건 얀델 학생이 뛰어난 거지, 마법학부 전체가 최고인 것은 아니오. 보시오. 여기 이 빌헬름이라는 학생은 마법사면서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전위에 나서지 않았소.”
“엑…아직 덜 맞…흠흠. 아직도 저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은 안 고쳐졌네….”
얀델에서 빌헬름이 있는 파티로 옮겨가는 교수들의 시선.
평가해야 하는 파티는 열댓개나 되는데, 교수는 겨우 셋뿐이라 모든 학생에게 신경 쓸 수 없는 상황.
그래서일까.
화면 구석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검은 로브 자락을 놓친 것은.
***
“끼야아아아악!”
저 멀리에서 뿔을 쏘아대는 이블 래빗. 날아오는 원뿔에 놀란 빈센트가 내 뒤에 숨었다.
“아악! 살려주게! 뿔이…뿔이잇…!”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십쇼! 마법 쓰는 데 방해잖아!”
아무리 시스템 보정 덕에 마법 시전에 큰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다지만, 쉴 새 없이 마법을 난사하던 중에 집중이 끊겨서 좋을 일은 없잖은가.
“그리고 내가 실드 걸어줬잖아! 저 정도 투사체는 대여섯 번 정도 막아낼 수 있다고!”
“하, 하지만 얼굴을 향해 날아왔네!”
“검으로 쳐내던가! 할 수 있잖아!”
이 귀찮은 자식!
빈센트를 거칠게 뿌리치며 스태프 끝에 맺힌 마력을 해방했다.
“워터 캐논!”
시동어와 함께 뿜어지는 고압의 물줄기.
뒤에서부터 헬레나를 노리던 이블 래빗 한 마리가 이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캬하아아아악!”
쯧. 머리를 노렸는데 빗나갔나. 이게 다 빈센트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다.
갈비뼈가 산산조각나고 내장이 곤죽이 됐다지만, 몬스터 특유의 질긴 생명력은 녀석을 이승에 붙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폭화.
“끄에에에에에에!”
하지만 헬레나가 그 빈틈을 보고만 있을 리 없지.
뿔을 앞세워, 몸통 박치기를 하던 이블 래빗 한 마리를 허공에서 붙잡았다.
목이 잡혀 켁켁대는 녀석의 뿔을 수도로 쳐내 부러뜨리고는, 그대로 정수리에 찍어 한방에 깔끔하게 절명시키는 헬레나.
실로 놀라운 연계나…사제가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얻은 헬레나는 즉시 광폭화 중인 이블 래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여! 오늘도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 씹새끼 하나를 올려보냅니다!”
그리 외치며, 4갈래로 갈라진 턱 사이에서 슬금슬금 튀어나오려던 촉수 다발을 턱 붙잡는 헬레나.
“끄엑?”
이블 래빗이 당황한 소리를 냈지만…그것이 녀석의 유언이 되었다.
“흐으읍!”
한쪽 발로 이블 래빗의 아가리를 밟고 야무지게 촉수를 뽑아내는 헬레나.
촤아악!
졸지에 촉수는 물론이고, 안쪽의 내장까지 단번에 뱉어낸 이블 래빗의 배가 홀쭉해졌다.
“아아…주의 은총이 제 몸에 가득하니, 두려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헬레나는 감격스런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아직 숨이 붙어 바들거리는 이블 래빗의 머리를 밟아 으스러뜨렸다.
…무서워.
너무 무섭잖아!
저게 어딜 봐서 사제냐고!
빈센트가 헬레나를 가까이서 보고 도망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도 그럴게….
아직 몬스터는 많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의로운 광명 뽕에 찬 헬레나를 양쪽에서 동시에 덮치는 놈들이 있었으니까.
“쇼크! 쇼크!”
재빨리 시동어만으로 쓸 수 있는 기초마법을 난사했다.
“끼익?!”
“캬아악!”
기초마법답게 그 위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래도 전격마법이라 잠깐의 경직은 줄 수 있는 쇼크 마법.
막 도약하려던 차에 몸이 마비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투둑.
어중간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질 뿐이지.
순간 무력해진 이블 래빗 두 마리를 보며 헬레나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얀델 형제님! 이렇게나 귀한 선물이라니!”
아냐. 그거 선물 아냐.
하지만 몬스터의 뚝배기를 깰 생각에 가득 찬 헬레나는 그거 싱글벙글 웃으며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파아앗.
옅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신성력. 헬레나의 금발 금안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지만…이블 래빗의 눈에는 사신보다도 무섭게 보였나 보다.
“뀨웃?”
“뀨잇?”
뿔까지 집어넣으며, 평범한 토끼인 척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녀석들.
하지만 녀석들의 생존을 위한 발버둥은 헬레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 가증스러운 몬스터 놈들이! 감히 저를 현혹하려 드는 겁니까!”
되려 격분한 헬레나가 양손에 뭉친 신성력 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홀리 스트라이크.
사제 계열의 몇 없는 직접 공격 계열 신성술 중 하나가 두 이블 래빗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간 이블 래빗의 대가리.
이 정도면 파이어 볼의 3분의2 정도 되는 위력인가?
보통의 홀리 스트라이크가 이렇게 강하지는 않다.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정의로운 광명의 신성력이라 가능한 일이겠지.
뭐, 대신 전투와 관련 없는 일에는 영 젬병이지만.
그나저나 이걸로 빈센트가 밟은 유인 함정에 이끌려온 몬스터는 전부 처리했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내 뒤에 숨어있던 빈센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부 해치웠나? 일단 기척은 느껴지지 않네만.”
“해치웠냐니.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십쇼.”
“뭣? 난 그냥….”
무어라 항변하는 빈센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모았다.
우웅.
나를 중심으로 옅고 넓게 퍼지는 염력 마법.
아직 제대로 된 탐지 마법을 배우지 못한 나를 위해 카를라가 알려준 꼼수다.
반경도 짧고, 마법적인 현상은 알아챌 수 없지만 몬스터의 존재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나.
다행히 특별한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네.
“하아…일단 마무리된 것 같네요. 주변에 다른 몬스터들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정말인가?”
“네. 정말이니 이제 좀 떨어지시죠.”
“끄응….”
내 확답을 듣고서야 앞으로 걸어 나오는 빈센트.
마침 자괴감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헬레나까지 모이자, 그제야 세 명이 제정신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니, 헬레나 사제님은 왜 표정이 그러십니까. 잘 싸우셨으면서.”
“그래서 문제죠. 저는 일단 사제잖습니까. 이번에는 좀 자중하려고 했는데…또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뭐어…여기가 실습용 던전이 아니었다면 위험한 짓이긴 하죠.”
사제가 앞으로 튀어 나가면, 다른 파티원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회복이 필요할 때 회복이 늦어지고, 축성이 필요할 때 축성이 늦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혹시라도 헬레나가 죽거나 기절한다면 그 파티는 마법사에게 모든 보조를 기대야 한다.
보조 마법은 신성술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니 마력의 소모는 극심해질 것이며, 마법사의 장점인 화력도 시들해지겠지.
그렇게 전위에 가해지는 부담이 강해지고 최종적으로는 버티지 못한 전위가 무너지면 파티가 전멸하는 거고.
이를 너도나도 잘 알기에 파티끼리 싸울 때는 사제부터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여기가 실습용 던전이라 결과가 좋았을 뿐, 빈센트가 한 빤쓰런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행동.
하지만.
“괜찮아요. 여기는 그런 고난이도 던전이 아니라 실습용 던전이잖아요. 그리고 누군가는 전위를 맡아야 했어요.”
“얀델 형제님…!”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헬레나.
하기야. 지금껏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 말만 들었을 테니, 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 크게 와닿았으리라.
빈센트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끝에 각성하는 개별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면.
헬레나의 개별 스토리는 놀랍게도 이대로 체술을 갈고 닦아 성기사처럼 전열에서 싸울 수 있게 되는 내용이다.
그쯤에는 성녀 후보가 아닌, 진짜 성녀로 인정받기도 하고.
“아, 그래도 빈센트 님은….”
“그냥 빈센트라고 편하게 불러도 좋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정말 미안하네. 너무 당황해 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네.”
고개를 푹 숙이는 빈센트.
“알면 됐어. 아무튼 이번이야 그렇다 쳐도 다음에는 어떨 것 같아? 앞에서 싸울 수 있겠어?”
“그건…조금 힘들 것 같군.”
뭐 그렇겠지. 이 시기의 빈센트는 진짜 쓰레기나 다름없는 캐릭터니까.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이 정도로 심할 줄 몰랐지만, H&A에서 빈센트를 실습 던전의 파티로 만난 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럼 혼자 전위에 서는 게 아니라 헬레나 님의 보조를 맡는 거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으음. 그건 괜찮을 것 같네.”
“헬레나 사제님? 어때요? 다음에도 전위에 서 주시겠어요?”
“예? 하지만….”
곤혼스러워 하는 헬레나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던전에 맞춰 전략을 수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여기 몬스터는 충분히 헬레나 사제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으니 전위에 서도 문제 될 건 없죠.”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한번 힘 써보겠습니다.”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는 나와 헬레나.
한번 난장판을 겪고 난 뒤여서 그런 걸까. 파티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헬레나 사제님이 앞장서서 몬스터를 상대해주시고, 빈센트가 그 보조를. 나는 후위에서 마법으로 화력 지원을 하며 오더를. 어때? 다른 좋은 생각 있는 사람 있어?”
“아니. 없다.”
“저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내 의견에 따르겠다는 두 사람.
좋아. 이걸로 자연스레 오더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전투에 들어가면 제정신인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덕분에 히든피스가 있는 쪽으로 유도하기 편해졌다는 것 또한 사실.
“그럼 이제 다시 출발하자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아 위치를 확인하고는 히든피스가 있을 장소를 가리켰다.
파티원이 통제 불능이라는 건 아쉽지만, 이렇게 보면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실습용 던전의 구석.
보스가 있는 거대한 토끼 굴 앞을 지키던 아카데미의 경비가 무력하게 쓰러졌다.
털썩.
무너진 몸뚱이는 절반가량이 뜯겨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괴물이 씹기라도 한 것처럼 그 절단면이 거칠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베테랑 용병 수준은 될 경비는 조금 전을 마지막으로 전멸했다.
피와 살점이 어지럽게 흩뿌려진 땅.
그 위에 유일하게 서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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