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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57화 (57/230)

〈 57화 〉 던전 실습(7)

* * *

시작은 순조로웠다.

빈센트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뽑아 전위에 나섰으며, 헬레나는 로사리오를 움켜쥐고 후방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걸어 주었다.

나 또한 한손에는 빛나는 사자 단검을, 다른 한손에는 최근에 새로 산 스태프를 쥔 채 중위에 섰고.

일렬로 늘어선 단순한 대형이지만…애초에 사람도 셋뿐이고, 각자의 역할이 확연히 구분되니 오히려 이쪽이 낫다.

교과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범적인 진형.

“허…던전이라길래 조금 긴장했다만…평범한 숲이나 다름없군.”

“예에. 실제로 평범한 숲에 자리 잡은 몬스터들을 통째로 봉인한 것이니까요.”

맥 빠졌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빈센트와, 그런 빈센트에게 나긋한 어조로 대답하는 헬레나.

둘의 짧은 대화를 신호 삼아 우리는 천천히 숲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드디어 우리는 첫 몬스터와 조우했다.

부스럭.

“잠깐.”

내겐 단순한 바람 소리처럼 들렸지만 오러 유저에게는 달랐던 걸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리를 멈춰 세우는 빈센트.

“저기. 뭐가 있군.”

그리고는 검으로 조금 떨어진 곳의 풀숲을 척 겨눴다.

바스락 바스락.

자기를 겨눈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나뭇잎. 그 너머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갈색 털. 기다린 귀. 빨간 눈. 그리고 토실토실한 몸뚱이.

“…토끼였나.”

누가 봐도 토끼처럼 생긴 녀석을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빈센트가 검을 내렸다. 하지만.

“검 다시 드세요! 저거 몬스터입니다!”

던전에 평범한 동물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은가.

내가 자신을 경계하며 마법을 준비하는 모습에 글렀다고 생각한 걸까.

“뀨잉.”

토끼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순식간에 순하디순한 초식동물의 탈을 벗어던졌다.

“끼야아아악!”

묘하게 사람 비명소리를 닮은 괴성, 중형견 수준으로 부풀어 오르는 몸집, 그리고 이마에 돋아난 날카로운 뿔.

“이블 래빗인가…!”

그제야 녀석의 정체를 눈치챈 빈센트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으며 땅을 박찼다.

“이대로 베어주마!”

좋은 판단이다.

적의 변신이 끝나기를 기다려줄 이유는 없잖은가. 가장 취약한 순간에 슥삭 해버려야지.

촤악!

“끄이에에엑!!”

오러 유저의 초인적인 속도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하고 너덜너덜해진 이블 래빗.

뜯어지다시피 베인 옆구리에서 내장이 질질 흘러나오는 모습이 퍽 그로테스크하다.

허나 죽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지.

마침 준비하던 마법의 영창이 끝나가네.

귀찮아지기 전에 이걸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려는 순간.

“…어?”

멍청한 소리와 함께 멈칫한 빈센트. 그의 시선이 빈사 상태의 이블 래빗에게 고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꾸물꾸물.

“키햐아아악!!”

돌연 녀석의 턱이 네 갈래로 갈라지더니, 입에서부터 굵은 촉수 다발을 꺼냈으니까.

뿔 달리고, 덩치가 클 뿐 근본적으로는 토끼와 다름없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

기껏해야 중형견 수준의 전투력을 가진 이블 래빗이 몬스터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 모습 때문이다.

녀석은 최하급 몬스터 주제에 무려 광폭화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봐야 고블린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지만.

광폭화 패턴이 나오기 전에 끝내려고 했는데…조금 마법이 늦었네.

상관없다.

외계 기생 생물에게 잠식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외형은 끔찍하기 그지없으나, 녀석이 빈사 상태라는 것은 변함없으니까.

찌릿.

스태프 끝에서 느껴지는 전류. 최근에 새로 배운 전격계 하급 마법 썬더 볼트의 완성을 느끼며 외쳤다.

“비키세요 빈센트! 마법 준비됐습니다!”

바로 옆으로 마법 하나 날아갈 테니 놀라지 말라는 뜻. 하지만 내 나름의 배려는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으아악! 촉수…촉수가앗…!”

빈센트는 이미 패닉 상태였으니까.

어, 응. 방금 장면이 좀 끔찍하긴 했지.

날아오는 이블 래빗의 촉수 뭉치를 피해 옆으로 펄쩍 뛴 빈센트.

그런데 하필이면 그 위치가 내 썬더 볼트의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파지직!

“끄헉! 기습! 기습이다!! 놈들이 더 숨어있네!”

“이…멍청이가!”

그건 네가 내 마법을 몸으로 막아서 그런 거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사전에 내 실드 마법과 헬레나의 축복을 받은 덕에 직격으로 맞고도 조금 움찔했을 뿐,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려나?

“다, 다들 도와주게! 우리는 파티 아닌가! 몬스터에게 포위당해도 어떻게든 하나가 되어 돌파해야…!”

아, 패닉이 조금 더 심해졌네. 검을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며 별거 아닌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잖은가.

허리 높이밖에 안 되는 수영장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이런 느낌일까.

이 와중에 단 한 대도 안 맞는다는 점이 놀랍기 그지없다.

H&A에서는 빈센트가 패닉에 빠지면 조작 불능과 명중률 저하 상태가 되었는데…이래서 그런 거였군.

어쨌든 빈센트를 이대로 놔둘 수도 없으니 도와줘야겠지.

이제 와서 하급 마법을 시전해도 늦는다. 그러니 그냥 후려치자. 어차피 다 죽어가는 놈이라 한 대만 맞아도 쓰러질 터.

“테라.”

스태프 끝자락에 뭉치는 흙덩어리. 마력을 조금 더 집어넣어 단단하게 굳혔다.

이대로 휘두르면 길쭉한 둔기나 다름없으리라.

…스태프의 올바른 사용 방법은 아니지만.

속으로 피식 웃으며 땅을 박차려던 순간.

나보다 한발 빠르게 달려든 사람이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몬스터가! 어딜 그 더러운 촉수를 꺼내는 겁니까!”

눈을 반쯤 까뒤집고, 한데 묶은 금발은 길게 흩날리며 돌진하는 헬레나.

그 속도가 눈으로 쫒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거기에 좀 과할 정도로 몸이 빛나고 있기도 하고.

설마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껏 가만히 있던 건, 자신에게 축복을 떡칠하기 위해서인가?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흉흉한 살기마저 품은 헬레나.

그 저돌적인 모습에 위협을 느낀 걸까. 빈센트에게 촉수를 뻗던 이블 래빗이 다급한 울음소리로 뿔을 발사했다.

“끼에에에엑!”

그래. 발사다. 딱 한 번 뿐이지만 위협을 느낀 이블 래빗은 뿔을 화살처럼 쏘아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의 헬레나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까짓 게 주의 은총을 받은 저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가볍게 고개를 젖혀 뿔을 피하는 헬레나.

몸놀림이 부드러운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힉! 히이이익!”

헬레나가 피한 뿔이 빈센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튼 다친 사람은 없었다.

결국 빈센트에게 뻗던 촉수를 전부 회수하지도 못하고, 하나뿐인 뿔마저 날려 보낸 이블 래빗.

그런 녀석의 코앞까지 도착한 헬레나가 달려가는 기세를 그대로 담아 이블 래빗의 머리를 걷어찼다.

퍼엉!

물이 가득찬 가죽 주머니를 때리는 것처럼 듣기만 해도 얼얼한 타격음.

머리와 함께 상반신 전체가 날아간 이블 래빗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부채꼴로 흩뿌려진 이블 래빗의 잔해 앞에서 한차례 숨을 고른 헬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치신 곳은 없나요 빈센트 형제님?”

언제 미친놈처럼 몬스터 하나를 터뜨렸냐는 듯 해맑은 미소.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정의로운 광명 교단은 악신과 관련된 일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광신도 집단이라는 걸….

내가 봐도 흠칫했는데, 사교도 입장에서는 어떻겠는가.

저러니까 스토리 후반부에 사교도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무너지거나 타락하는 거구나.

광명교도라면 치를 떨던 H&A속 사교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흐아아아악!”

“에? 형제님? 빈센트 형제님?!”

과하게 잔인한 모습에 멘탈이 완전히 터진 걸까. 빈센트가 비명을 지르며 헬레나로부터 도망쳤다.

…돌겠네.

지금까지는 단순히 ‘실전 울렁증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라는 간단한 텍스트로 보던 빈센트의 문제가 이렇게 골치 아플 줄은 몰랐는데.

빈센트도 영입 대상 캐릭터인지라, 나름의 개별 스토리가 있다.

지금까지는 시체조차 남지 않는 환영이나, 자신은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강자인 아버지랑만 대련했다는 설정이었던가.

그 탓에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실전에 과하게 겁을 집어먹고 만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빈센트 스토리의 주된 내용이었고.

하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일단은 빈센트를 데려와서 억지로라도 붙들어놔야겠지만.

황망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빈센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헬레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헬레나 사제님. 그냥 놀라서 그런 것 같으니까요.”

“예에…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빈센트 형제님을 따라가야겠습니다.”

말은 그리하지만 조금 시무룩해진 헬레나와 함께 빈센트가 뛰쳐나간 쪽으로 향했다.

쓸데없이 신체 능력은 뛰어난 빈센트였기에 한참을 달린 끝에 망연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고.

…빈센트의 발밑에 함정이 깔려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몬스터를 유인하는 함정을.

왜애애애애앵­

숲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소리.

그렇게 우리는 좆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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