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던전 실습(6)
* * *
황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가온 헬레나가, 마찬가지로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형제님.”
“엇, 네. 무슨 일이십니까 사제님.”
“혹시 싸움 좀 하시나요?”
“???”
뭐지? 시비 거는 건가?
내가 아는 헬레나는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성녀 후보로 꼽힐 정도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성직자였다.
그, 왜. 있잖은가.
언제나 밝고, 상냥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변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끄는 사람들.
지구에서의 삶을 통틀어서 내게 종교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존경할 수 있는 신실한 사제.
헬레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 물론 개인으로서의 헬레나는 이래저래 허점도 많고, 평범한 그 나이대 소녀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어느 쪽이건 다짜고짜 ‘마! 니 좀 치나?’ 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
…상대가 사교도만 아니라면 말이다.
정의로운 광명은 모든 선신들 중에서도 가장 악신에게 적대적인 신.
하여 언제나 온화한 광명교도들이라도 악신과 관련된 이들.
그러니까 사교도나 몬스터를 만나는 순간, 입에서 게거품을 물며 성전을 부르짖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입니다! 사제님! 저는 사교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증오하는 쪽이죠!”
“네? 그런 게 아니…흠흠. 그렇단 말이죠? 얼마나 그 간악한 것들을 미워하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목을 가다듬으며 그리 말하는 헬레나.
사교도가…말대꾸?! 같은 말이라도 하려던 게 아닐까?
다만 변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저쪽에서도 확신하고 있지 못한다는 뜻일 터.
대체 어디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아무튼 난 절대 아니라는 진심을 담아 외쳤다.
“세상에 여러 악신이 있지만 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개새끼들입니다!”
“오오…!”
“그 쫄따구인 사교도와 몬스터도 마찬가지로 씹새끼죠!”
“그렇죠! 근데 어떤 부분이….”
아까보다 훨씬 더 반짝이는 눈으로 자세한 내용을 재촉하는 헬레나.
그 모습이 마치 더 지껄여 보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헬레나가 원래 이렇게까지 폭력적인 캐릭터가 아닌데…어쩌다 이런 누명을….
설마 카를라 때문인가?
카를라의 아버지는 사교도로 몰려 처형당했잖은가.
그 딸인 카를라와 붙어먹는 모습을 보고, ‘님 혹시…?’ 같은 생각을 한 건가?
…그렇게까지 정의로운 광명 교단이 미친놈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어쨌든 의심받고 있는 것 같으니 지금은 이 의혹부터 어떻게 해야겠지.
잠시 H&A 후반부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마침 최근에 혼탁한 합일의 사교도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예?! 정말요?! 어디였죠?”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는 헬레나의 눈빛.
위치만 알려주면 지금 당장 달려가서 전부 때려 부수겠노라 선언하는 것만 같은 광기에 가득 찬 눈동자다.
무서워….
“이, 이젠 없습니다! 저랑 게프 시의 경비대들이 전부 쓸어버렸거든요! 그 과정에서 저는 제 노예와 함께 던전도 하나 공략했고, 직접 혼탁한 합일의 주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와아!”
언제 눈동자를 부라렸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헬레나.
“그 씹새끼들은 무려 선량한 시민들이 생활하는 도시 지하에 아지트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곳의 미발견 던전을 노린 것이죠! 음험한 새끼도 이런 음험한 새끼가 따로 없습니다!”
“언제나 사교도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에 자리 잡는 법이죠. 세상 만물을 공평히 비추는 태양조차 놈들에게 줄 빛은 없기에…!”
“맞습니다 맞습니다! 근데 충격적인 건 이제부터입니다. 놈들은 던전의 봉인을 풀기 위해 몰래 사람을 납치해와 인육으로 인신공양을 했는데….”
이참에 쐐기를 박듯, 내가 게프 시 지하에서 본 것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알려주었다.
썩어가는 피 웅덩이, 붉게 물든 인간 도축장,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제단, 그리고 평범한 노상인 것처럼 팔던 인육 꼬치.
내 한마디 한마디에 헬레나는 분개하거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짧게 묵념하기도 하며 내게 맞장구쳐주었다.
나를 향한 의심은 많이 희석된 듯한 느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빈센트가 미친놈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나와 헬레나를 번갈아 보았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악신 개새끼! 사교도와 몬스터는 씹새끼!”
“수상한 사람을 보면?”
“근처의 교단이나 경비대에 신고해야죠!”
“하지만 확실한 사교도나 몬스터를 보면?”
“찢고, 죽인다!”
그러니까 나 좀 살려줘!
내 간절한 의지가 전해졌던 걸까.
“주께 감사를! 형제님은 실로 훌륭한 분이셨군요!”
“제가 좀 그렇죠.”
이 정도면 오해는 풀린 거겠지?
아직도 더 의심하냐는 눈빛을 담아 바라보자, 헬레나가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으…사실 저는 형제님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처음에 제게 하신 말씀은…?”
“부, 부끄럽게도 제 마음이 급해 생긴 말실수랍니다.”
“…예?”
“형제님에게서 제 주의 은총이 느껴지셨거든요. 하지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분은 아닌 듯 하니, 간악한 것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주께서 감명 깊게 보신 것이겠죠.”
“아, 잠깐만요. 혹시?”
그러고 보니 나 지금 태양신의 가호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
태양신이 정의로운 광명이니, 그 사제인 헬레나가 이를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럼 나 완전 헛다리 짚은 것 같은데?
내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예에…형제님의 무용담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그만 말을 이상하게 하여 형제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말았습니다.”
헬레나가 자신의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오해라는 걸 깨달은 뒤에도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워, 차마 도중에 밝히지 못했고요.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사죄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흔들.
사랑과 용서. 그리고 자비와…아무튼 좋은 것들로 가득 찬 주머니가 자연스레 강조되는 자세였다.
이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그럴 수도 있죠.”
내가 실질적인 피해를 본 건 아니잖은가.
무엇보다 사과도 받았는데, 굳이 따지고 들어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모양새가 좋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제 자기소개나 할까요? 저희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너그러이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자기소개는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엣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헬레나라고 합니다. 형제님께서는 눈치채신 것 같지만, 정의로운 광명의 사제고요. 기본적인 신성술은 전부 쓸 줄 아니 치료나 축복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드디어 사제님이 아니라 헬레나라고 부를 수 있게 됐네.
솔직히 이름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게 조금 귀찮았다.
“헬레나님이셨군요. 그럼 다음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얀델입니다. 저 또한 기본적인 속성별 하급 마법을 대부분 쓸 수 있으며, 실드도 쓸 줄 압니다. 아, 그리고….”
스윽.
인벤토리에서 빛나는 사자 단검을 꺼내 보였다.
“단검도 다룰 줄 압니다. 물론 기사들 수준은 아니니, 단순히 유사시에 약간은 대응할 수 있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업! 그, 그거 저희 주의 신물 아닌가요?!”
“조금 전에 말했던 게프 시 던전 공략 보상으로 받은 은혜입니다. 아무래도 그곳을 봉인한 분은 정의로운 광명님인 듯하여…아, 혼탁한 합일의 주교를 쓰러뜨린 것도 이 단검이었죠.”
“주께서도 얀델 형제님의 분투에 기뻐하실 겁니다. 아니, 이미 기뻐하시며 가호를 내리셨군요. 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진심을 감동받았다는 듯이 가슴 벅찬 표정을 짓는 헬레나.
누구 죽였다는 말에 이렇게 좋아하는 게 영 찝찝하긴 한데…사교도는 인간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덕담을 나누려던 것도 잠시.
“…이제 나도 좀 말해도 되겠나?”
지금껏 주변에서 한숨만 푹푹 쉬던 빈센트가 끼어들었다.
“아앗! 죄, 죄송합니다 형제님. 신물에 너무 들떠서 그만….”
“악의가 없었음은 알고 있다. 탓할 생각 없으니 진정하도록. 아까부터 너무 안절부절못하고 있잖은가.”
묘하게 고압적인 말투.
하지만 녀석의 가문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수준이다.
“내 이름은 빈센트 그레나딘. 가문의 비전인 그레나딘 검술을 주로 쓰며, 오러 유저 중입 수준은 된다. 공세가 특기인 검술이라 방어면에서는 부족하겠지만…그 부분은 너희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레나딘 후작가.
레반틴 제국 소속으로, 무가?家 중에서는 상당한 네임드에 속하는 가문이다.
그런 곳에서 자랐으니 자연스레 거만한 언행이 몸에 밴 것이리라.
말만 좀 딱딱하지, 나쁜 놈은 아니라 인성 면에서는 걱정할 게 없는 녀석.
다만, 한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가장 앞장서서 적과 싸울 터이니, 전위는 맡겨주시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가슴을 텅텅 두드리는 빈센트.
녀석은 실전 울렁증이 있다.
지금이 첫 실전이라 아직 본인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도 실습용 던전은 최하급 몬스터만 나오니 별문제 없겠지.
자기소개 이후로도 간단하게 포지션이나 함정 감지 법 등의 이야기를 하던 도중.
우리의 차례가 되어 다 함께 던전 입구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악! 살려주게! 뿔이…뿔이잇…!”
“징그럽게 달라붙지 마십쇼! 마법 쓰는 데 방해잖아!”
“주여! 오늘도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 씹새끼 하나를 올려보냅니다!”
전방에서 미쳐 날뛰는 사제.
마법사 뒤에 숨는 검사.
그리고 정신없이 사방팔방으로 마법을 난사 중인 나.
…대환장 파티가 될 건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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