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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55화 (55/230)

〈 55화 〉 던전 실습(5)

* * *

드디어 던전 실습 당일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다들 강의실이 아닌 중앙 광장에 모여있는 상태.

다만 척 봐도 기사처럼 보이는 이들이나, 교복은 어디로 갔는지 아카데미의 로고를 달았을 뿐인 사제복을 입은 학생들도 종종 보였는데.

이는 나름 익숙해진 마법학부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기사학부와 신성학부 학생들도 모여있기 때문이리라.

각 학부 A반의 인원은 열댓명에 불과하나, 세 학부가 모여 있으니 얼추 40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이 모인 셈.

사람이 많은 만큼 웅성이는 소리도 평소보다 크게 들려왔다.

­흥! 아무리 실습용이라지만 최하급 던전이라니.

­너무 얕보지 마시게. 내 형님께 듣기로는 교수님들이 직접 함정을 설치했다더군.

­그렇다 해도 혼자가 아닌 셋이서, 그것도 보스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잡다한 녀석들만 상대하는 거 아냐.

응.

예상대로 다들 걱정한다기보다는 자신만만해하는 분위기네.

일전에 이오나가 말했던 우쭐해서 혼자서도 문제없다는 이가 매년 나온다는 소리가 뭔지 좀 알 것 같네.

기사학부가 저 정도면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마법학부에서는 정말로 혼자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이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게 올해는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성숙해진 익숙한 얼굴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기사학부의 멍청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카데미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실습을 계획했을 리가 없잖은가.

이제 저 녀석들은 예상과는 다른 실전에 꽤나 버벅대리라.

뭐…그렇다고 해서 너무 긴장할 필요도 없지만.

오늘을 위해 페이에게 특별히 주문한 물건들도 전부 챙겼고, 그동안 이것저것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지금까지 항상 내 곁에 붙어 다니던 카를라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게 허전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시종들 사이에 섞여, 이쪽을 지켜보는 카를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처음 심부름을 나가는 어린아이라도 보는 것처럼, 대견함과 걱정이 담긴 눈으로 왈칵한 표정을 짓는 카를라.

같이 실습용 던전보다 훨씬 어려운 게프 시 던전도 공략했으면서 왜 저런담…?

카를라의 유난에 피식 웃으며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가슴을 탕탕 두드려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지는 카를라.

하지만 내 과시하는듯한 행동이 거슬린 사람이 있는 걸까. 누군가 내 어깨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뭐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돌아보았으나…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순수한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뒤에 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샤였으니까.

평민 주제에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같은 의미가 아니라 뭔가 할 말이 있는 거겠지.

“글렌시엘님?”

“좋은 아침이네요 얀델. 그나저나 조금 전의 그건 무엇인지요?”

“별거 아닙니다. 카를라가 저를 걱정하는 것 같아 조금 안심시켜준 것뿐이거든요.”

“어머?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주종관계가 참 아름답네요. 입학식 이후로 따로 알아봤습니다만…보통의 주인과 노예는 당신들처럼 사이좋지 않다더군요.”

“그야 그렇죠.”

나도 나와 카를라가 평범한 주종관계가 아님은 자각하고 있다. 여기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말 나온 김에 슬쩍 찔러봐야겠네.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수업 이외에도 카를라에게 따로 마법을 배우고 있거든요. 평범한 노예와 다른 일을 해내고 있으니, 평범한 노예처럼 대해서는 안 되겠죠.”

“하기야. 얀델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가 아무런 이유 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겠죠. 음음.”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아니, 마나 코어에 대해 뭔가 이야기해보라고. 나 너무 신경 쓰여!

하지만 이런 내 내면의 외침이 닿지 않았던 걸까.

엘리샤는 그저 어떻게 유지하는 건지 모를 거대한 롤빵 머리를 한차례 흔들고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 실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길.”

그 한마디와 함께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멀어지는 엘리샤.

결국 오늘도 카를라의 마나 코어 쪽은 언급조차 안 했다.

…사실 이건 내가 신경 쓰여 미치게 만들려는 계략이 아닐까?

물론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하긴 하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다들 조용! 조용!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입은 다물고 귀는 열어봐!”

“…거 이오나 교수. 학생들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애처럼 대해서 되겠소?”

“저한테는 제이슨 교수도 애기나 다름없는데용?”

“아.”

평소처럼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오나와, 그런 이오나에게 핀잔을 주려다 되려 얻어맞은 대머리의 근육질 거구.

머쓱해 하는 둘 사이로 수녀복을 입은 노파가 끼어들었다.

“두 분 다 그쯤 합시다. 아직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잖습니까.”

“맞아 맞아! 크리스티나 교수 말대로야! 왜 방해하고 그래 제이슨 교수!”

“이걸 내 탓으로 몰아간단 말이오?! 에이잇! 됐소! 제일 어린 내가 설명할 테니 나이 많은 두 분은 뒤에서 쉬고 계시오!”

씨근덕대며 중앙 광장의 중심인 용사 라힘의 동상 앞으로 나서는 대머리 교수.

이오나가 마법학부 A반의 담당 교수라면, 지금 나서는 제이슨은 기사 학부의, 뒤에서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파 크리스티나는 신성학부의 A반 담당 교수다.

“아아! 잘 들리나? 그럼 바로 던전으로 가기 전에 간단하게 룰을 설명해주마!”

오러라도 쓴 건지 중앙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다만 그 내용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대충 순간이동 게이트로 던전 앞까지 갈 거고, 거기서 파티를 짜줄 거다.

던전은 숲 형태의 필드형 던전이고, 잡몹은 얼마든 잡아도 되는데 보스는 잡지마라.

진입 후에는 자유로이 던전을 돌아다니며 싸워도 좋지만, 다른 파티와 싸우면 안 된다.

몬스터의 전리품은 물론이고, 곳곳에 숨겨둔 보물을 가져오면 그에 따른 점수를 매길 것이며, 상위 득점 파티에게는 상점을 주겠다.

제한 시간이 지나면 출구 지점에서 신호를 보낼 테니, 곧장 그리로 모여라. 늦으면 감점이다 등등.

이미 한번 이오나에게 들었던 내용인데다가, H&A시절에 지겹게 돌았던 던전 실습의 규칙이라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파티원들을 데리고 히든피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느냐인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던 것도 잠시.

어느새 모든 설명이 끝났는지, 제이슨과 자리를 바꿔 앞으로 나선 이오나.

그런 이오나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허억….”

“설마 텔레포트 게이트를 혼자 열려는 건가? 전략 마법인데?”

“이게 신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로드급 뱀파이어…?”

학과 가릴 것 없이 경악하는 학생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악의도 없는, 단순한 마나의 압박이었기에 마나량이 상당한 나는 조금 더 버틸 만 했지만….

그래도 순간 압도당한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해 보니, 이오나가 제대로 힘을 쓰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인가.

게임에서는 그냥 대사 후에 얍 하고 게이트를 만들어내길래,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직접 보니 알겠다.

대마법사인 교장을 제외하면, 아카데미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

평소와 달리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은 이오나가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그 손짓에 따라 막대한 마나가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어서 허공에 생겨난 작은 붉은색 빛무리.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불똥을 토해내던 빛은 순식간에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큼직한 타원형으로 고정되었다.

…색이 빨간색이라 그런 걸까. 무슨 지옥으로 이어진 게이트라도 보는 것 같네.

하지만 핏빛 타원 안쪽으로 비치는 풍경은 불길이 강물처럼 흐르고, 몬스터가 떼를 지어 어슬렁거리는 곳이 아닌, 여러 사람이 오가는 작은 기지 같은 곳이었다.

저기서 아카데미의 직원들이 상주하며 주기적으로 던전을 관리하는 거겠지.

학생들의 얼빠진 표정에도 이오나는 평소처럼 잔뜩 우쭐한 자세를 취했다.

“뭐야? 뭐야? 왜 다들 멍하니 있어! 나 대단했지? 응? 그렇지? 그럼 빨리 박수나 쳐줘! 그리고 이오나 교수님 대단해요! 하고 외치면서 들어가도록!”

“““…….”””

학생들의 경이로움이 떨떠름함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다들 한마디씩 이오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며 넘어간 게이트.

던전을 앞에 두고 만난 파티원은…좋은 의미로 내 예상을 벗어났다.

우선 기사학부의 빈센트 그레나딘.

전형적인 무가?家 출신 기사로, 실력은 좋지만 실전에 약해, 그 실력을 제대로 뽐내지 못하는 녀석이다.

내가 실전에 강한 타입이니, 한명쯤은 실전에 약한 타입이 올 거라는 예상이 맞았던 셈.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한데 묶은 머리카락은 태양 빛을 닮은 금색으로 반짝였으며.

미려한 이목구비는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지막으로 교복 대신 하얀 사제복을 걸치고, 크게 부풀어 오른 가슴팍에 아카데미의 로고를 붙여둔 여인.

헬레나.

나와 같은 파티가 된 신성학부의 학생이며….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성녀 후보이기도 하다.

어떻게 정의로운 광명 교단과 접촉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간단하게 자기 소개라도 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

그보다 한발 먼저 다가온 헬레나가 금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형제님.”

“엇, 네. 무슨 일입니까 사제님.”

“혹시 싸움 좀 하시나요?”

“???”

왜 갑자기 시비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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