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던전 실습(4)
* * *
“혹시 카를라의 마나 코어를 그대로 남겨두었나요 얀델?”
그 말을 들은 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엘리샤에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샤 또한 굳이 내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던 건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을 뿐 이후에는 평소처럼 나를 대했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신경 쓰이더라고.
“끄아아아….”
자기 전에 마법진 그리는 연습을 하던 도중.
느닷없이 엘리샤의 다 안다는 듯한 목소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들렸던 걸까.
“쮸읍…응? 무슨 일이세요 주인님? 혹시 이빨이 스쳤나요?”
책상 밑에 있던 카를라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런 카를라의 백금색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냐. 카를라 너는 잘하고 있어. 그나저나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앗! 맡겨주세요 주인님!”
다시 쏘옥 책상 밑으로 사라지는 카를라.
쮸왑쮸왑.
뷰르르르릇.
하던 일을 마무리한 카를라가 책상 밑에서 기어 나오며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
“후아….”
“수고했어. 근데 거기 털 묻었다.”
“아, 정말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카를라는 꼼꼼하게 뒤처리까지 하고서야 내 뒤에 바짝 붙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물조물.
방과 후부터 계속 책상 앞에 앉아있느라 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순식간에 풀어지며 간질간질한 쾌감이 올라온다.
“으어어…?”
그다지 강하게 주무르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나 시원할 줄이야.
안 그래도 막 끝낸 직후라 조금 나른해졌던 몸이 추욱 늘어지며, 카를라의 손길에 전신을 맡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와…이거 진짜 좋네. 왜 이렇게 안마를 잘해? 전에 해본 적이 있었던 건 아닐 텐데.”
“헤헤. 저도 한창 마법진 공부할 때는 매일 어깨가 결렸거든요. 그래서 시종들한테 자주 마사지 받아봤는데…그 흉내죠 흉내.”
그리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카를라.
도저히 흉내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뭐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깨를 꾹꾹 누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과 뒤통수에 짓눌리는 카를라의 마음씨를 만끽하며 잠깐 쉬는 것도 잠시.
한껏 늘어진 내 귓가에 나긋나긋한 카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역시 엘리샤가 신경 쓰이시는 건가요?”
“응…뭐 그렇지.”
카를라의 마나 코어에 대해 눈치챈 건 그렇다 치자.
애초에 그렇게 열심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노예는 마나와 오러를 쓰지 못하게 코어를 부순다는 사회적 통념에 전적으로 의존한 비밀이었으니, 누군가 본격적으로 의심하는 순간 금세 꺠달을 수 있었으리라.
다만 그 뒤에 이어진 엘리샤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카를라의 마나 코어가 그대로인 걸 알고도 가만히 있는 거지?
막 카를라랑 대련하게 해달라고 조르거나, 몇 배의 금액을 지불할 테니 카를라를 자기에게 팔라거나.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흐응. 역시 그렇군요. 얀델. 당신이 조금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같은 말을 하며 평소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영입하려 들었을 뿐, 따로 뭘 요구하진 않았다.
지금껏 내가 모르는 부분에서 실드를 쳐준 것도 그렇고, 카를라의 마나 코어도 그렇고.
내게 마음의 빚을 지우려던 속셈이라면…그건 정말 성공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겠네.
당장 지금도 엘리샤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고 있잖은가.
하지만 카를라는 조금 다른 부분에 주안점을 뒀나 보다.
“으음…가슴은 저랑 비슷하거나 제가 조금 더 클 텐데…역시 허벅지인가요? 엘프들은 어릴 때 숲에서 자주 뛰어놀아서 그렇게 허벅지가 탄탄하다는데. 지금이라도 운동을 해야….”
“뭐?”
“아 허벅지가 아닌가요? 그럼 그 롤빵 머리? 관리하기가 힘들지만…가끔 써먹는 정도라면 저도 머리카락은 충분히 기니 해드릴 수 있어요!”
“아니 갑자기 뭔 소리야?”
“엘리샤가 신경 쓰이신다면서요.”
“…….”
신경 쓰인다는 게 그런 뜻은 아닌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내 바로 뒤에 서 있는 카를라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정작 카를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루비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의미 아니었나요?”
“아니었는데…?”
“그럼 저 엘리샤처럼 안 꾸며도 돼요?”
“말로 내뱉기 참 부끄럽지만, 그래도 눈 딱 감고 말하자면 난 있는 그대로의 카를라가 좋은데?”
“허억…!”
서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문답 끝에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카를라.
“주, 주인님…방금 그거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부끄러워.”
“그거 말고 다음 말이요…!”
“그니까 그게 부끄럽다니까?”
나도 모르게 흐름을 타고 내뱉은 거라 각 잡고 말하면 좀 그렇다고!
하지만 카를라는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내 뒤통수에 자신의 가슴을 꾹꾹 비벼대며 말했다.
“저번에 수녀 코스프레는 좋다고 하셨으면서, 왜 엘리샤 코스프레는 안 돼요? 왜? 저 모르겠어요…역시 수녀 코스프레 쪽도 안 하는 게 좋으신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
치사하게 이런 걸로 딜을 걸어?
뿔이 솟아난다고 해야 하나, 심술이 끓어오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잔뜩 뭐라 해줄 생각으로 카를라를 돌아보았으나.
“흐히히….”
무슨 위험한 약이라도 한 것처럼 연신 헤실대는 모습에 김이 쏙 빠졌다.
“…마법진 공부나 마저 할까?”
“안 말해주시는 건가요…?”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시무룩해진 카를라.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치 끝나면 자기 전까지 계속 말해 줄게.”
“헉! 내일 던전 들어가야 하니 오늘은 빨리 자야 한다고 밤 시중 없는 날이라 하셨잖아요!”
“공부를 빨리 끝내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남겠지.”
“…어디 모르는 부분이라도 있나요? 막힌 부분이 있으면 제게 바로 말해주세요!”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카를라. 어째 최근에 본인이 하는 빛나는 사자 단검 연구 때보다 더 의욕이 넘치는 것 같다.
조금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그린 마법진을 몇 개 보여주었다.
“일단 내가 배운 마법의 마법진은 전부 외웠어.”
“…그걸 벌써 다 외우셨다고요? 마법진은 기본적으로는 암기에 가까운 거라 다 외우셨다면 막힐 부분이 없으실 텐데요?”
마법진은 그림으로 그리는 영창 같은 거다.
영창이 마법의 위력을 높여준다면, 마법진은 마법을 조금 더 정교하거나 변칙적으로 쓸 수 있게 도와주는 요소다
내가 처음 기초 마법을 배울 때 손가락으로 원을 그린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누구나 닫힌 원을 보면 그 안쪽에 집중하게 되는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허공에 불이 피어오른다는 것보다, 원 안에 불이 피어오른다는 쪽이 훨씬 상상하기 쉽고.
대충 그런 식으로 사람이 무심코 반응하는 시각적 요소를 마법에 접목시킨 게 바로 마법진이다.
네모는 딱딱한 느낌을 주니, 흙 계열 마법에 주로 네모네모한 도형을 집어넣고.
곡선이나 원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니 물이나 바람 계열 마법에는 동글동글한 도형을 집어넣는다는 느낌?
물론 깊게 파고들면 같은 곡선이라도 거친 선이니, 부드러운 선이니 하며 이래저래 복잡해지지만….
결국 사람의 공통적인 무의식에 관련된 것이니 어느 정도는 틀이 잡혀있다.
그걸 다 외우고 적재적소로 조합할 수 있다면 절반은 가는 거고.
나머지 절반은 공통적인 무의식의 기호가 아닌, 자신만의 기호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데…거기까진 아직 좀 갈 길이 멀다.
아무튼 마법진은 어마어마한 암기를 필요로 하지만, 내겐 뛰어난 기억력 특성이 있잖은가.
H&A를 플레이하며 보았던 무수한 마법진은 물론, 카를라와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에게 배운 마법진에 대한 모든 걸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카를라가 놀랄 법도 하지만…내가 막힌 부분은 전혀 다른 부분이다.
“이거 봐.”
한쪽 손을 전방을 향해 뻗으며, 간단한 영창과 함께 파이어 볼을 시전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손 위에 전개되는 붉은 마법진.
원 안에 갇힌 기하학적인 도형 몇 개. 그 위로 주먹만 한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이게 왜요 주인님?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것 같은데요? 속도도 빨랐구요.”
“그렇겠지.”
시스템 보정 덕에 제대로 쓸 줄만 안다면 일정한 수준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이거 너무 알기 쉽지 않아? 조금만 열심히 공부한 마법사는 전부 내가 무슨 마법 쓰려는지 알아챌 것 같은데?”
“아하? 맞아요. 가끔 상대의 마법진만 보고 무슨 마법을 쓰려는지 간파하는 사람도 있죠. 저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고요.”
“맞아. 그래서 기호 몇 개를 공통 기호가 아니라 나만 아는 상징으로 바꿔서 암호화해보려고 했는데…쉽지 않더라고.”
“어쩔 수 없죠. 정해진 인상을 주는 특징적인 도형이면서, 다른 사람은 그 본질이 뭔지 모르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학파나 마탑의 비전처럼 내려오기도 할 정도예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카를라가 가슴을 쭈욱 펼치더니 짐짓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제가 누구에요! 주인님의 충실한 노예 카를라 린델하이트잖아요? 린델 하이트 가문에서 쓰던 모든 마법진과 그 해석법을 알려드릴게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거라 지금은 저밖에 모르는 비전 중의 비전이에요!”
“오오…!”
그런 게 있다고?
맨땅에 헤딩할 필요 없이, 우선 린델하이트 가문의 유산을 계승 받을 수 있다는 소리잖아?
그대로 쓰건, 거기서 영감을 받아 나만의 기호를 만들 건, 어느 쪽이든 지금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사실 H&A시절에 본 몇몇 캐릭터의 마법진에도 그런 특수한 문양이 있었는데…그건 해석법을 모르니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고 있는 것에 가까웠거든.
재차 카를라를 사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두근대는 마음으로 뒤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자니.
“아, 지금은 곤란해요.”
“왜?!”
이렇게까지 기대하게 만들고 여기서 안 알랴줌일라고?
억울함을 담아 노려보자, 카를라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말했잖아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거라고.”
그리고는 자신의 입술을 쭈욱 내밀며 톡톡 두드리기까지.
카를라의 노골적인 어필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한 번이면 돼?”
“상징 하나당 한 번으로 부탁드릴게요.”
안 될 거 없지.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다음 날.
드디어 던전 실습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