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던전 실습(3)
* * *
이오나에게 카를라를 던전에 데려갈 수 있는지 물어보자, 대체 무엇을 상상한 걸까.
주변의 학생들이 경악과 경멸이 섞인 표정을 보내왔다.
괜찮다. 저것도 어차피 엘리샤에게 화살이 튈 테니까.
하지만.
“…….”
의심의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리샤.
이건 좀 곤란하네.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언제쯤 말을 꺼내 볼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실습 일정을 알린 이오나가 강의실을 나가자마자 움직이는 엘리샤.
자신의 추종자들을 뿌리치고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퍽 위압적이다.
“얀델. 잠깐 저랑 대화 좀 하죠.”
“네? 아…글렌시엘님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오늘은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
“당신 친구 없는 거 다 알거든요?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씁….”
내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엘리샤.
이 가녀린 손길을 쳐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나, 그랬다가는 진짜 싸우자는 소리가 되겠지.
그렇게까지 대립각을 세울 생각은 없었기에, 그대로 엘리샤에게 끌려가는 것도 잠시.
“뭘 멍하니 있는 거죠? 당신도 따라오세요.”
“아앗…넹….”
엘리샤는 그리 말하며, 남은 한손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카를라를 낚아챘다.
그렇게 엘리샤가 양손에 각각 나와 카를라를 움켜쥐고 복도를 가로지르자, 그놈의 주변이 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요?”
“아침에 저 평민이 자기 노예를 던전에 데려가도 되냐고 교실에서 물었잖아. 그거 때문인 거 아냐?”
“아하? 얀델이라는 자도 참 융통성이 없네요. 이럴 때는 척하면 착하고 눈치껏 굴어서 엘리샤님의 체면을 지켜줘야 하는 법인데.”
“뭐어…저 평민도 엘리샤님에게 불만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카를라를 던전에 데려가려는 것도 엘리샤의 지령 정도로 이해하고 있나 보네.
방금 건 내 자그마한 반항 같은 거고.
솔직히 이 오해의 흐름이 내게 편한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걱정되기도 한다.
이미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흥미 위주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이는 진작에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는 소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바로 옆에 엘리샤가 있다는 점이겠지.
내게도 들린 대화다. 감각이 예민한 하이엘프라면 더 잘 들렸으리라.
하지만 엘리샤는 가볍게 코웃음 칠뿐, 따로 저들에게 무어라 쏘아붙이진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 약간 투정을 부렸지만.
“흥! 제가 가만히 있으니 정말 제멋대로 떠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저런 사실무근의 이야기가 떠도는 건지.”
“어머? 어디서긴요.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민한 자들의, 시꺼먼 속내가 속삭이는 것이지요.”
꽤나 냉소적인 반응이네.
정작 본인도 아직까지 카를라를 향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아니, 그래서 더더욱 냉소적으로 구는 건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허면 글렌시엘님께서 한번 따끔하게 일갈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젠 다들 헛소문을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정말요? 정말 제가 그래도 될런지요?”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엘리샤가 내 허락을 맡으려는 건 아닐 테니, 분명 다른 뜻이 있는 거겠지.
근데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결국 엘리샤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정말로 제가 당신 대신 질시 어린 소문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답니다.”
“…알고 있었어요?”
“흐응? 절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처음 몇 번이라면 모를까, 한 달 넘게 이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는지요?”
“…….”
하기야.
사실 지금까지 엘리샤가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이네요.”
“네. 처음에야 엘리샤님에게 이 정도는 별거 아닌 헛소문이 되리라 여겨 슬쩍 떠넘긴 게 사실이지만…지금은 그런 수준을 벗어났잖아요. 이젠 엘리샤님이 카를라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소문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에. 하지만 만약 제가 이 헛소문을 부정한다면? 그럼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얀델.”
“…엘리샤님이 악의적인 중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대신 당신이 모든 질투를 온몸으로 받아내야겠지요.”
“…….”
뭐야 그건.
마치…다 알면서도 나를 지켜주려는 것 같잖아.
“후후. 좋네요 그 표정. 언제나 제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척만 하던 당신이 이렇게나 속내를 내비칠 줄이야.”
엘리샤가 한차례 쿡쿡대며 웃고서야 말을 이었다.
“얀델. 보통 평민은 당신처럼 당당하게 굴지 못한답니다. 아무리 재능이 대단하더라도,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까지 아카데미에서 지켜주진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굳이 비굴하게 굴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무언가 믿는 게 있다는 소리 아닐까요? 제가 지금껏 본 당신의 성격이라면 다른 누군가는 아닌 것 같고…역시 졸업 후의 당신 자신이죠?”
“…….”
이걸 들키네.
하기야. 나는 H&A를 좀 열심히 파고들었다는 것 말고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반면 엘리샤는 어릴 때부터 상류층에서 살아오며, 볼꼴 못 볼 꼴을 전부 본 사람일 테고.
마법사가 정치인은 아니라지만, 애초에 정치라는 것 자체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이 여럿 모이고, 이권이 모이면 생겨나는 게 정치질 아니겠는가.
다만 이런 쪽으로 얄팍한 내 속내가 들켰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는 없다.
엘리샤가 상상 이상으로 호의적인 건 놀랍지만…그렇다고 내 계획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이마저도 대충 눈치챈 걸까. 엘리샤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의연한 태도. 멋있네요.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부분을 조금 알려드리는 것도 괜찮겠죠.”
그리 말한 엘리샤가 이제야 나와 카를라의 손목을 놓아주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부채를 하나 펼쳐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아마 얀델 당신은 1학년 A반 전체가 적으로 돌아선다 해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네. 뭐….”
“하지만 마법학부 전체는 어떨까요?”
“???”
“몇몇 교수는 별거 아닌 이유로 당신에게 트집을 잡고, 선배들은 허구한 날 찾아와 당신에게 지도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시비를 걸 수도 있죠.”
“아카데미 교칙에 따르면….”
“예에. 그 아카데미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말이에요.”
“…….”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카를라 언…크흠. 카를라는 마법학부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답니다. 그런 사람을 보란 듯이 노예로 데리고 다니는데, 요 한 달간 아무 일도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나요?”
그 말에 잠자코 있던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가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요?”
“카를라. 당신은 언제나 그랬죠. 너무나도 사랑받는 게 당연해서 그런지,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모르고 있어요.”
와락 일그러지는 카를라의 얼굴.
“그럼…그럼 제가 사교도로 몰려 아카데미에서 쫒겨날 때는 왜…!”
“그야 다른 무엇도 아니고 사교도잖아요. 까딱 잘못하면 자기 혼자가 아니라 집안 전체가 무너지는데, 누가 여자 하나를 위해 거기까지 하겠어요.”
“아….”
그제야 좀 이해되는지 찌푸려졌던 카를라의 미간이 다시 매끈매끈해졌다.
이를 본 엘리샤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직도 카를라를 좋게 보는 사람도 많고, 절벽 위의 꽃에서 단순한 노예가 되어버린 여인에게 그릇된 욕망을 품는 자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한 번이라도 당신 곁에 온 적 있었나요?”
“…없었네요.”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설령 누가 노예를 찔러 죽이더라도 그건 살인죄가 아니라 재물 손괴죄에 해당한다.
칼로 찌르는 게 그 정도인데, 잠깐 평민인 주인 몰래 ‘빌려 쓰는’ 정도는 어떻겠는가.
그냥 위자료 같은 거나 좀 물어주고 말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을 터.
물론, 그런 놈들의 생각과 달리 카를라의 마나 코어는 멀쩡하기에 역으로 노릇하게 구워질 수 있지만…아무런 헤프닝조차 없다는 건 확실히 특이하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엘리샤 덕분이겠지.
평민인 내 물건을 건드리는 것과, 하이엘프이자 실반 마탑의 후계자인 엘리샤의 물건을 건드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괴롭혀도 내가 괴롭힌다. 그러니 다른 놈들은 손대지 마라.
대충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내 생각보다 훨씬 엘리샤 실드의 성능이 대단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제게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글렌시엘님…?”
“간단하답니다. 지금의 당신에게 주변의 질시와 카를라를 향한 욕망은 유의미한 걸림돌이 되겠죠. 하지만 제게 이 정도는 늘 함께 해왔던 별거 아닌 견제일 뿐이랍니다.”
“그렇다고 글렌시엘님이 저 대신 비난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아뇨. 이유야 있지요.”
“네? 있어요?”
내 어벙한 물음에 엘리샤가 잠시 걸음을 멈춰서더니,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요. 얀델 당신이 제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잖아요? 비공식적 후원이라고 생각해도 좋답니다?”
푸른색 롤빵 머리를 흩날리며 오호호호! 하고 웃는 엘리샤.
…조금 멋있네.
“그래요. 이건 카를라를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밑에 무릎 꿇리기 위한 투자…!”
아, 취소.
하나도 안 멋있다.
역시 엘리샤도 사심으로 가득했던 거잖아!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짓던 것도 잠시. 다시금 진지한 표정을 지은 엘리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얀델 당신이 카를라를 던전에 데리고 가려는 진의를 물어야겠어요.”
“…네?”
“제겐 중요한 일이랍니다. 대체 왜 카를라를 던전으로 데려가려고 한 거죠 얀델? 마나 코어가 없는 카를라는 전력이 되지 못할 텐데….”
“어…그게 말이죠.”
“설마 여차할 때 미끼로 쓰려고 한 건가요? 그건 곤란해요. 예에. 정말 곤란하답니다. 그래서야 실수로 카를라가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요.”
“에이 설마요.”
“그래요. 설마 그럴 리가 없죠. 제가 본 당신은 그렇게까지 냉혈한이 아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거기에 주변에서 멋대로 짐작하는 것처럼 던전에서 카를라와 그, 그렇고 그런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겠죠. 당신은 최소한의 분별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으음….”
사실 이미 게프 시의 던전에서 한번 했던 적이 있던지라, 여기에는 나도 모르게 애매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이를 눈치챈 걸까.
거기까지 말한 엘리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내 귓가 쪽에 가까이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속삭이기라도 할 것처럼.
역시 조금 전의 그 반응은 너무 노골적이었나.
대략적인 건 알아도, 자세한 부분에서는 전체 이용가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엘리샤가 어떻게 나올런지….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얌전히 귀를 내주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속삭임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혹시 카를라의 마나 코어를 그대로 남겨두었나요 얀델?”
“…….”
어, 음.
이쪽으로 훅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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