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얼마야! 얼마면 돼!(4)
* * *
“미, 미안! 못 들은 걸로 할게! 그…이런 건 조금 그렇다고 생각해…!”
뭐?
왜 거절당한 거지?
“뭐가 문제죠? 금액이 부족했나요?”
일단 인벤토리에서 300골드를 더 꺼냈다.
도합 600골드.
이걸 매달 준다면 1년에 7,200골드고, 페이의 남은 아카데미 생활 3년 동안 총합 21,600 골드를 지원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를라를 낙찰받을 때도 2만 골드가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허윽….”
순식간에 2배로 늘어난 골드 앞에서 현기증이라도 난 것처럼 비틀거리는 페이.
하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다잡더니,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 금액의 문제가 아니야! …후배님이 나한테 매달 600골드씩이나 낼 생각이 있다는 건 놀랍지만…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요. 얼마나 필요한 거죠? 아니면 돈 말고 따로 원하는 게 있기라도 한가요?”
“정말로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의외로 단호한 페이의 태도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어차피 골드에는 한참 여유가 있지 않던가.
“후우…어쩔 수 없죠. 한 달에 1,000골드! 이 이상은 욕심이 과하다는 거 선배도 알죠?”
“처, 천 골드?! 무서워! 너무 무섭잖아…! 대체 천 골드씩이나 주고 나한테 뭘 시킬 생각인 거야…?!”
뭐긴. 당연히 연성이지.
각종 포션부터 시작해, 던전 공략에 필요한 잡다한 소모품 일체를 만들어 달라 할 예정이다.
페이가 이런 조그만 공방에서 빌빌대고 있긴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상급 포션 수준까지는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개인 연구 끝에 본래 목적이던 연금술 주조에 성공한다면, 그때부턴 장비도 왕창 맡길 생각이고.
처음에야 품질이 조금 부족하지만, 숙련도가 쌓이면 장인급 장비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거든.
장인급 장비는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에 한 달에 1,000골드를 후원한다고 해도 금세 본전은 뽑고도 남으리라.
그렇게 이것저것 연성하며 언젠가 연금술의 진리에 닿는 순간.
그때는 무려 현자의 돌을 박아 넣은 스태프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사실상 내가 이끌 파티의 모든 생산 계통을 담당하게끔 만들 계획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정작 페이가 이렇게 나오면 전부 백지로 돌아갈 계획이기도 하고.
어째서인지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은 채, 덜덜 떠는 페이를 보고 있자니…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네.
내가 왜 이런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거지?
이 돈 안 받으면 너 죽는다니까?!
결국 ‘더 많은 돈.’ 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못 이겨, 페이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얼마야! 얼마면 돼요!”
“으게엑!”
내게 붙잡힌 채 무력하게 앞뒤로 흔들리는 페이.
안 그래도 개털 같던 머리카락이 한층 더 산발이 되는 것은 물론, 팔로도 미처 가리지 못하는 가슴이 역동적으로 출렁였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면 내 전속이 될 거냐고요!”
“도,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후배님…!”
뭐…?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그럴 리 없잖아!
그럼 인벤토리의 잔액만 믿고, 돈지랄 하려던 내가 뭐가 되는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오기에 몸을 맡긴 채, 옆에 있던 카를라를 돌아보았다.
“카를라!”
“헙! 네, 주인님!”
헤벌레한 표정을 짓던 카를라가 황급히 입가의 침을 닦았다.
마치 흥미진진한 아침 드라마라도 보던 사람 같은 표정.
뭐야…?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너도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어…그렇죠. 돈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에요.”
이럴 수가…!
믿었던 카를라마저 그리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배신감과 우울함에 그만 눈물이 핑 도는 것도 잠시.
이내 카를라가 활짝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왜냐면 주인님이 세상의 전부거든요! 골드 따위랑은 비교할 수도 없죠!”
“카, 카를라아…!”
밀려오는 감동에 흔들고 있던 페이를 적당히 내팽개치고, “그엑!” 그대로 카를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그렇게 이쁜 말만 하래! 어! 누가!”
“헤헤….”
“턱도 이리 대!”
“여기요!”
턱 밑까지 정성을 담아 간질여주자,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는 카를라.
“히익…저렇게 조교 되려면 대체 무슨 짓을 당해야…나, 나도 저렇게 될 뻔한 거야…?”
뒤에서 페이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카를라의 턱을 긁어주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별거 아닌 내용이겠지 뭐.
그렇게 한참을 카를라를 귀여워해 주며 과열됐던 머리를 식히던 도중.
“주인님 주인님.”
방실대던 카를라가 턱을 뒤로 빼며 내게 물었다.
“그렇게 다짜고짜 후원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조건을 정확히 명시해주셔야죠.”
“응? 그러지 않았어?”
“단순히 마음대로 쓰되, 주인님이 원하는 걸 우선시한다는 말만 했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가슴께 앞에서 검지를 교차시켜 X자를 만든 카를라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께서 정확히 페이 양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하셨나요?”
“연금술사한테 연성 말고 뭘 더 바라?”
던전에서 탱커를 맡아달라고 할 수도 없잖은가.
“헤…? 원하는 걸 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만들어 달라는 거였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이.
뭘 그리 의아해하는 건지. 그게 그거 아닌가?
“으음. 아직도 눈치 못 채신 것 같네요. 그럼 주인님. 가장 먼저 페이 양에게 의뢰할 일이 어떤 거였나요?”
“곧 있을 던전 실습 때 쓸 보조 계열 포션 제작이지. 회복 계열은 미리 사둔 게 넉넉하지만, 보조 계열은 얼마 없거든. 나 혼자라면 모를까, 스크롤까지 합쳐도 파티원 전원이 쓸 양은 안 나와.”
“…제게 했던 짓을 파티원 분들에게도 할 생각이신가요?”
“뭐, 효과는 좋았잖아?”
어깨를 으쓱이자,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카를라.
어허! 스피드런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거야!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 후배님. 나한테 포션을 만들게 할 생각이었어…?”
“네. 어차피 지금 당장 페이 선배가 만들 수 있는 건 포션 정도잖아요. 한 달 정도 지나면 1학년이라도 A반은 던전 실습 간다고 하던데 그때 써먹으려고 했죠.”
“아기가 아니라?”
“……?”
인체 연성 잘못하면 나가리 되는 건 이쪽 세상도 똑같지 않나?
그래서 H&A에 현자의 돌은 나와도 호문쿨루스는 안 나오던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중. 연성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설마 내 후원 제안을 그런 식…그러니까 전생에서 말하던 스폰 제안 정도로 생각했다는 건가?
“아니, 대체 어디가 그렇게 들렸던 건데요?!”
“흐악!”
나도 모르게 빼액 소리를 지르자 겁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오들오들 떠는 페이였으나.
이내 용기를 쥐어짠 표정으로 그리 생각한 이유를 하나씩 짚어주기 시작했다.
“그…그치만 후배님 내 공방 앞에서 시녀랑 머, 멍멍이 플레이하려고 했잖아! 바깥인데! ”
“그 오해는 풀린 거 아니었어요? 단순히 카를라가 페이 선배에게 심각한 하자가 있을 수 있다며 다시 생각해보라던 걸 조용히 시키려고 그런 거예요!”
“보, 보통은 그냥 설득하거나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지 않아…? 그으…이제 보니 시녀분이 후배님 노예인 것 같은데 강제 명령 같은 것도 가능하잖아.”
“그렇긴 한데….”
가능하면 카를라에게는 강제 명령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설명하는 것은 조금 낯간지러워 잠시 머뭇댔더니.
“그거 봐…! 후배님은 그냥 어,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을 뿐이잖아! 변태! 후배님은 변태야!”
“큭…! 그렇다고 해도 제가 페이 선배한테 그런 의미의 후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내 가슴을 그렇게 빤히 쳐다봤으면서…!”
“그건 어쩔 수 없죠! 본능이에요 본능! 제가 아니라 말도 안 되게 야한 가슴을 타고난 페이 선배가 잘못한 거예요! 전 정말로 선배의 연금술이 필요해서 온 건데!”
진심을 담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어째서인지 우울한 표정을 짓는 페이.
“그런 거짓말은…안 해도 괜찮아 후배님.”
“아뇨 거짓말이 아니라….”
“나, 나도 알아…내가 말 잘 못 하는 거…방금도 알아봐 준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막 이것저것 말했는데…후배님 하나도 이해 못했지?”
“어…음….”
뭔 소린지 못 알아들은 건 사실이다. 내게 연금술에 관한 지식이 없던 것도 있지만…무엇보다 너무 횡설수설했으니까.
“무엇보다…내 연구를 후배님에게 처음 보여준 게 아냐…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는걸? 하, 하지만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포션이나 만들라고 했어….”
그리 말하는 페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물기가 묻어 나왔다.
“시, 심지어 얼마 전에는 외부에서 온 손님한테 정말로 그런 후원 제안까지 받아서…당연히 거절했지만…그래도 이젠 아무도 내 연구에 관심이 없구나…그런 생각이 들어서…흐윽.”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다.
지금 페이가 자기도 모르게 털어놓은 속내. 결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털어놓을 내용이 아닌 이 속내가.
페이의 자살로 이어지는 원인이리라.
“후우….”
여기서는 지금까지처럼 막무가내로 아무튼 후원! 아무튼 더 큰 돈! 을 외쳐선 안 된다. 조금 더 신중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사실 페이 선배가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애초에 저는 연금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얼마 없거든요.”
“그, 그럼! 그럼…나한테 왜 후원하겠다고 한 거야…? 솔직하게 말해줘…정말 그런 이유가 아니야?”
필사적이기까지 한 태도.
잠시 처음으로 페이 루트의 엔딩을 보았을 때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자존감 하나 없던 여인이 어떻게 만능이라 불리는 대 연금술사가 되었는지.
그 모든 장면을 뛰어난 기억력 특성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멋있잖아요.”
“응…?”
“제가 연금술은 잘 모르지만…그 본질이 변화라는 건 잘 알아요.”
H&A에서 직접 연금술을 쓰면 미니 게임 형식으로 연성을 하기에, 현실적인 연금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지만…그래도 한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추출하고 정제하여 변화시킨다.
바로 이 세 공정이 연금술의 전부라는 것.
“과거. 위대한 연금술사였던 파라켈수스가 만들었다는 현자의 돌은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고, 어떤 반응도 일으킬 수 있는 만능 물질이었다고 하죠.”
게임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고금 제일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과거에 존재했을 최초의 대 연금술사는 연금술의 본질이 변화에 있음을 주장했다.
그렇기에 조건만 맞아떨어진다면 연금술은 만능이 될 수 있다고.
“처음부터 완성된 무구는 말도 안 된다고요? 애초에 그 무구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철을 녹이고, 두드리고 날을 갈아서? 나무를 깎고, 촉매를 달고, 마법을 걸어서?”
한차례 운을 떼고는 고개를 저었다.
“검도, 스태프도 결국 각자의 재료를 특정한 방법으로 ‘변화’ 시켜서 만들었을 뿐이잖아요. 재료와 기술만 받쳐준다면 연금술로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만능의 연금술이라니. 얼마나 멋있어요.”
“하, 하지만…그걸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나는 적당히 성적만 유지하고 있지, 별다른 성과를 낸 적이 없어…지금껏 아무런 관심이나 후원도 받지 못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거고….”
그렇겠지. 다만, 나는 안다.
페이가 장비 연성을 넘어, 언젠가 현자의 돌까지 연성해낸다는 사실을.
물론 그 길이 쉽지는 않다. 페이 루트의 서브 퀘스트는 제법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일러스트를 기억하는 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믿어요.”
“…뭐?”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전 페이 선배가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페이에게 악수라도 하듯 손을 건넸다.
“그러니까 이건 투자에요. 지금 제 후원을 받으면 페이 선배는 평생 제 전속이 되어, 제가 만들어달라는 물건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해요. 설령 대 연금술사가 되더라도 말이죠.”
“내가…대 연금술사…?”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는 페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했다.
“할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 손을 붙잡은 페이.
그 자그마한 손을 꼭 쥔 채,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 선택했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응…나, 나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응!”
반쯤 울먹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
그 기세가 너무 좋았던 탓일까.
쭐렁 쭐렁.
고개를 따라 격하게 흔들리는 머리보다도 큰 젖가슴.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
“선배. 혹시….”
“이, 이건 얼마를 후원하든 안 되니까…!”
몇 번 그랬던 것처럼 반사적으로 자신을 끌어안아 양팔로 가슴을 가리려던 페이였으나.
지금은 참 고맙게도 나와 악수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그리고 악수란 한쪽만 푼다고 풀리는 게 아닌 법.
물컹.
“오.”
개꿀.
내 손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페이가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네.
진리는 여기에 있었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