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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43화 (43/230)

〈 43화 〉 얼마야! 얼마면 돼!

* * *

원소의 이해, 강화 마법 개론, 생활 마법의 특이성.

엘리샤의 제안을 거절한 뒤. 돌아온 강의실에서 들은 나머지 수업의 강의명이다.

다행히 이오나의 수업과 달리 셋 모두 상식적인 수업이었고.

뭐어…내용이야 무척이나 판타지스러웠으나, 적어도 이오나처럼 다짜고짜 서로 죽여라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A반이라는 걸 감안했는지 교수님들이 하나같이 기본적인 지식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모르는 건 나중에 카를라에게 따로 물어봐야겠네.

다른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다 들어왔다면, 내겐 언제나 붙어있는 가정교사가 있는 셈이니까.

지금은 좀 부족해도 얼마 안 가서 전부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진짜 카를라가 있어서 다행이네.

방과 후. 삼삼오오 모여 동아리실로 향하거나, 곧장 기숙사로 떠나는 학생들.

그리고 길 안내를 위해 앞장서서 걷던 카를라의 엉덩이.

잠시 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슬쩍 손을 뻗었다.

스윽.

“흣?!”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흠칫한 카를라. 하지만 그런 카를라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몰래 계속해서 손 놀렸다.

스윽 스윽.

내가 교복을 입었듯 시종복을 입은 카를라.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정숙한 디자인이었지만…나는 안다.

이 옷 너머의 몸뚱이가 얼마나 야한지.

스윽 스윽 스윽.

매끈한 천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엉덩이의 윤곽. 그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이 손바닥 한가득 느껴진다.

“으으…주, 주인님?”

“왜?”

“제가 뭐 잘못했나요…?”

잠시 멈춰 서더니,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카를라.

대체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젠 굳이 아카데미에서 이러실 필요 없는데 왜….”

“아.”

평범하게 생각하면 이거 그냥 사람 많은 장소에서 희롱하는 거였지.

요즘 들어 카를라를 여기저기 마음대로 주무른 것도 있고, 엘리샤와의 일 때문에 카를라를 대놓고 괴롭힌 척하다 보니 조금 브레이크가 망가졌나 보다.

일단 카를라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시켜주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지.”

“네? 그래요?”

“응. 이번 이오나 교수님의 수업에서 카를라 너한테 배운 게 엄청 도움 됐거든.”

“하급 마법사 상대로나 통하는 대응법이지만…그래도 주인님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순식간에 밝아진 카를라의 얼굴.

그리고는 은근슬쩍 엉덩이를 뒤로 내밀길래,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토닥여 주었다.

“헤헤….”

카를라가 그제야 만족스레 웃으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금 재촉했다.

그 뒤를 따라가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카를라에게 물었다.

“카를라.”

“네 주인님.”

“를라를라카를라.”

“어어…인님인님주인님…?”

이걸 받아주네.

피식 웃으며 하려던 말을 이어 말했다.

“근데 실반 마탑의 후원을 받으면 무슨 혜택이 있어? 아, 여전히 받을 생각은 없지만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으음. 주인님도 린델하이트 가문과 실반 마탑의 영역이 겹쳤었다는 건 아시죠?”

“그렇지.”

나도 귀가 있으니 이 세상에 떨어지고 3년간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다.

지금은 처형당한 카를라의 아버지가 원소마법의 극에 달한 대마법사였고.

그 수준은 같은 대마법사이자 원소마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실반 마탑의 탑주보다 한발 앞선다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실반 마탑은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이끌려 린델하이트 가문에 투신하는 젊은 마법사들을 더 큰 문제로 여겼거든요.”

“어차피 엘프밖에 안 받는데?”

“그 엘프들마저 린델하이트 가문의 마법사로서 일하길 원하더라구요.”

“와오.”

그 정도면 단순히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위협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엘프의 수명이 길다지만 영생은 필멸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후계자를 정하고, 다음 세대를 육성하며 조금씩이나마 더더욱 번성해가야 하는데…그 길이 막힌 것이다.

천천히 죽음에 이르는 길을 누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실반 마탑은 공격적인 스카우트로 유명했어요. 엘프만 받아들이다 보니 그만큼 투자 역량이 집중되는 것도 있었을 테고요.”

“대충 이해했어. 엄청 퍼주면서 데려간다는 소리지?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인데?”

“린델하이트 가문이 사라진 지금도 똑같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들었던 내용은….”

속닥 속닥.

“미쳤네.”

다달이 주는 골드나 마법서, 장비 지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돈은 나도 많고, 좋은 마법서가 숨겨진 장소는 줄줄이 외우고 있으며, 장비도 미리 생각해둔 던전이 있으니까.

다만.

“세계수의 잎을 준다고? 심지어 공을 세우면 나뭇가지나 열매까지도 퍼준다고?”

“뭐어…엘프는 몇몇 범죄자를 제외하면 전부 알프헤임 왕국 소속이니까요. 결국 엘프의 영광으로 돌아온다 생각하니 가능한 투자인 거겠죠.”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일부를 얻을 방법은 나도 알고 있다.

다만, 그 자체로도 대단한 효과를 가지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결 장비의 재료로도 쓰이는 것들이기에 입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걸 조금 더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아깝다…너무 아까워….”

“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주인님! 주인님은 인간이라 줄기나 열매는 못 받을 거예요!”

“그래도 잎은 받을 수 있단 소리잖아!”

아무 스태프에나 둘둘 말아 붙여두면 스태프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하는 것은 물론, 우적우적 씹어 먹어도 마력 스탯이 확 하고 뛰어오를 터.

거기에 운이 좋으면 원소 친화 특성이 강화될 수도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3개월간 제대로 한탕하고 발을 뺄까 싶을 정도다.

“후…아무리 그래도 그건 힘들겠지.”

세계수의 잎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지금 당장 얻지 못할 뿐, 얻을 방법 자체는 많으니까.

괜히 지나간 일에 아쉬워하지 말고, 계획해뒀던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흘러나오는 한숨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아….”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우울해 보였던 걸까. 카를라가 우왕좌왕하며 필사적으로 주제를 전환했다.

“그, 그나저나 주인님. 저도 하나 질문드려도 될까요?”

“응? 뭐를?”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제작학부 공방에 들르시는 건 알겠어요. 주인님도 장비가 필요하실 테고, 그동안 쓴 포션도 보충해야 하니까요.”

그렇다. 지금 내가 카를라의 안내를 받아 향하는 곳은 기숙사가 아니라 제작학부의 공방이 모여있는 공방 거리다.

서열전에서야 급한 대로 카를라에게 사준 스태프를 썼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왜 하필 4구역인가요? 주인님이라면 1구역의 공방도 부담되진 않잖아요.”

“그렇긴 해.”

제작학부의 공방거리는 1구역부터 4구역으로 총 4개로 나뉜다.

1구역에는 돈이 부족한 교수들의 공방이. 2구역부터 4구역에는 차례대로 A반, B반, C반 학생들의 공방이 있다.

제작학부의 공방은 단순히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파는 것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외부 명사들을 초청해 자신의 실력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기사학부나 마법학부가 우수한 성적이나 실적으로 후원을 받는다면, 제작학부는 공방을 통해 자신을 홍보해 후원받는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교수는 예외다. 후원을 받았다가는 교수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하여 그냥 물건만 판다나.

아무튼 그런 상황이다 보니 눈에 잘 띄는 1구역에 좋은 공방이 몰리고, 구석진 4구역에 비교적 떨어지는 공방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일어난 현상.

당연한 말이지만 교칙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 보니 대체로 그럴 뿐, 일부 예외는 존재한다.

내가 가려는 곳은 그런 곳이고.

“뭐, 가보면 알 거야. 분명 카를라 너도 깜짝 놀랄걸? 4구역에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거든.”

“저도 모르는 걸 주인님이 어떻게 아시는…흠흠. 주인님의 뜻이 확고하시다면 저는 그저 따를 뿐이죠.”

석연찮아 하면서도 내 뜻에 따르겠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카를라.

다시 한번 칭찬의 의미를 담아 카를라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흐헤헤…아, 그런데 주인님.”

“응? 또 뭐 물어볼 거 있어?”

“아뇨 물어볼 건 아니구….”

잠시 우물쭈물대던 카를라가 이내 조심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혹시 들으셨나요? 이오나 교수님의 대련 이후로 주인님이랑 엘리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같더라구요.”

“또?”

어제는 엘리샤가 나를 시켜 카를라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식당에서는 개처럼 무릎 꿇렸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네. 엘리샤가 대련 중에 했던 주인님은 자기가 쓰러뜨릴 거라는 말과, 주인님의 전투 방식 때문에 생긴 소문인데요….”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말해.”

“엘리샤가 단순히 주인님을 협박만 한 게 아니라, 제게 수치를 주는 대가로 2등 자리도 약속했다는 소문이에요.”

“허?”

“마지막까지 주인님을 남겨둔 건 2등 자리에 앉혀주기 위해서가 분명하다고 시종들이 몰래 떠들던데요? 그렇지 않으면 천한 핏줄이 자기 주인을 이길 리 없다면서….”

“…….”

항상 주인과 같이 다니던 시종이 그리 생각했다면, 주인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나 엘리샤의 앞이니, 직접 말로 내뱉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생을 남들 위에 군림하며, 자기 동네의 자기 또래 사이에서 적수가 없는 천재 소리 들었던 놈들일 테니까.

몇 번 더 대련 수업을 반복하고, 능력 지상주의인 아카데미의 방식에 익숙해지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이 한순간에 바뀌는 건 무리겠지.

어디서 용병 따위로 굴러먹던 마법사에게 자기들이 패배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엘리샤 때문이다.

엘리샤가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 평민을 싸고돌아서 우리가 진 거다.

원래대로였으면 얀델은 초반에 떨어졌을 녀석이잖은가.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원래 신입생 때는 다들 그런 법이 거든요. 이오나 교수님이 좀 난폭한 수업을 하시는 것도 그래서구요.”

“나도 알아. 시간이 지나면 괜한 합리화는 그만두고 자기 일에 집중하겠지.”

그게 불가능한 녀석은 아카데미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하위 반으로 뒤처지거나 퇴학당하는 거고.

실제로 H&A를 플레이 하다 보면 유독 1학년들이 평민 주제에! 같은 말을 많이 했었네.

2학년…아니, 2학기만 돼도 신입생들의 바깥 물이 빠지기 시작하니, 정말 걱정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화살의 방향이 내가 아닌 엘리샤에게 향하지 않았던가.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내 예상 이상으로 엘리샤의 평판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

그저 내가 감수하려던 비난을 약간 돌려줬을 뿐인데, 이게 자꾸만 스노우 볼 굴러가듯이 덩치를 부풀리고 있다.

“…뭐, 괜찮겠지?”

설마 별일이야 있겠는가.

실반 마탑이 멀쩡할 때는 결국 찍소리 못할 녀석들이고, 실반 마탑이 망한 뒤에는 내가 나설 텐데.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버리며 카를라를 따라 걷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어느새 주변에서 느껴지던 방과 후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공방 거리에 도착한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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