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반 대표 서열전(6)
* * *
“당신. 혹시 실반 마탑의 후원을 받아볼 생각 없나요?”
“???”
그으…떡락하는 코인에 역배 거는 취향은 없는데요.
내가 멀뚱히 눈만 깜빡이자,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라 여긴 걸까. 엘리샤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실반 마탑은 엘프만 소속될 수 있는 마탑이지만, 그게 다른 종족의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답니다.”
“어, 그게 말이죠….”
“재능있는 마법사는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어야지요. 제가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
이건 또 뭔?
솔직히 좀 당황스럽다.
엘리샤가? 후원을? 나한테?
우선 후원이라는 시스템 자체는 알고 있었다. H&A에서도 제법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니까.
어느 과목에서 특출난 성과를 보이면 관련된 조직에서 관심을 보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원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를 수락할 경우 매달 일정한 골드가 들어오며, 그 분야에 관한 이런저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법사라면 마법서를 준다거나, 마법사용 장비를 싸게 판다거나 하는 식.
그 외에도 주말이나 방학 때 외부에서 수행할 수 있는 서브 퀘스트를 준다거나, 특정 히로인과의 접점이 생기는 등.
후원자에 따라 엔딩에 이르는 루트가 천차만별 달라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후원자의 편에 서서 영지전에 참가하거나, 후원자의 악명에 싸잡아 불이익을 당하는 등.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벤트와 패널티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심지어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여러 명에게 후원받거나, 후원자를 바꾸기도 불가능했는데….
분명 평민이 받는 후원은 암묵적인 영입 제안이라 그렇다는 설정이었지.
아직 계급과 충성. 그리고 명예의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세상답게 이적이 쉽지 않다는 소리다.
실제로 엔딩 이후에는 주인공의 행적을 주르륵 읊으며 에필로그가 진행되는데, 그 내용이 후원자에 따라 한두줄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후원자는 신중히 선택해야 하고, 어디의 후원을 받을지도 이미 정해둔 상태.
여기서 실반 마탑의 후원 제안을 받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접 찾아내거나, 공략 사이트를 달달 외워가며 알아낸 후원자 리스트 중에 실반 마탑은 없었으니까.
게임 초반부에 망해서 사라진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내가 무슨 짓을 하건 후원 제안이 들어오질 않더라고.
우선 실반 마탑의 눈이 되어야 할 엘리샤는 1등이 아니면 가치를 두지 않으며.
설령 엘리샤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하더라도 후원 제안은커녕 라이벌 선언만 듣게 된다.
전부 1등에 집착한다는 엘리샤의 성격 때문.
그런 엘리샤의 입에서 먼저 후원 제안이 튀어나왔다고?
믿기질 않아 눈만 끔뻑이자, 엘리샤가 부채를 촤악! 펼쳐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놀라셨는지요?”
“예. 뭐….”
“후후. 하지만 이유는 충분하답니다? 저번에 식당에서 말씀하셨지요. 마법을 익히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고.”
어쩌다 보니 그런 이야기도 했었지.
말없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 그새 여유를 되찾은 엘리샤가 말을 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은 얀델 당신이 입학 전부터 용병 마법사로 활동한 적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 거예요. 그만큼 당신이 대련에서 보여준 모습은 특이했으니 말이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얼마 없지만, 그 얼마 없는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며 전투 자체에 익숙해 보이는 사람.
나였어도 용병이나 모험가 출신이라 생각했겠지.
“달리 말하면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는 소리죠. 당연히 미리 침을 발라둬야 하지 않을까요?”
자못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태연한 태도. 하지만 이에 당황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치, 침?!”
내 뒤에 숨어있던 카를라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제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처럼 아르릉대며 엘리샤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샤는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히죽이기 시작했고.
“어머? 어디서 강아지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헙!”
한번 실수한 적이 있던 카를라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마찬가지로 조금 과하게 괴롭혔다는 자각이 있는 엘리샤가 피식 웃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만은 허락하지요.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는 카를라 당신이 얀델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직접 주인에게 설명해 보시는 건?”
“끄으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대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의 볼을 한번 쭈욱 잡아당겨, 내 뒤에 숨기고는 정중히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한 말씀이지만…제게는 너무 과분한 제안이군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요? 카를라에게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심이 어떠신지? 지금이야 멍멍이 신세지만, 본래는 후원을 해주는 쪽이었던 만큼 제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을 거랍니다.”
멍멍이라니. 말이 심하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노예에요 멍멍!’ 이라고 길거리에서 외치던 카를라의 모습.
고개를 휘휘 저어, 며칠 전의 기억을 털어내고서야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미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다.”
“흐응…혹시 실반 마탑이 엘프만 받는다는 게 마음에 걸리시나요? 안심하시길. 다른 사람도 아닌 차기 마탑주인 저라면, 제 직권을 이용해 외부 고문 같은 자리를 만들 수 있답니다. …카를라가 있다면 업무도 그다지 어렵지 않겠죠.”
자신의 이름이 불려 흠칫한 카를라와, 그런 카를라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엘리샤.
이거 설마…?
나를 자신의 밑으로 들이면 자연스레 카를라도 같이 아랫사람이 되는 걸 노리는 건가?
응.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이게 아니면 게임에서는 지금의 나보다 더 대단한 모습을 보여도, 그게 절대 후원으로 이어지지 않던 엘리샤가 하루 만에 지금처럼 나올 이유가 없잖은가.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후원하기는 불가능하겠지.
아무리 외부 협력자 같은 포지션이라지만 어쨌든 나는 엘프가 아닌 인간이잖은가.
물론 어설픈 녀석을 추천했다가는 오히려 욕만 먹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미 마법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A반에 배정됐으며 오늘의 대련에서는 2등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만한 인재는 인간이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놓는 게 이득이다! 애초에 탑 안으로 들이는 것도 아니고 외부 고문이지 않느냐!
같은 식으로 설득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
…와. 차마 말은 못 하겠지만, 진짜 음습하네.
멍하니 엘리샤를 바라보고 있자니, 길쭉한 귀를 위아래로 파닥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엘리샤.
본인도 좀 부끄럽다는 자각은 있나 보구나.
“뭐, 뭔가요 그 눈빛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어찌 됐든 받아들일 수 없는 후원이지만.
말했잖은가. 평민을 향한 후원은 일종의 영입 제안이라고.
내가 실반 마탑에 소속감을 가지지 않더라도, 외부에서는 나 또한 실반 마탑의 소속으로 본다는 소리다.
마탑에 완전히 묶이는 것은 아니라지만, 3개월밖에 지원을 못 받고, 심지어 까딱 잘못하면 실반 마탑이 몰락할 때 같이 조사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니.
수지가 안 맞잖는가.
무엇보다 내게는 원래 목표로 하고 있던 곳에서 후원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골드나 각종 혜택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엔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절실한 이유가.
그러니 내 대답은 결국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거듭 죄송합니다만, 조금 전의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죠? 이만하면 정말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몸값을 더 올리려는 생각이라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미리 생각해둔 곳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대체 어디길래…? 제게 이만큼이나 무안을 주셨으니 어딘지는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살짝 뾰족해진 엘리샤의 목소리에 짐짓 경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의로운 광명의 신전입니다.”
“…네?”
“제가 좀 신앙심이 깊어서요.”
“…….”
당연한 말이지만 신앙심이 깊다는 말은 구라다.
애초에 내게 이 세계의 신들은 한때 게임으로 접했던 캐릭터들인데 어떻게 진심으로 신앙을 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정의로운 광명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건 사실이다.
후원처에 따라서는 전용 서브 퀘스트를 받을 수 있고, 정의로운 광명은 사교도 토벌 의뢰를 가장 많이 의뢰하는 곳.
그리고.
가만 놔두면 그 사교도들에게 역으로 당해서, 제대로 타락하는 교단이니까.
…왜 죄다 몰락하느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이 세상은 멸망이 확정되어있는 세상이니까. 지금까지는 그저 봉인으로 잠깐의 유예를 얻었을 뿐이다.
이젠 그마저도 끝나가지만.
안 그래도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정의로운 광명의 타천??만큼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내 강한 의지가 전해졌던 걸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리샤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머쓱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네요. 하지만 저희 실반 마탑은 언제나 얀델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점은 기억해 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총총총 멀어지는 엘리샤.
이를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돌연 내 뒤에 있던 카를라가 까치발을 들며 밀착했다.
꾸욱.
등을 짓누르는 묵직한 가슴. 특유의 청량한 체향. 따뜻한 체온.
정신없는 대련과,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드는 엘리샤와의 대화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카를라의 존재감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를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한 카를라가 속삭였다.
“주인님 주인님.”
“응?”
“다음에 사제 코스프레 해드릴까요?”
“…….”
엘리샤의 후원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제안.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사제복 구해올게.”
찢어질 걸 생각하면 3벌 정도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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