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반 대표 서열전(5)
* * *
“수고하셨어요 주인님!”
축 늘어진 채, 이오나의 염력 마법에 끌려온 나를 맞이하는 카를라.
보호 마법 덕에 상처 하나 남지 않았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몸뚱이에만 해당되는 일.
기껏 차려입은 새 교복은 겨우 몇 시간 만에 푹 젖은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카를라는 이런 내 몰골이 익숙하다는 듯 옷 소매로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저번에 장비를 사며 같이 사준 아공간 주머니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건네주기까지.
하기야. 카를라는 이런 수업을 4년간 들었을 테니 익숙한 것도 당연하겠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카를라의 시중을 받고 있자니, 홀로 남은 엘리샤가 느긋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엉망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데, 혼자만 멀쩡한 모습이 괘씸하기 그지없다.
무슨 고정 포대처럼 본인은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쉬지 않고 마법을 뿌려대는데…이런 게 마법사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던전에서의 카를라도 대단했지.
조금 전의 엘리샤가 했던 짓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했다는 거 아냐.
심지어 중위 마법사의 막대한 마력을 전부 소모한 것도 모자라, 포션 남용으로 배가 통통해질 때까지 하급마법을 난사했다고?
마지막에는 중위 마법으로 일대를 날려버리기까지 했고?
당시에는 내가 마법을 스킬 정도로만 생각해서 잘 몰랐는데, 직접 써보니까 알겠다.
카를라가 진짜 말도 안 되게 대단하다는걸.
몸에 와닿는 말랑한 감촉을 즐기며, 슬쩍 카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으응? 주인님?”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내가 말없이 계속 쓰다듬자, 이내 너덜너덜해진 옷이나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에헤.”
헤실대는 카를라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교복 하나 새로 사야겠네. 아니지. 아카데미에서 주는 거니까 신청해야 하나?”
“응? 아, 제가 미처 말씀 못 드렸네요. 아카데미 교복에는 자동 수복 기능이 인챈트 되어있어요. 마력만 넉넉하게 충전해 두시면 내일쯤엔 다시 멀쩡해져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거 원래는 카를라 네가 필요 없다고 했던 책자에 나오는 내용이지?”
“에헤헤….”
“웃긴 뭘 웃어.”
카를라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고는 꾹꾹 잡아당겼다.
“죄, 죄송해요! 다음에는 잊어버리지 않고 꼭 말씀드릴게요!”
“잘하자.”
“넹.”
카를라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카를라의 말대로 교복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웅
잠시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달라붙기 시작하는 교복.
왜 교복에 청결이나 사이즈 조절도 아닌, 자동 수복 기능을 집어넣었는지는 알 것 같네.
대충 보아하니 오늘만큼은 아니어도 앞으로 과격한 수업이 제법 많을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교복을 새로 사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은가.
아무리 아카데미에 돈이 많다고 해도 골드를 퍼다 버릴 정도는 아니다.
…그나저나 이건 또 원리가 뭐지?
지금까지야 게임이니까, 판타지니까 하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편의 마법들이 새삼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카를라에게 다음 마법으로 클린을 알려달라고 해볼까?
아니, 역시 지금은 전투에 쓰일 다른 마법이 우선이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어느새 이번 대련 수업 최후의 승자인 엘리샤가 여기까지 도착하자, 지금껏 조용하던 이오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반겼다.
“잘했어! 잘했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 A반의 대표는 너야! 다들 박수!”
짝짝짝!
혼자 물개박수를 치는 이오나의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우아한 태도로 대답하는 엘리샤.
“반 대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에서는 짙은 확신이 전해져왔다.
아무리 A반이라도 자신의 상대가 될만한 이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겠지.
조금 아니꼽긴 하나, 그래도 불만은 없다. 실제로 엘리샤가 압도적이긴 했으니까.
H&A의 온갖 필살 콤보와 카를라의 벼락치기로 배운 꿀팁들. 그리고 시스템 보정의 장점을 한껏 살린 전투 방식으로도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었다.
내가 조금 더 다양한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아무튼 지금 당장은 그만한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널브러져 있던 다른 학생들도 엘리샤의 위용을 직접 경험하거나, 코앞에서 눈으로 봤기에 인정한다는 듯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손뼉을 치고 있었는데.
꾸욱.
돌연 카를라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주인님. 실반 마탑이 한 번도 린델하이트 가문을 넘어서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거든요. 주인님이 본격적으로 코어 특성을 깨우치실 때 쯤이면 엘리샤는 상대도 안 될 거예요. 지금도 엄청 잘하신 거구요.”
“아니, 나 그렇게까지 상심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마법은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긴 해.”
당장 실드만 쓸 수 있었어도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당하지는 않았겠지.
무엇보다 이번 대련이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건 아니다.
막바지에 얻은 깨달음 비스무리한 것과 윈드 커터의 숙련도 상승.
그리고.
띠링!
【서열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스탯 전반이 한단계 성장합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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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얀델
칭호: 재능 있는 신입생
기초 능력
근력: 11 > 12
내구: 10 > 11
민첩: 12 > 13
재주: 14
마력: 18
특성
끝없는 마나(A)
원소 친화(B)
뛰어난 기억력(B)
허접한 무기술(E)
린트블룸 마나 코어(C)
하위 마법사(D) > (D+)
태양신의 가호(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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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가 낮은 스탯이 하나씩 상승한 것은 물론이요, 윈드 커터가 성장을 이루며 하위 마법사 특성에 플러스가 붙었다.
이대로 더 많은 마법을 배우고, 그렇게 익힌 마법의 숙련도를 높인다면 C등급에 도달할 수 있겠지.
반 대표가 되면 훨씬 더 좋은 보너스와, 추후에 벌어질 이런저런 이벤트에서 능동적인 자리를 가져갈 수 있었겠지만…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반 대표는 내년을 노리는 수밖에.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아무리 H&A의 공략법과 육성법을 안다고 해도, 그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이후의 일.
거기에 키보드와 마우스가 아닌, 내 몸과 머리로 싸워야 하는 상황 아니었는가.
이 정도면 카를라의 말대로 잘한 편이지 뭐.
물론 앞으로의 일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잘한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머릿속으로 나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육성 계획을 점검하던 것도 잠시.
“다들 주목해! 주목! 아, 기절한 사람도 지금은 일어나야 해! 얍!”
이오나가 팔을 휘적휘적 흔들더니, 손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기절한 학생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허억!”
“아…여긴?”
그러자 잘 자다가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정신을 차리는 학생들.
이오나는 아직 멍한 표정을 지은 이들이 상황을 파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반 대표는 엘리샤로 정해졌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다른 친구나 시종들한테 물어봐! 아무튼 오늘의 수업에 대해서 말인데….”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내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대전쟁 이전부터 살아온 흡혈귀의 연륜이 고스란히 담긴 검붉은 눈동자에 이 자리의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예외가 있다면 나름 이오나에게 익숙해진 카를라 정도.
간단하게 주변을 장악한 이오나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직접 겪어봤으니 이젠 너희도 알 거야. 마법의 실력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잘 싸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걸.”
그 말에 힐끔힐끔 나와 엘리샤를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 이를 눈치챈 이오나가 피식 웃었다.
“잘 싸우는 게 별거야?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의 장점을 꺾으면 그만이지. 그런 의미에서 엘리샤도 잘 싸웠어. 정석적인 마법사가 마법사의 정석대로 싸웠잖아?”
이오나의 대답에 다들 납득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얀델도 잘 싸웠어. 신기하게도 실수가 하나도 없었거든. 상황 파악에도, 몸놀림도, 심지어 이리저리 구르면서 시전한 마법에도. 모든 게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이었어. 그렇기에 하급마법은 윈드 커터 하나만 쓸 줄 알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거였고”
게임이 현생이었던 썩은물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지만…그래도 나름 고인물 소리 듣던 나다.
최상위 던전이나 악신의 사도를 상대로 싸우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그리 어렵지도 않지.
다른 학생들의 놀라워하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내 쪽을 유심히 바라보던 엘리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촤악!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가를 가리는 엘리샤.
질 수 없지.
카를라의 손으로 내 입을 가렸다.
“주인님…?”
“가만히 있어.”
어이없어하면서도 얌전히 내 명령에 따르는 카를라.
이에 새삼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학생들이 죄다 미친놈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왜, 뭐.
내 뻔뻔한 모습에 이오나마저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무튼! 다들 내 수업의 목적이 뭔지는 이제 알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싸우는 방법! 사교도와 몬스터들을 어떻게든 쳐 죽이는 방법! 그게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내용이야!”
다시 평소 같은 말투로 돌아온 이오나가 품에서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더니 엘리샤에게 휙! 하고 던졌다.
“이거! 반 대표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정리해 놓은 거니까 꼭 한번 읽어 봐!”
“앗, 알겠습니다 교수님.”
엉겁결에 이를 받아든 엘리샤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만족스럽다는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오나.
“좋아! 좋아! 너희 수준은 이번 대련으로 전부 파악했으니, 내일부터는 거기에 맞춰서 수업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둬!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있어?”
…….
“없나 보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다음 수업도 있으니 이제 다들 교실로 돌아가 봐! 나는 따로 가볼 데가 있거든!”
여느 때처럼 자기 할 말만 마치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지는 이오나.
다들 슬슬 이오나에게 적응됐는지, 비틀비틀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이번 대련에서 나름 생각할 것이 많았는지, 진지한 얼굴로 강의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카를라와 조금 전의 대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강의실로 향하던 도중.
적든 많든 꼬질꼬질해진 다른 이들과 달리, 처음 봤을 때처럼 말끔한 누군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푸른색 웨이브진 롤빵 머리와 마찬가지로 푸르른 눈동자. 기다란 귀. 우아한 걸음걸이. 그리고 어째서인지 항상 들고 다니는 부채.
엘리샤가 나를 불렀다.
“당신.”
“어…무슨 일이십니까 글렌시엘님.”
“혹시 실반 마탑의 후원을 받아볼 생각 없나요?”
“???”
그으…떡락하는 코인에 역배 거는 취향은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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