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반 대표 서열전(4)
* * *
…지금부터 사과하면 마법 살살 쏴주려나?
양 떼 사이의 늑대처럼 미쳐 날뛰는 엘리샤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잠시.
어찌 됐건 일단 빌헬름은 마무리 지어야지.
“워터 볼.”
“으븝…읍…!”
빌헬름의 코와 입을 둘러싸는 물 덩어리.
잠시 버둥대던 빌헬름이었으나, 질식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탈락자들과 함께 이오나에게 회수되는 빌헬름.
어쩔 수 없네. 실드…아니, 친구도 사라졌으니 이제 슬슬 저 개판에 뛰어드는 수밖에.
꽤 많은 양의 마법을 사용했으나, 대부분이 기초마법이었기에 마력량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거기에 넷이나 처리하며 나름 난전에 익숙해진 덕에 알 수 있는 것도 생겼고.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마법을 사출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
한번 쏘아내고 나면 다시 영창해서 마법을 장전해야 하지 않는가.
차라리 차지할 때처럼 손에 쥐고 휘두르다가, 마력 포화 상태가 되거나 여차할 때 쏘아내는 게 이득일 터.
진짜 검처럼 쥐고 휘두르지는 못하겠지만…스치기만 해도 베인다는 점은 똑같다.
뭐, 부족한 부분은 단검과 허접한 무기술 특성의 도움을 받아야겠네.
마법의 경지가 낮은 지금은 허접하게나마 몸을 쓸 줄 안다는 게 큰 메리트더라.
떠올렸다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지.
“바람이여.”
후웅.
아직 한 소절만 외쳤을 뿐인데 스태프 끝에 맺히는 바람.
나머지 영창은 달려가며 이어 나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여.”
목표는 엘리샤에게서 도망치는 중인 키 큰 남학생.
헥헥거리며 열심히 달리고는 있지만, 체력이 부족한 탓인지 벌써부터 비틀거리고 있다.
“너는 내 손 안에서 더욱 날카로워지리라.”
후우웅!
완연한 초승달 형태를 갖춘 윈드 커터를 앞으로 내세우며 달려들었다.
“어? 어어?”
엘리샤에게서 멀어지는 데 집중하느라, 뒤늦게 나를 발견한 녀석이 어버버하며 원드를 들어 올렸다.
“쇼, 쇼크!”
급한 대로 기초마법이라도 써서 지금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것 같지만…조금 성급했다.
쇼크가 기초마법이긴 해도, 전격 계열답게 잠깐의 경직은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
내가 빌헬름의 옆구리를 찌를 것처럼, 잠깐 멈칫한 사이에 무언가 수를 짜내지 못하면 결국 변하는 건 없다는 소리다.
파지직!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르고,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감각.
한창 달려가던 중이라 순간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버텨내며 기어이 팔을 뻗었다.
안 그래도 기다란 스태프. 그 끝에서 약간 떨어진 부분에 생성된 마법이다.
상당한 사정거리를 미처 벗어나지 못한 키 큰 학생의 허리가 베여나갔다.
“흐아아악!”
해치웠나를 외친 녀석처럼 바닥을 굴러다니진 않았지만, 대신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는 녀석.
황급히 자신의 배를 더듬거리며 다친 부분을 확인하였으나…이오나의 마법이 겨우 이 정도에 뚫릴 리 있나.
옷자락이 좀 베였을 뿐 상처는 없다. 대신 탈락할 뿐이지.
붉게 점멸하는 자신의 몸뚱이에 한숨을 푸욱 내쉰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오나의 곁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한 명 더 떨어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의 키 큰 학생처럼 엘리샤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
이러다가 점수를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건지, 도망치는 이들에게 마법을 꽂아 넣는 학생과 그런 이들이 펼치는 반격.
처음부터 나나 엘리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는 듯, 구석에 숨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야 나서는 사람은 물론이요.
저 끝에서 숨 쉬듯이 하급마법을 난사해대는 엘리샤도 빼놓을 수 없겠지.
거의 절반 가까이 탈락해 이제 열명도 안 되는 인원밖에 남아있지 않건만, 더 많은 마법이 오가기 때문인지 사람은 몇 배나 많아 보였다.
내가 있는 곳까지 번져 드는 혼란. 그 속에서 스태프와 단검을 양손에 꼬나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허공에서 서로의 마법이 맞부딪히고, 때로는 캐스팅할 시간이 부족해 주먹다짐까지 하는 학생들.
여기저기서 실드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하급마법 보다 당장 쓸 수 있는 기초마법의 시동어가 더 많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걷어차이며 스태프를 휘둘렀고, 다른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기뻐하는 이의 등짝에 윈드 커터를 날렸다.
테라로 만든 작은 흙덩이를 만들어 달려오던 이의 발을 걸었으며, 그 등짝을 단검으로 찍어버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게임에서는 그저 피통과 마나통을 관리하며 스킬과 평타를 섞을 뿐인, 하나도 특별한 것 없는 전투였으나.
현실이 됐다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처절해질 수 있다니. 심지어 이건 진짜 실전도 아니고 대련일 뿐이라니.
덕분에 이오나가 이번 수업으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실전에서 오는 급박함, 흥분, 고통, 마음대로 써지지 않는 마법. 그리고 죽음.
대충 이런 걸 직접 겪게 해보려는 게 아닐까?
돈 있는 집안의 훈련에 자주 쓰이며, 입학 시험 때도 상대한 적 있는 몬스터 환영은 이렇게까지 리얼하지 않으니까.
…이래서 아카데미 제한 연령이 20살이었던 거구나.
어린 나이에 이런 훈련을 했다가는 어디 한 군데 망가지고도 남겠지.
아카데미는 악신의 잔재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인재를 키우는 곳이지, 살인 병기를 만드는 곳이 아니니 나이에 제한을 붙인 것이리라.
그냥 ‘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20살 이상입니다.’ 같은 이유로 넣은 설정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네.
아무도 모르는 H&A의 뒷 설정을 하나 알았다는 사실에 살짝 기분 좋아진 채, 계속해서 대련을 이어 나갔다.
정확한 몸놀림과 달리면서도 가능한 안정적인 캐스팅.
유독 난전에 강한 시스템 보정 덕분인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나와 엘리샤뿐.
직격당한 적은 없지만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느라 너덜너덜해지고 숨도 가빠진 상태.
그런 나와 달리 엘리샤는 평소처럼 말끔한 차림새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얀델 당신이 이렇게까지 잘 싸울 줄은 몰랐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전력으로 싸우라 해서 말이죠….”
“이리도 제 말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이 아까는 왜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궁금하십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괜히 당신이 회복할 시간을 주고 싶지는 않네요.”
눈치도 빨라라.
대화를 이어 나가며 숨 돌리고 있던 걸 바로 들킬 줄이야.
“힘드신가요?”
“그야 뭐. 제가 기사학부도 아니고, 이 정도로 뛰어다녔으면 힘들 수밖에 없죠.”
“걱정 마시길. 금방 끝내드리지요.”
그리 말하는 엘리샤의 머리 뒤로 2개의 반투명한 구체가 떠올랐다.
물과 바람을 형상화 한 듯한 모양새.
“쓰읍.”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의 대응 방법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몇 개 없다.
워낙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적기에 벌어진 일.
뭐, 어쩔 수 없지. 결국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그리 마음을 다잡으며, 엘리샤가 만들어낸 반투명한 구체를 노려보았다.
모든 마나 코어에는 각자의 고유한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린트블룸 코어의 경우는 공명이라는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다.
본래 체내의 마나와 대기의 마나를 공명시켜, 격렬하게 들끓는 상태로 만들면 자신도 마나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시작된 호흡법은.
극한에 이르면 자신의 마나와 주변의 마나를 공명시켜, 마법의 위력과 범위를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등급이 어느 정도 높은 마나 코어는 다들 이러한 고유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실반 마탑의 비전 호흡법으로 만들어낸 엘리멘투스 코어도 마찬가지다.
지금 엘리샤의 머리 뒤에 떠오른 반투명한 구체야말로 실반 마탑의 정수. 원소의 그림자.
저 구체에는 실체가 없다. 분명 자신의 코어에 새겨넣은 원소가 마법을 쓸 때마다 그림자처럼 비치는 거라는 설정이었던가.
사실 그런 원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원소의 그림자를 띄워낸다는 건, 해당 원소를 자신의 코어에 각인시켰다는 소리.
즉, 이 경우에는 물과 바람 계열 마법에 막대한 보너스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된다.
카를라처럼 중위 마법사인 것도 아닌 엘리샤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하급마법을 난사해댄 것도 그 덕분이겠지.
위력은 물론이요, 소모 마력이나 발동 속도 등 온갖 부분에서 보너스를 받고 있으니까.
나중에는 4대 원소를 전부 각인하는 것도 모자라, 파생 원소들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며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 된다지만…아직은 이 정도인가.
다행히 발동 속도라면 내게도 자신 있는 부분이다. 시스템 보정은 마법을 본능의 영역까지 끌어내려 주니까.
바짝 긴장을 끌어 올리며 마력을 고조시키는 것도 잠시.
엘리샤가 내게 스태프를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아, 금방 끝내겠다는 말은 취소하지요.”
“허. 설마 제게 겁이라도 먹으신 겁니까?”
“설마요. 그저 격차를 보여주겠다는 말을 지키고 싶을 뿐이랍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굽이쳐라.”
엘리샤의 스태프 앞에 응축되는 물을 확인하자마자 땅을 박찼다.
지그재그로 달려 엘리샤의 조준을 어지럽히며 영창을 입에 담았다.
“날카로운 삭풍. 보이지 않는 칼날. 이는 내 손에 쥐인 무정함이라.”
어차피 실드를 두르고 있을 테니,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안 된다. 강화 영창을 통해 최대한 차지해야 실드를 뚫을 수 있겠지.
처음에는 조금 오글거려서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창이나, 이것도 여러 번 해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왜 영창을 외우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든 마법은 결국 상상과 의지에서 나온다. 자신의 안에서 튀어나온 강렬한 이미지가 마력을 입고 현상이 된다는 소리.
영창은 마법사 자신의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내용이 바뀌어도 상관없고, 거창한 주문을 외우면 위력이 조금 더 강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단순한 겉멋이 아니라, 직관이나 계산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마법을 보조하는 요소. 그게 바로 영창이었다.
띠링!
【하급마법: 윈드 커터(E)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쌓았습니다.】
【숙련도 상승!】
【윈드 커터(E)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해, 윈드 커터(D)가 되었습니다!】
내 추측이 맞다는 걸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대련 내내 주구장창 윈드 커터만 써서 그런 걸까.
짤막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이 윈드 커터의 등급 상승을 알려주었다.
후우우웅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금까지보다 확연히 거센 바람이 뭉쳐 들기 시작했다.
선명한 초승달 모양의 칼날.
이제 남은 건 어떻게든 엘리샤의 마법을 피하며 차지를 이어 나간 끝에, 풀 차지 윈드 커터로 한 방 먹여주는 일 뿐…!
“하아아아아앗!!”
기합을 지르며 남아있는 모든 체력과 마력을 쥐어짰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뒤지게 처맞기만 하다가 탈락했다.
…이거 직접 맞아보니 딱 안 죽을 만큼 아프네.
내가 탈락시킨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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