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신입생이 노예를 안 숨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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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읏! 이번 일은 잊지 않겠어요…!”
어째서인지 삼류 악역 같은 대사를 남기며 호다닥 멀어지는 엘리샤.
뭐, 이쯤 되면 일부러 멕이고 있다는 걸 들킬 수밖에 없지. 엘리샤도 바보가 아니니까.
“죄송해요 주인님…순간 욱해서 그만….”
“됐어. 카를라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나섰을 테니까.”
턱 밑을 살살 간지럽히며 그리 말하자, 부끄러워하면서도 슬쩍 고개를 들어 간질이기 편하도록 자세를 잡는 카를라.
그 모습을 본 주변이 또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나를 욕하는 내용보다는 엘리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완전히 엘리샤가 시켰다는 식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가나 보네.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냐?”
“에이. 이 정도는 실반 마탑의 이름으로 죄다 뭉갤 수 있어요. 뭐어…문제는 주인님 말대로 3개월 뒤에 엘리샤의 뒷배가 사라졌을 때죠.”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누가 건드리기 전에 내가 바로 채갈 생각이니까.
아니, 지금부터 미리 침을 발라두는 게 좋으려나.
“저기. 카를라. 엘리샤가 뭐 좋아할 만한 거 알아?”
“…1등이려나요?”
“내일 있다는 서열전에서 져주는 건 싫어하겠지?”
“네. 그래서야 1등을 양보받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요. …잠깐만요. 주인님 설마 반 대표를 노리고 계세요?”
“힘들긴 하겠지만, 목적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자, 카를라가 무척이나 기특한 것을 본 사람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라가 나를 자신의 선조와 비슷한 경우라 생각한 이후로 지금처럼 흐뭇한 눈빛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단 말이지.
“그렇죠. 목표는 높을수록 좋죠.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본격적인 마법전은 해보신 적이 없으셨죠? 입학 시험 때 꼼수를 쓰신 것도 그래서구요.”
“꼼수라니. 효율적인 전투방식이라고 불러줄래?”
듣는 꼼수충 마음 아프잖아.
다만 카를라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모니터 너머로는 질릴 정도로 마법을 써봤지만,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써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각 마법의 장단점, 카운터 방법, 숨겨진 조합 등.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제법 자신 있으나 실전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잖은가.
내 고민을 알아챈 카를라가 내 소매를 살살 잡아당겼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드릴게요. 벼락치기가 되겠지만…그래도 제법 유용할 거예요.”
“좋지. 급하게 배우는 거라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럼 기숙사보다 수련실에 먼저 가야 하나? 1학년들은 아직 못 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오나의 설명에 의하면 무슨 등록 절차가 아직이라 며칠 더 걸린다고 했었지.
게임에서는 그냥 ‘아직 이른 것 같다 다음에 오자.’ 라는 문장으로 상호작용을 막아뒀지만.
내 말에 카를라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랑말랑한 가슴을 활짝 폈다.
“걱정 마세요 주인님! A반 학생이 배정받는 기숙사에는 개인 수련실이 따로 있으니까요!”
“아. 맞다. 그게 있었네.”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한번 보고 들은 건 설령 지구에서의 일이라도 생생히 기억하지만…이를 얼마나 빨리 떠올리느냐는 별개더라.
“좋아. 그럼 바로 기숙사로 가자. 길 알고 있지?”
“어…이번에는 저도 잘 몰라요.”
“…….”
그렇게 안내 책자고 뭐고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정작 가장 중요한 기숙사 위치를 모른다고?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카를라가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여자 기숙사면 모를까 남자 기숙사 위치를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남자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다는 처녀(였던 것)인 카를라를 위해 내가 대신 주변의 사용인에게 길을 물었다.
***
“으아…남자 기숙사는 처음이에요….”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카를라.
“뭐, 너무 긴장하지 마. 남자 기숙사라고 해도 시종이나,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용인들도 있으니 완전 남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여자 기숙사에는 진짜 여자만 있었는데요?”
“…그래?”
하기야. 남학생이 여자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흔해도, 여학생이 남자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흔치 않더라.
가문 안쪽이면 모를까 멀리 떨어진 아카데미에서 남정네와 찰싹 붙어 다니면 추문이 돌기 때문인 걸까.
참고로 리소스 문제였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던 건지. H&A에서 여자 기숙사는 아예 시스템적으로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기껏해야 정문에서 누구 좀 불러달라 부탁하러 가는 게 전부.
좀 궁금하네. 여자 기숙사.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의 사용인이 알려준 방향대로 길을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큼직한 건물들이 나타났다.
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의 외관, 그에 어울리지 않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문.
나란히 늘어선 저 건물이 B반과 C반의 기숙사겠지.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카를라가 살짝 우쭐한 느낌으로 웃기 시작했다.
“후후…그거 아세요 주인님? B반 기숙사와 C반 기숙사는 시설이 거의 비슷해요. 차이가 있다면 C반은 서너명이 함께 생활하고 B반은 개인실이라는 정도?”
뉴비때나 제약 플레이를 할 때는 A반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많아서 잘 알고 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자, 카를라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묘한 악센트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A반은 아예 건물 자체가 달라요! 명실상부 아카데미 최고의 인재들이 사는 곳이라고 엄청 신경 써주거든요. …바로 이렇게요!”
카를라가 까딱거리던 손가락을 쭉 뻗어 나란히 붙은 B반과 C반의 기숙사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소국의 궁궐에 버금가는 화려한 건물이 서 있었다.
“허….”
그래픽으로 봤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실제로 보니 박력이 다르네.
카를라의 말대로 A반 기숙사는 시설의 질이 확 달라진다.
그만큼 A반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도 이유지만, 동시에 다른 학생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함도 있다나.
“아니,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신났어? A반에 붙은 건 난데? 카를라 네가 아니라?”
“흐흥! 그치만 주인님의 침대는 저도 같이 쓰잖아요? 그리고 주인님의 자랑이 제 자랑이기도 하다구요!”
맞는 말이긴 한데…뭔가 노예라기보다는 정실의 대사 같은데 그거.
어이가 없어 빤히 바라보자 급속도로 쭈그러드는 카를라.
이쪽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 이내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헤 웃기 시작했다.
“실은…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온 게 조금 좋았거든요.”
“그래?”
“네. 제가 아는 사람들이나,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여전히 힘들지만…그래도 여긴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곳이거든요.”
“…….”
잠시 카를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카를라의 목덜미에 새겨진 가시덩굴 문양의 노예 각인을.
그러고 보니 카를라는 졸업 직전에 아카데미에서 쫒겨난 거였지.
피식 웃으며 카를라의 백금발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까 보니까 시종도 수업은 들을 수 있게 되어있더만.”
“네.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지만요.”
“그럼 내가 졸업할 때까지 항상 같이 강의를 들으면, 카를라 너도 같이 아카데미를 다닌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카를라.
그래. 졸업장은 못 받겠지만, 모든 수업을 4년간 같이 듣는다면 아카데미에서 배울 건 다 배웠다는 소리겠지.
졸업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주, 주인니임!”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글썽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다만 사람 많은 곳에서 안겨들 용기는 없었는지, 그저 내 손을 잡아끌더니.
손등, 손바닥 할 거 없이 마구 얼굴을 부비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 가서는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춰대는 카를라.
기숙사 주변을 지나다니던 학생들이 힐끔거리는 걸 넘어, 대놓고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아, 몰라.
어차피 엘리샤가 뒤집어쓰겠지 뭐!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지금의 이 감촉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구 애교를 부려대는 카를라를 데리고, 천천히 A반 기숙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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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델이라고 합니다. 신입생이에요.”
“엇. 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게 찰싹 달라붙은 카를라를 알아본 건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던 사감이 서랍에서 크고 작은 열쇠 두 개를 꺼냈다.
“3층 좌측 방입니다. 큰 열쇠로만 잠가두시면, 수업에 나가 있는 오전 동안은 메이드들이 방을 정리해드립니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는 게 싫으시다면 이 작은 열쇠까지 사용해서 문을 완전히 잠그시면 됩니다.”
자꾸만 카를라를 힐끔거리면서도 자기 할 일은 똑바로 하는 사감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며 열쇠를 받았다.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의 두 개의 방으로 나뉜 구조라 내 방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더라.
철컥.
이 넓은 건물의 한층의 절반을 홀로 쓰는 것이다.
기숙사 방이라기보다는, 작은 집에 가까운 넓이와 구조.
저 닫혀있는 방 중 하나가 개인 수련실이겠지.
이를 잠시 둘러보다가, 아직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카를라의 볼따구를 마구 꼬집었다.
말랑 몰랑.
“흐에엑!”
내게 애교 부리다 말고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에게 피식 웃어주며 말했다.
“일단 벼락치기 수련부터 끝내자고.”
“…그 뒤에는요?”
“여긴 얼마나 방음이 잘 되는지 확인해봐야지.”
“허억!”
숨을 턱 삼키면서도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듯, 눈웃음 짓는 카를라.
이후 엉망진창으로 벼락치기했다.
…아, 그리고 방음은 걱정할 필요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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