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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35화 (35/230)

〈 35화 〉 신입생이 노예를 안 숨김(5)

* * *

아카데미에서의 식사는 기본적으로 무료 제공이지만, 추가로 돈을 지불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신분을 이용한 부당한 억압을 인정하지 않을 뿐, 신분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것이 아카데미의 방침이지 않은가.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평민과의 격차를 주어,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것이겠지.

뭐, 게임에서는 단순히 호감도 작업에 쓰이는 메뉴였지만.

빈곤 속성이 있는 캐릭터에게 대접해주면 엄청 좋아하더라고.

“얀델. 당신은 평민이라고 했죠? …보통 평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제가 부른 것이니, 제가 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글렌시엘님 덕분에 맛있는 걸 먹어볼 수 있겠네요.”

사실 돈이라면 내가 더 많겠지만…원래 공짜 밥이 더 맛있는 법.

그리고 밥 사주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금칠해주는 것 또한 국룰이다.

적당히 감사인사를 표하며, 주문한 음식이 기다리기도 잠시.

일부러 인적이 드문 구석에 앉았음에도, 다른 학생들로 소란스러운 주변이 신경 쓰였던 걸까. 엘리샤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비밀스러운 장막이여. 우리의 속삭임을 숨겨주소서. 사일런스.”

엘리샤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작은 반구형의 마력 파동.

나와 카를라가 그 안에 들어가자 주변의 소음이 일제히 줄어들었다.

사일런스의 효과에 만족스레 미소 지은 엘리샤가 그제야 간단한 신변잡기가 아닌, 본론을 꺼냈다.

“우선 말해두는데, 어머니 세계수께 맹세코 전 이렇게까지 심한 걸 바라지는 않았어요.”

“카를라의 처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다른 이야기겠어요?”

사일런스 마법을 믿는 것일까. 여전히 기품있는 말투였지만, 뾰족해진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목소리였다.

투덜대는 엘리샤의 모습에 절로 흘러나오는 피식거림. 이를 억지로 참고 있자니, 엘리샤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뭐…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골려주려던 건 사실이에요. 당신도 알죠? 저랑 카를라 언니…흠흠. 카를라 사이의 일을요.”

“카를라에게 들어서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 알게 된 거라고요? 얀델. 마법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됐죠?”

“아직 한 달이 조금 안 됐네요.”

“어머? 그 짧은 사이에 아카데미에 합격한 것은 물론, 상위반에 배정받을 정도라고요?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나 보네요.”

“과찬이십니다.”

입가를 가린 채, 놀란 표정을 짓는 엘리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여느 시종들이 그러하듯, 내 뒤에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카를라를 힐끔거리더니, 다시 본래의 주제를 꺼냈으니까.

“아무튼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카를라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요.”

“네. 그 부분은 잘 알겠습니다.”

“물론, 제 책임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본디 타인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는 자신의 뜻을 정확히 알려야 하는데, 저는 그 부분에 소홀했으니까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미흡함을 인정하는 엘리샤.

자존심이 강하긴 해도 이번 건 정말 자기가 실수했다 생각하는 거겠지.

…일부러 떠넘긴 건 안 들켰나 보네.

“이미 제법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봐야 아직 첫날일 뿐이랍니다.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종식 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이제부터 카를라에게 더 잘해주라는 거죠?”

“예에. 적어도 지금처럼 보기만 해도 불쌍해질 정도는 아니어야지요. 노예라기보다는 시종처럼 대하도록 하세요.”

어렵지 않지. 아니, 사실 이렇게 되는 쪽이 나한테 베스트긴 한다.

애초에 내가 아카데미에서 카를라를 괴롭히는 척하려던 것 자체가 전부 엘리샤 때문이었다.

이제 오해가 있던 게 밝혀졌으니, 굳이 카를라에게 불쌍한 척을 시킬 이유가 없잖은가.

내 이미지도 이미지지만…그보다는 카를라에게 애착이 생겼기에 조금 더 잘해주고 싶다는 것도 있고.

카를라 같은 여자가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내게 잘 보이려 온갖 아양을 떠는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잠시 카를라를 생각하는 사이. 엘리샤 또한 같은 사람을 떠올렸는지 내 뒤편을 빤히 바라보다 조금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아는 카를라 린델하이트는 이렇지 않았어요. 훨씬 더 당당하고, 훨씬 더 아름다웠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별처럼 말이죠.”

“…….”

여전히 내 뒤에 기립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카를라.

그 모습이 마치 내 등 뒤에 숨으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제 평생의 목표였어요. 당신처럼 되고 싶었고. 언젠가 당신을 뛰어넘고 싶었어요.”

“…….”

“대체 어쩌다 카를라 당신이 이런 꼴이 된 건지….”

“…….”

“지금의 당신처럼은 되고 싶지 않네요.”

“…….”

엘리샤의 한탄에 카를라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는 친했다고 하나, 어느 날부터 자신에게 열등감과 경쟁심을 불태우던 동생.

그런 엘리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한낱 노예가 되어버린 지금과 찬란했던 과거가 비교되어 초라함을 느낄 수밖에.

…조금 꼴받는데?

괜히 울컥해서 한 소리 하려던 순간.

꾸욱.

카를라가 내 등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스윽 돌아보자, 그제야 얼굴을 들어 올린 카를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아닌데요.”

“무슨 소리죠 카를라?”

“저 엘리…아니, 글렌시엘님 말처럼 그렇게 불쌍한 거 아닌데요. 주인님 저한테 엄청 잘해주시는데요.”

어린애가 고집을 부리는듯한 말투. 여기에는 엘리샤도 당황했는지 나와 카를라를 번갈아 보며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카를라는 이참에 한 번 내 자랑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건지,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용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해 볼게요.”

워낙 구석진 자리기도 하고, 사일런스 마법까지 걸려있으니 이쪽의 상황을 알 턱이 없는 웨이터.

그가 정중한 몸짓으로 요리를 내려두고 떠나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를라의 몫은 없다

노예라서 안 주는 게 아니다. 시종은 주인이랑 겸상하면 안 된다는 게 이 세상의 상식이라 그런 거다.

2인분의 식사를 본 카를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시나요 글렌시엘님?”

“뭐를 말이죠?”

“노예에게는 밥을 안 먹여요. 특히 저 같은 함부로 때리기 아까운 젊고 아름다운 노예에게는요.”

“…그럼 굶어 죽지 않나요?”

“아뇨. 대신 약을 먹이니까 죽진 않아요. 주인님 그거 꺼내주세요 그거.”

내 어깨를 콕콕 찌르며 재촉하는 카를라.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가만있으면 계속 찌를 기세라 일단 인벤토리에서 미리 사둔 식사 대용 알약을 꺼내자.

“흥! 뭔가 했더니 비상 식량용으로 만들어진 약이군요. 영양소는 충분하니, 밥 대신 약만 먹이는 건가요?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할 테니 미식을 보이지 않는 목줄로도 삼을 수 있겠군요.”

“조금 달라요. 여기엔 포만감을 주는 마법이 걸려있지 않거든요.”

“엣? 그럼….”

“맞아요. 미각이 아니라 배고픔을 목줄 삼는 거죠.”

“그,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엘리샤.

내가 한 거 아닌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 카를라가 나보다 한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너무하다니까요? 사람이 배고프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냥 배에 구멍이 뚫린 것 같고, 제 팔이라도 뜯어먹고 싶어지고, 빵 한 덩이만 준다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비참한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계속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하지만! 주인님은 달라요! 밥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해주시는걸요? 이 어찌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흐응…그러고 보니 아까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었죠. 여기서 보여주겠다는 소리인가요? 카를라 당신이 제대로 식사하는 모습을?”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까딱이는 엘리샤.

시종에게는 주인과의 겸상조차 허락되지 않는데, 나 먹으라고 시킨 음식을 넘겨주기까지 한다?

이건 이것대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긴 하지.

아마 엘리샤는 내가 체면을 버려가면서까지 카를라에게 식사를 넘겨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이에 카를라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잘 보세요!”

자연스레 내 옆에 서는 카를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꼬리가 불길하게 올라가 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 모양새. 이에 잠자코 어울려 주려, 모른 척 하고 있자.

돌연 카를라가 내 앞에 무릎 꿇고는 한쪽 다리를 뒤로 쭉 뺐다.

드르­

카를라의 발에 밀린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다가 말았다.

아마 엘리샤가 펼친 사일런스의 범위 바깥으로 밀려간 탓이리라.

­륵! 소리를 들었을 주변의 몇몇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야 식당 구석에서 사이런스 쳐두고, 무릎 꿇은 사람을 보면 누구나 놀랄만하지.

엘리샤는 엘리샤대로 카를라가 이리도 쉽게 무릎을 꿇을지 몰랐는지, 조금 전의 표정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카를라는 너무나도 태연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님 주인님. 부디 이 미천한 노예에게 즐거운 한 끼를 허락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응. 이거면 되겠지?”

내 앞에 놓인 여러 접시 중, 큼직한 고기가 놓인 접시 하나를 건넸다.

이를 공손히 받아 바닥에 내려놓은 카를라가 자신의 가슴 앞에서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잔뜩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이쯤부터는 슬슬 연기의 영역인지 어색한 느낌이 강했지만.

“아아…감사합니다 주인님.”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발등에 입을 맞추는 카를라.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기에 이번에는 나까지 잠시 멈칫했다.

나도 엘리샤도 모두가 멍하니 굳어있는 사이. 유일하게 카를라만이 어색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으니.

카를라는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만을 숙여, 조금 전에 받은 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강아지가 개밥이라도 먹는 것 같은 광경.

그 너머로 입을 쩍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이름 모를 학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화들짝 정신이 들어 잽싸게 카를라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끌어안듯 일으켜 세웠지만…이미 일은 벌어진 뒤.

식당에 있던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샤의 사일런스 마법 때문에 뭐라고 웅성이는 건지는 들리지 않으나,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어디 한번 해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샤와, 그 앞에서 내 발에 입을 맞추고 개처럼 접시에 코를 박은 카를라.

심지어 그 접시에 담긴 것이 한때 카를라가 자주 먹었을 아카데미의 유료 메뉴라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는 듯, 질색하는 시선이 엘리샤에게 쏟아진다.

슬슬 상황을 파악한 엘리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 아니에요! 오해라고요! 저는…저는 저런 거 시킨 적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사일런스 마법이 유지 중이기에 엘리샤의 말은 닿지 않겠지.

저들에게는 엘리샤가 갑자기 성을 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삽시간에 쓰레기가 되어버린 엘리샤.

내 품에 안긴 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를라가 작게 웃었다.

“헤헹.”

설마 노린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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