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신입생이 노예를 안 숨김(4)
* * *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은 집중되는 주변의 시선에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허나 눈을 감아도 기억을 지울 수는 없는 법.
총명한 그녀의 두뇌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조금 전의 광경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자신과 담소를 나누던 학생 중 하나가 최근에 실반 마탑에서 발표한 ‘하급 원소마법 전서 개정판.’ 을 읽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엘리샤는 차기 마탑주로서 얼마든지 설명해주겠다며 모르는 부분을 물어봤고, 그 학생은 자신의 시종을 시켜 맡겨둔 아공간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오라 시키려 했다.
…무릎을 꿇은 채,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는 여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예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한번 봤다면 쉬이 눈길을 돌릴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겁에 질린 토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파르르 떠는 모습은 가련하기 그지없었으며.
목덜미에 살짝 드러난 학대의 흔적은 이를 더더욱 증폭시켰다.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여인.
카를라 린델하이트.
학생 중 누군가가 카를라를 발견한 순간부터,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카를라의 정체에 대한 추측이 나도는 것도, 그녀의 주인인 얀델에게 뾰족한 시선이 향하는 것도, 차가운 반응에 압도당한 얀델이 불안한 눈빛으로 엘리샤를 바라보는 것도.
그리고 엘리샤에게 주변의 경악이 집중되는 것도.
전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엘리샤가 다시 눈을 뜨자마자 얀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기묘한 긴장감이 섞인 침묵 속. 엘리샤의 구두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그리고.
“얀델.”
“네 글렌시엘님.”
“제가 분명 주인으로서 아량을 베풀라고 하지 않았나요?”
엘리샤의 눈치를 보던 얀델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하, 하지만 글렌시엘님. 노예는 노예답게 굴어야 한다고도….”
“지금 제가 시켰다는 건가요.”
“아뇨! 아닙니다! 카를라!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 명령이다!”
엘리샤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지자, 기겁하며 즉시 카를라를 일으키는 얀델.
일견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지만, 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샤는 무려 모든 엘프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는 하이 엘프이자, 엘프 최고의 마탑이라는 실반 마탑의 후계자.
아무리 얀델이 상위반에 배정받을 만큼 재능있는 평민이라지만, 감히 엘리샤의 말을 거스르지는 못했으리라.
하여 지금의 카를라의 모습은 사실 엘리샤가 의도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겠지.
그리 여긴 주변은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엘리샤와 카를라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를라는 사이좋게 지내보려 하지만, 엘리샤가 일방적으로 질투와 열등감을 불태우고 있다는 일은 마법사 사회에서 제법 유명한 일이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하지 않나?
당연히 엘리샤 또한 주변의 확 깬다는 듯한 반응을 모를 수 없다.
엘프는 인간보다 몇 배는 감각이 뛰어나고, 하이 엘프는 그런 엘프를 훌쩍 뛰어넘는 민감한 감각을 가진다.
오감뿐만이 아니라 육감까지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인 엘리샤이기에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허나 구질구질한 변명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엘리샤의 드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까.
애초에 카를라에게 노예의 위치를 알려주라 말했던 건 엘리샤 자신이지 않던가.
스스로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 이는 분명 엘리샤가 가진 고귀함이리라.
하여 엘리샤는 무어라 해명하는 대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한 태도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른 체.
***
무사히 주변의 어그로를 엘리샤에게 핑퐁 시키는데 성공했다.
솔직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부 엘리샤가 카를라에게 분수를 알게 해주라고 한 게 원인이잖아?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그렇다고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동안 괜히 맘 졸이고, 휘둘린 게 억울해서가 아니다. 아니,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어쨌든 똑같이 비난받더라도 나는 얄짤없이 비자발적인 아싸가 되는 반면, 엘리샤는 친구가 조금 줄어들 뿐이잖은가.
몰락하기 전의 엘리샤가 가진 영향력은 그 정도다.
설령 평민을 시켜 과거의 라이벌에게 수치를 주었다는 소문이 돌더라도, 떨어지는 떡고물을 노리는 자들이 끊이지 않고 접근하겠지.
달리 말하면 몰락한 뒤에는 철저하게 고립된다는 소리다.
지금은 조금 물 멕이긴 하지만, 엘리샤가 가장 힘들 때 떠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은 나일 테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마치며 마지막까지 엘리샤의 눈치를 보는 연기를 하고 있자니.
드륵.
검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창백한 피부, 기이할 정도로 뇌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몸매와 살짝 튀어나온 송곳니.
뜬금없이 누가 봐도 나 뱀파이어요 하고 주장하는 것만 같은 여인이 데굴데굴 구르며 강의실에 들어오고는
“이오나 등장!”
무척이나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그리 외쳤다.
마치 지금 막 기둥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
참 불편해보이는 자세지만 이오나의 굴곡진 몸매를 잘 표현하는 자세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카를라 그리고 엘리샤를 번갈아 바라보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오나에게로 향했다.
하기야.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반쯤 가린 저 기묘한 자세에서 어떻게 눈을 돌리겠는가.
저건 또 뭐하는 녀석인가 싶겠지.
아, H&A에서의 뱀파이어는 적대 종족이 아니다. 예전에는 뱀파이어가 공적이었던 시기도 있었다는데….
사이좋게 악신한테 처맞고 동맹을 맺은 지 오래라는 설정이다.
주기적으로 죄인이나 몇몇 지원자들의 피를 공급받는 덕에, 직접적인 흡혈 없이도 잘 섞여 살고 있다고 했던가.
개체수는 적지만,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을 살며 무술과 마법을 수련했기에, 강력한 전력 취급받는다고 한다.
그런 뱀파이어가 아카데미에 올 만한 이유라면….
“안녕! 안녕! 내가 이 A반의 담당 교수인 이오나 프란체스카야! 다들 잘 부탁해!”
학생이 아니라 교수로서 온 거겠지. 사실 이오나가 A반 담당 교수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나 빼고는 전부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오나 교수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편하게 누나나 언니로 불러도 괜찮아! 우선 출석부터 확인해 볼까? 그럴까?!”
“““…….”””
아카데미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한 연장자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학생들.
더 이상 그들의 머릿속에 엘리샤와 카를라는 들어있지 않았다.
남는 것이라고는 10대 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추정 연령 400살 교수님의 기행뿐.
말 몇 마디로 주변의 관심을 휘어잡은 이오나가 히히 웃으며 출석을 확인하던 도중.
“어…? 와! 카를라! 다시 아카데미에서 만날 줄은 몰랐어! 반가워! 반가워!”
저 뒤쪽에 앉아있는 카를라를 향해 팔을 붕붕 흔드는 이오나.
이에 카를라가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꾸벅이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출석 체크가 끝났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그냥 간단한 강의 설명이랑 몇 가지 안내만 하고 끝낼게! 어차피 입학식 하느라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 거기에 아직 기숙사에 짐을 풀지도 못했을 거구.”
저 통통 튀는 목소리와 말투 덕분에 게임 시절에는 이오나의 존재가 A반의 가장 큰 메리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
그래봤자 공략 불가 캐릭이라 피눈물만 흘렸지만.
아무튼 이어지는 이오나의 설명은 내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지, 전공이 없는 1학년 때는 어떤 과목을 배우는지, 다른 학부와의 연계나 던전 실습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등등.
짤막한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해도 좋을 내용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아, 그리고 내일은 반 대표를 뽑을 거야. 유사시에는 나나 다른 교수님들을 대신해 A반을 이끌어야 하니 대련으로 정할 건데…이건 실력 테스트도 겸하니까 최선을 다해 싸워 봐!”
내일 있다는 대련에 관한 거겠지.
속칭 서열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게 제법 쏠쏠한 이벤트다.
반 대표가 되면 새로운 칭호를 얻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 소소한 부분에서 아카데미 생활이 편해진다.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실전 지향적이고, 능력 위주로 학생들을 대우하는 곳이니까.
서열전 공지를 마지막으로 설명을 마친 이오나가 활짝 웃으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
“자! 더 궁금한 거 있어? 아니면 모르겠는 거나. …없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했어! 다들 이제 밥 먹고 기숙사 가서 푹 쉬어! 내일 또 봐. 안녕!”
양팔을 휘적휘적 흔들며 강의실을 나가는 이오나.
다들 그런 이오나에게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주섬주섬 꺼내뒀던 물건들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나요 얀델.”
엘리샤가 그런 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글렌시엘님?”
“별거 아니랍니다. 그저 함께 식사라도 어떨까 해서요. …당신의 노예와 함께 말이죠.”
그런가.
내가 일부러 엘리샤에게 어그로를 떠넘긴 거라 생각하진 않더라도, 이 참에 한 번 제대로 정리하고 갈 생각인 거겠지.
짐짓 정중한 태도로 하지만 불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시엘님의 제안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바로 카를라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삼자대면…ON!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