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신입생이 노예를 안 숨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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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에 부쩍 요망해진 카를라에게 언젠가 본때를 보여주겠노라 다짐하며 북적이는 게시판 앞을 떠났다.
엘리샤와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A반에 배정된 걸 확인했으니 교실로 가야지.
“카를라.”
“네 주인님.”
“길 알지?”
“1학년 A반까지 가는 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죠. 가는 김에 아카데미 설명도 해드릴까요?”
“그럼 좋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진 표지판이나, 혹시라도 신입생이 길을 헤맬까 주변을 서성이는 사용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척척 나아가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의 뒤를 따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허….”
거대한 원의 형태로 만들어진 광장은 지금껏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넓었으며, 그 위를 오다니는 사람들 또한 그만큼 많았다.
그리고 중앙에 서 있는 검을 빼든 미청년의 동상과 그 뒤로 보이는 네 개의 첨탑.
세상에.
이 광경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H&A를 플레이하며, 모니터 너머로 질리게 봤던 풍경이지만…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네.
제자리에 멈춰서서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내가 충분히 감상했다 여긴 카를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중앙 광장이에요 주인님. 이곳은 아카데미의 모든 시설과 이어져 있으니, 앞으로도 자주 지나다니게 될 거예요.”
알고 있다. 언제나 게임에서 지역 이동을 할 때마다 여길 거쳐 갔었으니까.
맵에서의 순간이동 기능 좀 넣어주면 안 되냐고 몇번이나 문의를 넣었는데, 튜토리얼 스킵 기능처럼 절대 추가해주지 않았었지.
“저기 보이는 동상은 신들의 전쟁을 끝내고, 지금의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하신 초대 용사 라힘 님의 동상이에요.”
“평화로운 세상이라….”
확실히. 라힘은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
아무리 믿음직한 동료와 선신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나, 라힘은 인간의 몸으로 모든 악신과 그들이 타락한 원인을 봉인시키는데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사교도와 던전이 남았으며, 봉인은 언젠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 세상은 봉인으로 유지되는 세상이며, 그저 멸망을 조금 유예했을 뿐인 세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힘의 뒤를 이은 새로운 용사가 되어, 이번에야말로 모든 악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
그게 히어로 앤 아카데미의 세상에서 플레이어가 영웅으로서 맡은 일이며……이제는 내가 해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주인님? 왜 그러시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그냥 내가 정말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나 혼자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던 지난 3년과 달리, 이제부터는 스스로 위험한 일에 대가리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것이 제법 무겁게 다가왔다.
하지만 카를라는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랑한 가슴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나를 응원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마나 감응 불능 체질이셨죠. 괜찮아요. 이제는 아니잖아요? 저도 옆에 붙어있으니 분명 아카데미에서도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설마 내가 아카데미 생활을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저 초롱초롱한 루비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나 참…됐고. 이제 저 탑이나 좀 설명해줘.”
“앗! 제 정신 좀 봐. 저게 가장 중요한 건물이에요 주인님. 이 아카데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학과 건물이거든요.”
“왼쪽에서부터 기사학부, 마법학부, 신성학부, 제작학부 맞지?”
“헙! 어떻게 아셨어요 주인님?”
게임에서 직업군별로 몇 번이고 엔딩을 봤던 적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안내 책자에 다 적혀있더라고.”
“아….”
설명할 기회를 놓친 탓일까. 눈에 띄게 실망하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찰싹.
“히약!”
“딱 저 탑이 무슨 탑인지만 알아. 그러니 가면서 마저 설명해줘.”
자신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던 카를라가 내 말을 잠시 곱씹더니, 이내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우선 주인님이 소속되신 마법학부와 사이가 좋은 제작학부, 그 중에서도 연금학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카를라와 함께 중앙 광장을 거쳐 마법학부로 향했다.
***
띠링.
【우수한 성적으로 무사히 마법학부의 상위반에 배정받았습니다.】
【특별한 경험 충족!】
【새로운 칭호 ‘재능있는 신입생’을 획득하였습니다.】
“오.”
카를라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A반의 강의실. 그 안에 한 걸은 내딛는 순간 주르륵 떠오른 알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내가 가능하면 높은 반에 배정받으려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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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재능있는 신입생】
당신은 에우렐리아 대륙의 모든 천재가 모인 아카데미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입니다.
하지만 천재라고 하여 모두가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자만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세요.
당신은 아직 영웅이 아닙니다.
1개월간 스탯 성장치 20% 증가.
1개월간 특성 숙련도 상승치 20% 증가.
아카데미에서의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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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한 달 한정이지만, 20퍼 성장 버프를 어케 참음?
심지어 이게 시작일 뿐이지, 상위반에 배정받으며 얻는 이점은 아직도 잔뜩 남아있다.
칭호는 장착해야 온전한 효과를 발휘하고, 가지고만 있으면 절반의 효과밖에 발휘하지 못하기에 잽싸게 상태창을 조작해 칭호를 변경했다.
그동안 정든 길 잃은 이방인 칭호를 잠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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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길 잃은 이방인】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나요? 모른다고요?
저런.
어서 당신의 길을 찾으세요.
도보 이동 속도 2%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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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쓰레기네. 잘 가렴.
망설임 없이 칭호를 변경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흐흐….”
하지만 갑자기 멈춰서서 낄낄대던 모양새가 이상해 보였던 걸까. 카를라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주인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이제 들어가자. …아. 카를라 너는 어떻게 할래?”
“제가 없으면 주인님 안내는 누가 하겠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카데미에서 공식적으로 시종을 인정하는 만큼 강의실에 시종을 데려오는 학생도 제법 있다.
그래서 시종은 강의실 뒷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라는 교칙도 있고.
당연히 시종이 수업에는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귀는 열려있기에 수업을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보통은 시종이 수업을 들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가끔 재능있는 이들이 청강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깨우치는 경우도 있다는데.
이런 경우에는 아카데미 측에서는 시종을 특별 입학시키고, 주인 또한 그런 시종을 지원하는 게 일종의 관례이자 미덕이다.
당연히 그 시종은 자신에게 기회를 준 주인에게 평생을 충성해야 하고.
…뭐, 카를라는 노예라 그런 거 불가능하지만.
시종이 누군가에게 고용된 사람이라면, 노예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니까.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카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앉을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니터 너머로 본 적 있어 낯익은 사람과 처음 보는 사람들 뒤섞여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엑스트라로 구현되었던 이들이겠지.
다만 저들 중에서도 한층 더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으니.
벌써부터 파벌이라도 만든 건지, 아니면 이전부터 알고 있던 건지.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푸른 머리의 엘프가 바로 그러하다.
주변 사람들과 가볍게 담소를 나누던 엘리샤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꾸벅.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서로 아는 체를 하고서야, 적당한 자리를 골라잡았다.
A반은 조금 재밌는 게 상위반이라 시설도 좋고 강의실도 널찍하지만, 상위반이라 사람이 얼마 없다.
자리가 여유롭다 못해 남아돈다는 소리.
이제 곧 들어올 담당 교수를 기다리며, 인벤토리에서 카를라가 추천해준 마법서를 하나 꺼냈다.
‘한계 마력 소모 체증의 법칙을 우회하기 위한 간단한 수식과 이미지. 그리고 필자의 극히 개인적인 정신 관리법.’
뭔 놈의 제목이 이렇게 기나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마법서가 이런 식이니까.
카를라의 말에 의하면 마법을 쓰면 쓸수록 상상력과 의지가 고갈되어, 이를 보충하기 위해 무섭게 불어나는 마력 소모를 수식과 직관으로 억제하기 위한 내용이 담겨있다는데….
시스템 보정을 받는 내게는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그냥 쓰려고 마음먹으면 별다른 정신력의 소모 없이 안정적으로 마법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물론 언젠가는 보정의 원리를 머리로 이해하긴 해야겠지.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꺼낸 이유는 별거 없다.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위한 작은 연출일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웅성이는 주변의 학생들.
시작됐나.
아무것도 모른 척 가만히 책을 읽는 시늉을 하고 있자니, 점점 주변의 웅성임이 커졌다.
“저 시종은 왜 멀쩡한 의자를 놔두고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거지? 설마 주인이 시킨 건가?”
“아무리 시종이라지만 이건 좀….”
“바보야. 목덜미를 봐. 평범한 시종이 아니라 노예잖아. …그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카를라 린델하이트! 예전에 사교회에서 본 적있어! 확실해! 카를라 린델하이트 양이야! 린델하이트 가문이 사교도 혐의로 무너지고 노예가 되었다던데…진짜였구나.”
“잠깐. 그럼 아카데미 재학생이던 사람을 노예로 사 와서 아카데미로 들여온 거야? 심지어 이렇게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거고?”
“…나 봤어. 분명 저 사람이랑 같이 강의실에 들어왔던 것 같아.”
누군가의 말을 마지막으로 일제히 내게 쏠리는 시선. 이쯤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척 책에서 시선을 뗐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두리번거리고는.
마지막으로 잔뜩 기죽은 느낌으로 슬쩍 엘리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엘리샤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이를 따라가듯 내게 몰린 시선이 엘리샤에게로 옮겨간다.
“……!”
엘리샤의 하늘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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