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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32화 (32/230)

〈 32화 〉 신입생이 노예를 안 숨김(2)

* * *

카를라의 모습을 확인한 엘리샤가 하늘색 눈동자를 땡그랗게 뜨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

아니.

네가 하라며. 지켜보겠다고 협박 비스무리한 말도 남겼잖아!

어이가 없어 스윽 카를라를 돌아보자.

“……?”

카를라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를라 또한 엘리샤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거겠지.

반 배정으로 주변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주변에만 정적이 흐른다.

서로 무언가 중대한 착각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

황망한 심정으로 엘리샤를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황망한 시선을 돌려주는 엘리샤.

어이가 없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엘리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H&A의 주요 조연.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이라는 소리다.

내가 바깥에서 그렇게나 경계했던 자존심만 강한 귀족이나, 대체로 제정신이 아닌 마법사들과 동일선상에 세워서는 안 된다.

아무리 엘리샤가 카를라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집착하고 있다지만…카를라가 완전히 망가지는 걸 원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일전에 말한 밤 시중을 언급하며 카를라를 엄히 다스리라 했던 의미는 대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문득 조금 전부터 나와 카를라를 번갈아 보는 엘리샤의 눈빛이 어딘지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저거 처음 펠라 시켰을 때의 카를라와 비슷한 눈빛이잖아?

…따지고 보면 엘리샤도 카를라 못지않은 아가씨네.

실반 마탑은 엘프들의 마탑. 그런 곳에서 하이 엘프로서 자랐으니 거의 평생을 공주님 취급받았으리라.

당연히 성적인 부분의 지식도 처음 사 왔을 때의 카를라와 비슷한 수준일 테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H&A에서의 엘리샤도 상당히 순진했었다.

당시에는 전연령 게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생각했는데…실제로 엘리샤의 성적 관념이 전연령 판에 한없이 가까운 거라면?

그렇다면 엘리샤가 아는 밤 시중은 나나 카를라가 아는 밤 시중보다 훨씬 더 소프트한 느낌이겠지.

아마 카를라가 말했던 평범한 귀족 여인의 성교육 수준 정도 아닐까?

혹시 모르니 슬쩍 엘리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글렌시엘님?”

“무, 무슨 일인가요 얀델?”

갑자기 불릴 줄은 몰랐는지 순간 어버버하는 엘리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이엘프는 감각이 예민하다고 하니, 이 정도 거리는 괜찮겠지.

“혹시 글렌시엘님이 말씀하신 밤 시중은 어떤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본래라면 터무니없이 무례한 질문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야겠군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엘리샤가 부채를 촤악 펼쳤다.

그렇게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 얼굴만 슬쩍 들이민 엘리샤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봉사하며 동침하는 것 아닙니까.”

“어…그럼 밤 시중드는 노예를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면 어떻게 혼내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엘리샤 하늘색 눈동자를 두어번 깜빡이고서야 대답했다.

“엉덩이 팡팡…?”

“…….”

오케이.

이걸로 확실해졌네.

엘리샤는 이런 쪽으로는 응애나 다름없다.

이쯤 되자 카를라도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대충 눈치채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하기야. 노예가 되기 전의 자신을 상상하면 되는 일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겠지.

다만 이런 우리의 반응을 무어라 해석한 건지 엘리샤의 얼굴이 점점 펴지더니, 이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어머? 아무래도 얀델 당신이 제 말을 조금 과잉 해석하신 것 같군요.”

“예, 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전부 이해한다는 듯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려다 카를라의 몰골을 보고 멈칫하는 엘리샤.

“흠흠. 제 관심에 성심껏 응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이곳이 배움의 터인 아카데미라는 사실을 신경 써주시면 더욱 ‘감사’할 거랍니다.”

조곤조곤 타이르는듯한 말투.

하지만 내용을 잘 들어보면, ‘우리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 데 없었던 일로 칠까?’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굳이 감사를 강조한 건 일전에 말했던 보수를 더 좋은 걸로 얹어 주겠다는 소리일 테고.

다만 이 또한 문제가 있다면…조금 전의 엘리샤의 말이 주변에 어떻게 들릴지 정도려나.

앞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단순히 내 밤 놀이를 지적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

뭐, 엘리샤 입장에서는 나름 원만한 타협을 위해 내놓은 말이겠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전부 내 잘못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지금도 귀를 기울여보면 아닌 척 하면서도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세상에…사람은 얼굴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더니…저 곱상한 얼굴로 대체….”

“평민이라고 했던가요? 이래서 천박한 것들은 천박한 티가 난다니까요.”

“쯧. 신성한 아카데미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 역시. 이런 느낌인가.

앞으로의 일에 평판이 중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꼴아박을 이유 또한 없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평판이 깎여도 3개월간 엘리샤라는 뒷배를 얻을 수 있을뿐더러, 이 모든 건 엘리샤의 사주였다! 라는 변명 거리도 뒤집어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온전히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꼴.

이건 좀 곤란하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걸 하이 엘프인 엘리샤가 못 들을 리 없겠지.

자기 딴에는 오해를 풀고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에서 꺼낸 말이 이렇게 들릴 줄은 몰랐던 걸까.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긴 하지만, 그 위로 드러난 엘리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자기가 또 오해하기 딱 좋게 말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리라.

“아니, 저…그게….”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입을 여는 엘리샤였지만…그보다 카를라가 한 발 더 빨랐다.

양팔을 활짝 벌리며, 내 앞을 가로막은 카를라가 빼액 소리쳤다.

“주, 주인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카를라?”

이건 생각도 못 했는지 흠칫한 엘리샤.

지금 같은 꼴이 되어서도 나를 변호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겠지.

“한낱 노예일 뿐인 제가 예전처럼 글렌시엘님에게 친한 척 말 걸어서! 그래서 주인님께서 저를 혼내신 거예요!”

“카를라 당신 지금 정말로….”

아침에 했던 카를라의 말이 맞다면, 엘리샤는 카를라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거짓으로 꾸며낸 건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카를라에게서는…나조차 알 수 있을 법한 절절한 진심만이 전해져오고 있는 상태다.

“이 미천한 노예의 잘못으로 주인님께서 글렌시엘님께 고개 숙여 사과하셔야 했으니, 저 또한 몸뚱이로 주인님께 사죄드려야 했을 뿐이에요!”

“모, 몸뚱이라니 대체 뭘 어떻게…!”

침을 꼴깍 삼키며, 카를라의 목덜미에 난 키스마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리샤.

카를라가 목덜미의 키스마크를 슬쩍 손으로 덮었다.

“헤헤…제가 멍청한 게 잘못이에요. 주인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저 글렌시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처지를 다시 일깨워주셨을 뿐인걸요.”

갈 곳을 잃은 시선은 쉴 새 없이 흔들렸으며, 가녀린 팔다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어색한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마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괴로워하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은 단순히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느라 과부하 걸린 거지만.

애초에 저 키스 마크는 카를라가 키스해달라고 졸라대길래, 전신에 마구 새겨준 것 중 일부인데 안 좋은 기억일 리 없잖은가.

다만 주변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탓하던 주변의 시선이 엘리샤를 향해 옮겨갔다.

나 때와 달리 말조심이라도 하려는 건지 아무런 수군거림도 없었으나, 꼭 말로 해야 뜻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지금쯤 저들의 머릿속에서는 한편의 이야기가 완성됐을 것이다.

한때 린델하이트 가문의 영애와 실반 마탑의 후계자로서 가깝게 지내던 둘.

하지만 둘 사이의 격차를 절감하면서부터 점점 서로의 거리는 멀어졌고, 그 사이에는 질투와 열등감만이 들어찼다.

그러던 어느 날. 사교도 혐의로 린델 하이트 가문이 몰락하여 노예가 되어버린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닌지, 노예의 신분으로나마 다시 아카데미에 돌아와 옛 인연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일갈. 그리고 주인을 향한 타박.

그로 인해 내가 조금 과할 정도로 카를라를 교육시켰더니, 이번에는 자기만 쏙 발을 빼려 하는 엘리샤.

지금도 주인이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면 그 여파가 자신에게 미칠까, 처음부터 자기 잘못이라며 나서는 카를라.

군중의 시선이 살짝 차가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아마도 같은 것을 떠올렸을 엘리샤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 됐어요! 카를라!”

그리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잔뜩 지친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얀델. 당신의 교육은 이제 충분한 것 같으니, 주인된 자로서 아량을 베풀도록 하세요.”

“글렌시엘님의 조언. 깊이 새기겠습니다.”

“하아…그럼 이제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A반이라고 했던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얀델.”

“저 또한 글렌시엘님과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 대답하자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화답한 엘리샤가 호다닥 자신의 시종과 함께 멀어진다.

내 앞에 홀로 남은 카를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잘했어.”

“주인님?”

노리고 한 것은 아닌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귓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카를라. 일단 오늘 하루는 예정대로 해보자.”

“어…더 이상 엘리샤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엘리샤한테 보여주려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거지.

적어도 소문이 가라앉기 전까지는 내가 카를라를 어떻게 대하건, 전부 엘리샤의 강요 때문이라고 생각하리라.

지금껏 휘둘렸으니, 이 정도 소소한 복수는 괜찮지 않겠는가.

“아, 물론 카를라 네 말대로 꼭 할 필요는 없으니 싫으면 말해.”

“저는 상관없어요. 애초에 하기로 했던 거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잘 해내면 상 주실 거죠?”

“당연하지.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으음….”

내 말에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를라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이요.”

“…….”

이런 요망한 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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