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이 입학시험은 안전합니다!(5)
* * *
떨리는 카를라의 손을 살포시 붙잡고,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딱 3개월만 그때 배운 대로 해보자.”
장담컨데 처음 사 왔을 때의 그 모습을 보여주면 아무도 의심 못할 거다.
카를라가 그제야 이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분명 주인님 말씀대로 되겠네요. 다들 주인님이 엄청 나쁜 주인님인 줄 알 거예요.”
“그렇지? 말 나온 김에 식사 대용 알약도 몇 개 사 가자.”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카를라.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촉촉한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처량하게 늘어진 어깨를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것 같네.
붙잡은 카를라의 손을 들어 올리고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 으에…?”
당황한 카를라의 모습에 피식 웃어주었다.
“카를라. 너 바보야?”
“아, 아닌데요? 카를라 바보 아닌데요?”
“맞는 것 같은데…생각해 봐. 내가 지금 뭐 때문에 귀찮은 짓거리를 하는 거겠어?”
“…글렌시엘 님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구요?”
“틀렸어. 아, 그리고 본인 없을 때는 편하게 엘리샤라고 불러도 돼. 당장 나도 그러고 있잖아?”
어차피 안 보이는 데서 하는 말인데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 있겠는가.
“솔직히 글렌시엘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조금 어렵단 말이지. 나중에 아카데미에서만 좀 조심하면 괜찮겠지.”
“엇, 네…그럼 엘리샤 때문이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당연히 있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를 가리켰다.
“이거 다 널 안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데 정말 밥 대신 약만 먹이겠어? 다 블러프야 블러프. 어차피 마나 코어 덕에 살 안 찐다 했으니, 나중에 기숙사에서 몰래 먹자고.”
“……!”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카를라.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다.
그 모습에 낄낄 웃고는 미리 따라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탁.
컵을 식탁에 내려놓자, 그제야 경직에서 풀린 카를라가 연신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물었다.
“저, 정말요?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어.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는 거지,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해서 할 생각은 없어.”
온전한 내 것.
이방인인 내게 그만큼이나 달콤한 울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 타협할 생각 없다.
“흐, 히. 헤헤…흐헤헤헤헤….”
독점욕으로 가득 찬 말이 뭐가 그리 좋은지, 칠칠치 못한 표정으로 헤프게 웃어대는 카를라.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으로 뒤덮였다.
“그으…주인님? 조금 전의 그 말은 정말 기뻤지만, 녹음 수정구로 녹음해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한 번씩 듣고 싶을 정도지만, 언젠가 제가 죽으면 그 무덤에 수정구도 같이 묻어줬으면 할 정도로 좋았지만….”
아니,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건데?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카를라의 취향을 머릿속에 메모하는 사이. 카를라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주인님의 평판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겠지.”
당장 입학시험의 시험관이었던 메이킨 교수도 카를라에게 호의적인 분위기지 않았던가.
아마 카를라와 인연이 있는 고학년이나 교수 중에는 아직도 카를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카를라를 ‘노예’ 처럼 다룬다는 건 품격이 떨어지는 짓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자신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
누구나 자위는 하지만, 바깥에서 ‘전 하루에 3번씩 딸칩니다!’ 하고 외치면 그건 미친놈이잖은가.
카를라를 노예로 사들인 이상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다들 추측할 수 있으나, 내가 직접 티를 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는 소리다.
당연히 주변 평판은 안 좋아질 수밖에 없고.
“하지만 그뿐이야.”
지구라면 모를까 이 세상은 노예가 합법이다. 그리고 노예는 인간이 아닌 물건이나 가축 취급이잖은가.
내가 카를라를 어떻게 대하건, 이를 구실 삼아 불이익을 줄 수는 없다.
“물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뒤에서 욕하기도 하겠지. 아직 카를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적당히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그러나 고작 거슬린다는 이유로 교칙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강제하려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 세상에서 아카데미의 위상은 어중간한 귀족이 비벼볼 만한 수준이 아니니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능력이 있는 사람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일에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으리라.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카를라가 사교도의 딸이라는 이유로 노예가 되었을 때 도와주려 했겠지.
“그런 사람 있었어?”
“…아뇨. 없었어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카를라.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사교도란 절대적인 악이며, 아카데미는 그러한 사교도와 몬스터를 조지는 법을 배우는 곳이니까.
안타까워할지언정 카를라를 위해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은 없었겠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때도 안 나선 사람이 이번이라고 나서겠어? 너 하나 비참하게 만들겠다고 나선 엘리샤가 특이한 경우라고.”
“하, 하지만 주인님은 평민이시잖아요. 주인님을 만만하게 보고 시비 거는 사람도 있을걸요?”
“그야 그렇겠지. 아카데미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니까. 근데 생각해봐 카를라. 내가 너를 괴롭히는 게 다른 사람 눈에는 엘리샤의 명령 때문으로 보일 거 아냐.”
“맞아요. 처음에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주인님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건지 알게 되겠죠.”
“내 지위를 만만하게 보고 시비 걸 만큼 계급에 민감한 애들이 엘리샤 눈치는 안 보겠어?”
“아.”
“무엇보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무렵의 내게 주변의 평판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평판은 결국 아카데미 졸업 이후의 일을 염두에 두기에 중요한 건데…애초에 그때쯤이면, 세상이 멸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을 것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죽어 나갈 텐데, 아직 재학생인 녀석들이 도움이 돼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불특정 다수의 평판이 아니라, 끝까지 나와 함께할 몇몇 영입 예정자들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기구한 사정을 안고 있다.
게임에서는 개별 스토리로 불리며, 호감도작을 할 때 해결해줘야 하는 서브 퀘스트같은 느낌이었지.
당장 엘리샤도 마탑이 공중분해 되며 한순간에 몰락한 처지가 되고, 그런 엘리샤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스토리가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내 평판이 안 좋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기껏해야 내 귀가 좀 간지러운 정도?
뭐, 여기까진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제 대충 이해됐지?”
“네. 어차피 졸업 이후의 주인님은 감히 누구도 깎아내릴 수 없는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있을 테니 괜찮다는 거군요! 역시 주인님! 다 생각이 있으셨네요!”
나를 자신의 선조와 같은 마법 천재라 여기는 카를라가 알아서 이해해줄 테니까.
기대된다는 듯이 해맑게 웃는 카를라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어내리던 도중.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카를라. 그러고 보니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주인님. 무슨 일인가요?”
“대체 엘리샤는 왜 이렇게 너를 싫어하는 거야? 혹시 어렸을 때 줘 패기라도 했어?”
H&A에서는 엘리샤의 성격이나 가치관 같은 설정은 보여줬어도, 과거의 이야기는 알려주지 않았었다.
어쩌면…?
내 합리적 의심에 고개를 휘저으며 격하게 백금발을 흩날리는 카를라.
“네?! 아뇨!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저희 예전에는 사이좋았어요! …어느 날부터 엘리샤가 절 피하기 전까지는요.”
이어지는 카를라의 말은 꽤나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마도명가의 영애와, 마탑의 후계자로서 만날 일이 잦았던 카를라와 엘리샤.
어릴 때야 그냥 사이좋게 언니 동생하며 지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원인은 둘의 배경.
원소 마법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마도명가 린델하이트와, 엘프 최고의 마탑이라면서 아직 과거의 정령술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실반 마탑.
실반 마탑은 일방적으로 린델하이트 가문에 열등감을 품고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엘리샤에게 이어졌다.
“실반 마탑에서 엘리샤를 막 몰아가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저 엘리샤로서는 저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흔한 일이지.”
“그쵸. 제가 보기에도 엘리샤는 저랑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았지만…비슷한 수준으로는 절 넘어설 수 없었어요.”
서로의 재능 자체는 비슷한 수준이라는 카를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겠지.
실제로 게임 후반부까지 키운 엘리샤는 20대 중반에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내니까.
미래의 대마법사 소리를 듣던 카를라보다 못하지는 않으리라.
“다만 나이 차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도 엘리샤도 비슷한 재능을 가졌고,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하면, 당연히 4년이나 먼저 태어난 제 실력이 뛰어난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카를라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다. 허나 엘리샤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날이 커지는 열등감, 마지막까지 자웅을 가리기도 전에 몰락해버린 라이벌. 그리고 갈 곳을 잃은 감정.
“물론 직접 물어본 건 아니기에, 전부 제 추측이지만…아마 이래서 삐뚤어진 게 아닐까 싶네요.”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카를라.
생각해보니 개별 스토리로 본 엘리샤는 최고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었지.
꼭 마법이 아니더라도, 장비, 가구, 식사, 인맥 등.
모든 부분에서 최고를 원했고, 그렇기에 무너진 현실 앞에 크게 절망했었다.
뭐, 나중에는 본인이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마법사가 되면, 자신이 걸친 모든 것이 자연스레 최고가 된다며 집착을 덜어내고 새로운 특성을 각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그렇게 잠시 예전의 기억을 정리하는 사이.
똑똑똑.
어느새 주문했던 요리가 도착했다.
“타이밍도 좋네.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먹자.”
“네! 정말로 더 시켜도 되는 거죠 주인님?”
“응. 많이 먹어야 밤에 버티지. 오랜만이니까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거든.”
“…아.”
마차로 이동하는 요 며칠간은 마법에 집중한답시고 의도치 않은 금욕 생활을 했던 탓일까.
쌓인 게 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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