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이 입학시험은 안전합니다!(2)
* * *
엘리샤가 내게 카를라를 괴롭히라는 압박을 넣었지만…내가 거기에 따를 이유는 없다.
아카데미의 교칙이나, 이제 5년 내로 멸망의 위기를 겪을 세상, 그 사이에 강해져 있을 나 자신의 무력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엘리샤가 알아서 몰락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카를라의 린델하이트 가문이 사교도 혐의로 몰락한 것처럼, 엘리샤의 실반 마탑은 금지된 연구를 행하다 대륙의 공적이 되어 무너진다.
참고로 실반 마탑 쪽의 일은 누명이 아니다.
정말로 탑주와 간부급 마법사들이 금지된 연구를 행하다, 그 여파가 탑 외부까지 영향을 끼친 탓에 결국 들켜서 토벌당한 거지.
그나마 다행인건 사교도 혐의와 달리, 금기 연구에는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일까?
덕분에 아카데미에 있던 엘리샤는 엄중한 조사 끝에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뒷배고 뭐고 전부 잿더미가 된 상태.
결국 엘리샤는 학비는커녕 당장의 식비마저 모자란 상황에 처한다.
그런 엘리샤를 도와주는 게 H&A에서의 엘리샤 영입 루트였고.
긴 호감도 작업이나, 특수한 업적을 달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밥 좀 사주며 응원 몇 번 해주면 초반부터 영입 가능해지는데, 심지어 능력까지 좋다니.
그야말로 뉴비를 위한 동료!
…다만, 이쯤 되면 슬슬 궁금해질 것이다.
대체 실반 마탑이 행했다는 금지된 마법이 뭔지, 어떤 짓을 저질러야 마탑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건지 말이다.
게임 내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이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실반 마탑이 저지른 금기는 무려….
정령 소환이다.
“웃기는 일이지. 실반 마탑은 소속 마법사 전원이 엘프로만 구성되어있는데.”
“네? 그렇죠.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요 주인님. 엘프는 동료 의식이 강하니, 글렌시엘 님이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에요. 설령 그게 생면부지의 타인을 해치는 일이라고 해도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진지한 얼굴로 걱정해주는 카를라.
기특한 마음에 백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더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금세 풀어진다.
“헤헤….”
안심한 표정으로 헤실대는 카를라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물었다.
“카를라.”
“네?”
“정령 소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방금까지 당근을 입에 문 토끼처럼 좋아하던 카를라가 먹고 있던 당근을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정색했다.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금기죠.”
그렇다.
이게 정령 소환에 대한 이 세상의 인식이다.
“서, 설마 주인님 정령에 관심이 생기신 건 아니죠? 절대 안 되요! 절대! 주인님 없어지면 저 못 살아요!”
“진정해. 그런 거 아냐.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무엇보다 내 귀를 봐. 내가 멀쩡한 마법 놔두고 정령술 같은 거에 손댈 이유가 있겠어?”
“휴우…그럼 다행이네요. 마법은 제가 비전이고 뭐고 싹 다 알려 드릴 테니, 그런 위험한 거에는 제발 눈길조차 돌리지 말아주세요. 주인님.”
동글동글한 귀를 보여주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카를라.
카를라가 간단히 납득한 이유는 간단하다.
엘프의 피를 이은 게 아닌 이상, 정령보다 그냥 마법이나 오러를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
정령을 소환하는 건 약간의 마법적 소양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령과 교감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사실상 정령술이란 엘프의 전유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 이런 지식이 보편적으로 퍼졌을 만큼 정령술은 메이저한 기술이었다.
300년 전까지는.
신들의 전쟁.
H&A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선신과 악신의 길고도 처절한 전쟁.
하지만 악신이 처음부터 에우렐리아 대륙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정신 나간 대마법사가 다른 차원을 연구하다가 실수로 외계의 신을 불러들였고, 그들이 이 세상에 정착하며 악신으로 불리게 된 것이지.
세상을 한번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전쟁의 발단이 ‘바깥’ 에서 온 존재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 모든 소환술 종류가 금기로 지정되었다.
정령 소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정령계도 어쨌든 다른 세상이니, 악신처럼 의도치 않게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나?
정령 소환이 금지되며 기존의 정령술사들은 모두 계약을 해지하거나, 이를 거부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엘프들은 오로지 궁술과 마법에 전념했고, 실반 마탑도 그렇게 생긴 마탑 중 하나였다.
엘프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정령을 소환하다 훅 갈 예정이지만.
아무튼, 정령만으로도 이렇게나 치를 떨어대는 세상인데,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얄짤없이 사형이지.
설령 내가 모든 악신을 쳐죽이고, 세상의 멸망을 막으러 왔다는 소리를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내가 외부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매달아버리려고 할 테니까.
…어쩌면 카를라조차도.
씁쓸한 마음에 괜히 카를라의 코를 꼬집었다.
“쁘엥!”
이상한 소리를 낸 카를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연신 눈동자를 깜빡였다.
뭐…기껏 주인을 걱정해줬더니, 꼬집힘이 돌아오면 의아할 만 하지.
하지만 이유를 알려줄 생각은 없다. 이건 언젠가 이 세상의 엔딩을 본 이후에도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니까.
아무 말이 없자, 결국 이유 없이 꼬집은 것이라 생각한 걸까.
카를라의 루비색 눈동자에 약간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들어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노예의 삶인 것을.
…그래도 너무 괴롭히기만 하면 미안하니 당근을 하나 더 주기로 했다.
“카를라.”
“녱.”
입술을 삐죽 내밀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카를라에게 앞쪽을 가리켰다.
“이제 슬슬 내 차례인데, 시험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네?”
코을 부여잡던 손도 놓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카를라.
“그, 왜. 여기까지 오면서 마법 가르쳐주기도 했고, 경비대에서 사정 청취하느라 흐지부지 돼버렸지만 코어 잘 만들어줬으니 맛난 거 사주기로 했었잖아.”
“…….”
“아카데미 근처는 나보다 카를라 네가 더 잘 알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디서 뭐 먹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 놔. 가격은 걱정할 필요 없고.”
내 말에 카를라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내게 달라붙었다.
“쭈인님!”
이걸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얼굴을 내 목덜미에 부벼대기까지 했다.
“쭈인님! 쭈인님! 쭈인님!”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
안 그래도 엘리샤가 왔다 가며,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달라붙기까지 하니 더더욱 시선이 집중된다.
저들 중 대부분이 입학시험에서 떨어질 테니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주인님은 부끄럼쟁이셨군요!”
“내가?”
이건 또 뭔 소리람.
“그렇잖아요! 글렌시엘 님의 건은 걱정 말라고, 따로 벌을 줄 생각은 없다고 말씀하시면 되는 걸 이렇게 빙 둘러 상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거잖아요?”
“……?”
그런 의미 없었는데?
대체 카를라의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헤헤…자비로우신 주인님. 주인님이 제 주인님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주인님은 모를 거에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마냥 실실 웃는 카를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솟아오르는 장난기에 카를라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카를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닌데?”
“…헤?”
“상은 상이고, 벌은 벌이지. 오늘 밤은 각오해.”
“……!”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리는 카를라의 초점.
그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라도 찍힌 것 같은 모습에 낄낄대며 농담이라 덧붙이려던 순간.
“다음 지원자! 얀델은 시험장으로 올라오시오!”
“앗, 예!”
내 차례가 왔길래 일단 시험부터 치르기로 했다.
***
어째서인지 나라를 잃은 것처럼 허망한 눈빛의 카를라를 데리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인지, 서류 뭉치를 든 시험관이 무언가 끼적이며 입을 열었다.
“시험은 저 위에서 치러지니 시종은 여기서 대기해야…카를라 양?”
“아…메이킨 교수님…오랜만이에요….”
“카를라 양이 어떻게 다시 아카데미에…? 그보다 왜 이렇게 눈빛이……아, 그렇게 된 거군요.”
카를라의 목에 새겨진 노예 각인과 나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의 여인.
시험관으로 온 교수가 카를라와 구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카를라? 이 분이랑 아는 사이야?”
“네 주인님. 제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때, 부전공으로 배웠던 인챈트 학과의 교수님이셨어요.”
“아하?”
어쩐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다가다 만난 수준이 아니라, 제법 인연이 깊은 상대인 것 같더라니.
과거의 스승님이라 이거구만.
그나저나 메이킨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네.
이름 없는 엑스트라라면 모를까, 전부 이름이 붙어있는 교수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 그건가?
튜토리얼…그러니까 본래 일어났을 혼탁한 합일의 시험장 습격 사건 때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어 일선에서 물러났다면 내가 모르는 것도 이해된다.
내가 까먹은 교수가 있다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여전히 카를라와 메이킨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
“…….”
메이킨은 한참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카를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카를라는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네.
내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 같은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런 태도라니.
엘리샤 때야 상대 쪽에서 시비를 걸어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은가.
하여 카를라의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팡!
“히약!”
“뭘 멍하니 있어. 시험장에는 나 혼자 가야 한다니 넌 저기에 앉아있어 카를라.”
“앗, 넵! 알겠습니다 주인님.”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전 주인님이 허락하신 음식밖에 안 먹어요. 제 몸도 마음도 전부 주인님 거니까요.”
“내 친구라며, 내가 찾는다고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인님은 친구 없으세요. 거짓말이 분명하니, 명령하신 대로 여기서 마저 주인님을 기다릴게요.”
“좋아. 잘했어.”
“히히….”
칭찬의 의미로 턱을 살살 간질여주자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해맑게 웃는 카를라.
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말한 이후로 아부가 많이 늘었단 말이지.
그렇게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온 카를라가 근처의 의자에 앉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시험관님? 그냥 이 위로 올라가면 되나요?”
눈 앞의 작은 무대를 같은 곳을 가리키자 메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험 방식을 설명해주었다.
“…맞습니다. 그냥 올라가시면 바로 시험이 시작되니, 나타나는 몬스터의 환영을 최대한 쓰러뜨리면 됩니다. 다양한 방면에서 지원자의 재능을 판별하니, 꼭 몬스터를 쓰러뜨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쓰러뜨린다면 가산점이 주어지지만요.”
묘하게 쓰를 강조하는 것같은 말투.
너무하네. 나 정도면 진짜 좋은 주인인데.
뭐, 조금 전의 장면만 보면 충분히 오해할만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으니, 적당히 어깨를 으쓱이고서 시험장 위로 올라갔다.
상대가 진짜 몬스터는 아니지만, 마법을 배우고서 처음 겪는 전투다.
튜토리얼이라지만 어쨌든 지금은 H&A의 본편에 속하는 시점.
엿같은 스킵 불가 때문에 내가 튜토리얼을 몇 번이나 돌았는데…설마 한 번에 탈락하겠어?
“함 해보자고.”
처음 배정받는 반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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