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9화 (19/230)

〈 19화 〉 스킵(물리)(2)

* * *

히어로 앤 아카데미.

이름만 들어도 감이 오겠지만, 이 세상을 똑 닮은 H&A는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다.

그래서인지 아예 게임 시작 시의 튜토리얼부터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이고.

숙련된 게이머라면 입학시험이 튜토리얼이라는 점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입학시험 도중에 무언가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실제로 악신의 추종자들의 입학시험을 노리고,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게 바로 튜토리얼 내용이고.

뽈뽈뽈 돌아다니며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힌 플레이어에게 사교도들은 여러모로 편리한 교보재였지.

전투 시스템은 물론이고, 악신의 추종자가 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 선신과 악신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줄 수 있으니까.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개발자의 의욕이 조금 과했다는 점이려나.

어찌어찌 잡몹들을 처지하고 습격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는 튜토리얼 보스.

혼탁한 합일의 주교 피에트로.

녀석과 조우하는 순간 스킵할 수 없는 컷신이 시작되며, 피에트로의 입을 통해 세계관을 설명해준다.

무려 5분에 걸쳐서 말이다.

과장이 아니다. 내가 직접 재봤더니, 정확히 5분 12초가 나오더라.

중요한 컷신이라고 나름 신경 썼는지 퀄리티는 굉장히 좋았지만…그럼 뭐 하는가.

5분간 꼼짝없이 봤던 컷신을 또 봐야 하는데.

이러한 개발사의 삐뚤어진 편애 덕에, 비호감 NPC 유저 투표에서 몇 년간 1위를 고수하던 피에트로.

녀석이 방금 죽었다.

던전을 나오자, 익숙한 등짝과 지겨운 목소리가 들리길래 반사적으로 찔렀더니.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진짜 죽었나…?”

툭툭.

바닥에 널브러진 피에트로를 발로 건드려 보았지만 미동조차 없다.

애초에 처치 알람까지 울렸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스킵(물리)에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자, 그제야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희열이 차올랐다.

“해냈다…!”

마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

입가가 근질거리며 절로 실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의 이 기분을 고스란히 담아, 빙글 뒤를 돌며 손을 흔들었다.

“흐흐…카를라! 방금 봤어? 피에트로 이 말 많은 사교도 놈이 몇 마디도 못하고 그대로 픽 죽었다니까?! 이렇게 커억! 하고!”

“…….”

너무 들뜬 나머지 손짓발짓까지 동원해가며, 조금 전의 일을 자랑했으나.

어째서인지 카를라는 제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은 채,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응?”

처음 사왔을 때처럼 겁먹은 토끼 같은 모습.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를라가 천천히 다가와 그나마 깨끗한 쪽의 소매로 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자연스레 가까워진 거리.

카를라의 루비색 눈동자에 비친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피칠갑이 된 채, 해맑게 웃고 있는 흑발 자안의 미소년이라. 이거 완전 그건데.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대들조차 얼떨떨함과 꺼림칙함이 뒤섞인 얼굴….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미친놈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해하다는 어필을 위해 얌전히 카를라의 시중을 받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흠. 운이 좋았네. 경비대분들이 고전하던 적이 마침 던전 입구를 등지고 있을 줄이야.”

“…….”

말없이 끄덕이는 카를라.

“아, 그나저나 던전을 클리어하며 받은 보상이 이 단검이거든? 나중에 한 번 빌려줄까? 신들의 은총에 대해 궁금해했잖아.”

“…….”

이번에도 말없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뭐야. 아까 입을 막고 있던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갑자기 왜 이래?”

살짝 추궁하자, 그제야 카를라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 조금 전에 주인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사교도는 말이 많아서 짜증나신다고….”

“그래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뭘 그런 걸 신경 써. 카를라 네가 사교도인 건 아니잖아.”

“주인님….”

살짝 감동받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카를라.

조금 양심에 찔리네.

당사자인 카를라조차 자기가 사교도의 딸로 알고 있을 만큼 정교하게 조작해두긴 했지만.

애초에 카를라의 아버지가 사교도였다는 것 자체가 누명이잖은가.

괜히 카를라로부터 스윽 시선을 돌리며, 아직까지 손에 들려있는 이번 던전의 보상을 바라보았다.

======================

【빛나는 사자 단검】

폼멜에 울부짖는 사자 조각이 새겨진 순백의 단검.

금속이라기 보다 뼈에 가까운 질감의 검신은 때때로 따스한 빛을 내뿜는다.

성스러운 광휘를 두른 단검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광휘는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리라.

­공격시 10% 확률로 광 속성 추가 데미지 부여.

­치명타 데미지 30% 증가.

­사교도를 상대할 경우 추가타 확률과 치명타 확률이 100%로 고정.

======================

광 속성 추가타는 확률이 낮고, 치명타 데미지 증가는 단검류에 붙어있는 기본 옵션이다.

하지만 이 단검의 진가는 마지막 옵션에 있다.

사교도 상대로 확정 추가타와 확정 치명타라니.

사실상 사교도 상대로는 극독이 발린 비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본인이 쓰든, 파티원에게 주든, 하나쯤은 보조 무기로 채용하기 딱 좋은 무기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사교도를 상대로 한 옵션이기에, 후반부에 많이 등장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이나 악신의 사도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귀속템이기에 실수로 마법사나 궁수가 잡으면, 예쁜 쓰레기가 된다는 단점이 있다만….

여긴 현실이잖은가.

근접 공격을 아예 못 하던 게임 속 마법사와 달리, 숙련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얼마든지 단검을 휘두를 수 있다.

아니면 염력 마법으로 단검을 투척한다던가 하는, 본래의 시스템엔 없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단순한 게임이던 시절보다 몇 배는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보상이지만, 피에트로를 죽이며 정의로운 광명에게 태양신의 가호 특성까지 받았잖은가.

‘상태창.’

======================

【태양신의 가호(C)】

하늘 위의 가장 빛나는 존재. 태양의 주인이 당신에게 자신의 광휘를 나누어 줍니다.

­태양 빛을 받는 동안 체력 회복 속도와 마력 회복 속도가 200% 증가.

­광 속성 데미지 10% 증가.

­광명의 교단의 우호도 증가.

======================

가호계열 특성은 얻기 힘들어서 문제지, 가지고 있으면 어떤 직업이든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는 좋은 특성이다.

심지어 가호를 내린 신이 좋아할 만한 일을 반복하면 가호의 랭크가 상승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걸 여기서 얻네?

상태창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잘 무장한 경비대. 그중에서도 한층 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중년인이 어느새 사라진 결계를 넘어온 것이다.

“나는 게프 시 경비대의 대장인 닐슨 가드너라고 하오. 귀하의 성명을 물어도 되겠소?”

“아, 저는 얀델이라고 합니다.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 사교도가 보여, 조금 파헤치려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허어. 아카데미 재학생이었소? 하기야. 아직 어려 보이는데 그렇게 빨리 던전을 돌파하려면 적어도 아카데미 출신은 되어야겠지. 헌데 옆에 있는 이 여성분은…노예?”

카를라의 목덜미를 확인한 닐슨이 의아함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노예의 마나 코어를 부수지도 않고, 무장까지 제대로 챙겨줬으니 신기한 거겠지.

놀란 거야 뭐…카를라의 미모가 보통 수준은 아니니까.

혹시 어제 경매장에서 카를라를 샀던 게 나라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 재빨리 손사래 치며 생각해뒀던 내용대로 대답했다.

“아이고. 재학생이라뇨. 이제 입학시험 치르러 가는 지망생일 뿐입니다. 이쪽의 노예는 제 후견인께서 붙여주신 호위 겸 시중 역이고요.”

“지망생…? 놀랍구려. 벌써부터 이런 실력인데,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엔 어찌 될지…아, 그래서 후견인께서 이런 노예를 선물했나 보오.”

“하하…그분께서 좋게 봐주신 덕이죠.”

은근슬쩍 뒷배가 있다는 것처럼 굴자, 닐슨의 태도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카를라 수준의 노예를 턱 넘긴다는 점에서, 내 뒷배가 보통은 아니리라 짐작한 거겠지.

내가 노린 반응이기도 하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생긴 일종의 노하우.

돈은 언제나 옳지만, 이를 지키기 위한 무력이나 권력이 없다면 나는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더라.

애써 카를라에게서 시선을 돌린 닐슨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얀델이라 하였소? 방법은 다소 거칠긴 했으나, 사교도 무리를 찾아내고 놈들이 숨겨둔 던전까지 클리어했으니, 도시에서 마법을 사용한 건을 문제 삼지는 않을 거요.”

“제 성급한 실수를 감싸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허허…사교도의 섬멸은 신실한 자들의 의무 아니겠소. 노고에 따른 보상 또한 있을 것이오. 다만, 정황 조사를 위해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소만….”

“제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답해드려야죠. 이 또한 선량한 제국인으로서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훌륭하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닐슨을 따라 지하도를 빠져 나갔다.

카를라가 이쪽을 걱정스레 쳐다보았지만 문제될 건 없다.

중간 과정을 전부 스킵하고 다짜고짜 땅부터 무너뜨리긴 했으나, 본래의 추적 에피소드는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서 적당히 그럴듯하게 대답해주고 오면 되겠지.

풍둔 아가리술…ON!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