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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8화 (18/230)

〈 18화 〉 스킵(물리)

* * *

“클린!”

카를라의 시동어가 울려 퍼지자, 주변을 감싸는 마법진.

나와 카를라의 몸에 묻은 정사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고서야, 인벤토리에서 벗어던졌던 각자의 옷을 꺼냈다.

“주인님의 그 능력은 정말 편리하네요.”

“그렇지? 아공간 가방이랑은 비교도 안 되더라고.”

예를 들어 빵 10개를 집어넣는다고 해보자.

일반적인 아공간이라면 빵 10개 분량의 공간을 차지하겠지. 그야 빵 10개를 넣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벤토리는 조금 다르다.

신기하게도 게임 시스템이 적용된 터라, 같은 물건은 999개까지 중첩해서 집어넣을 수 있다.

빵 1개 분량의 공간으로 999개까지 집어넣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 외에도 자동 정렬 기능이나, 집어넣은 물건의 시간이 정지한다거나, 골드에 한해서는 무한히 집어넣을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아공간 마도구보다는 편리하지.

게임 이야기를 제외하고, 적당히 설명해주자 옷을 갈아입던 카를라가 입을 헤 벌렸다.

“와…그럼 이 던전에서도 그렇게 좋은 게 나오는 건가요?”

“글쎄….”

이미 게프 던전의 보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여기 보상이 초중반 필수 템이긴 한데, 인벤토리에 버금가는 성능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물론 이를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어깨만 으쓱였지만.

“던전의 보상은 워낙 천차만별이잖아. 거기에 여기는 준비만 철저히 하면 우리 둘이서도 클리어 가능한 곳이라 그렇게까지 좋은 보상이 나오진 않을 거야.”

“으음…그런가요….”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쉬워하는 티를 팍팍 내는 카를라.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나가면 아마 출구 주변을 경비대가 둘러싸고 있겠지.

약간의 연출이 필요하다.

“카를라. 이리 와 봐.”

“네? 무슨 일이세요 주인님?”

마찬가지로 옷은 다 챙겨입고, 마지막으로 악세사리 형 마도구를 확인하던 카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온다.

자신이 무엇을 당할지도 모르는 초식동물 같은 무방비한 모습.

그런 카를라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다가….

“얍.”

“흐앙!”

기습적으로 카를라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에잇! 에잇!”

“아얏! 아, 아파요 주인님!”

거기에 중간중간에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까지.

누가 봐도 유치한 괴롭힘 같은 모습이지만, 이제 와서 내가 카를라를 괴롭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왜 이러세요 주인님…괴롭히지 말아 주세요…히끅.”

음. 이유가 방금 생겼네.

산발이 된 머리를 부여잡고, 오들오들 떠는 카를라는 솔직히 좀 귀여웠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른 이유로 카를라의 머리 스타일을 망가뜨린 거다.

이건 일종의 생색이다.

여러분이 사교도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사고 치고 도망간 게 아니라, 이렇게 고생해가며 던전을 클리어 했습니다~ 하는 어필.

원래 이런 건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거니까.

“알겠어? 그냥 괴롭힌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야.”

간략하게 설명해주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으으…네. 그건 이해했어요.”

“좋아. 그럼 이제 옷도 좀 찢어 놓자.”

“네?! 아, 안돼요! 주인님이 처음 사주신 선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중에 더 좋은 걸로 사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아…안 되는데…정말 안 되는데….”

울먹거리면서도 차마 거스르지 못하고 주춤주춤 내 앞에 서는 카를라.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 옷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네…하, 하지만 저도 이 옷도 결국 주인님의 것이니 마음대로 하셔도 괜찮아요…정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는 카를라.

만약 카를라가 일부러 이러는 거라면 여우도 이런 여우가 따로 없겠으나…지금까지 봐온 모습에 의하면 그럴 리 없겠지.

저건 그냥 정말로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다.

“…그냥 흙만 좀 묻힐까? 지금 생각해 보니 넌 마법사잖아. 마법사가 전위에서 구른 것처럼,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건 오히려 의심스럽잖아.”

“저, 정말요?”

“어. 그러니까 저쪽 바닥에서 좀 뒹굴다가 와.”

“네! 그렇게 할게요 주인님!”

신나서 폴짝이며 멀어지는 카를라. 프로미넌스 플레어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의 땅에서 어설픈 움직임으로 쓰러지며, 옷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사실상 카를라 혼자 클리어한 것이나 다름없지만…솔직히 밝히기엔 너무 눈에 띄는 내용이다.

그러니 나도 전위에서 마법의 여파를 몸으로 맞아가며, 싸웠다는 설정으로 밀고 가야지.

보스 전에서는 실제로 내가 몸빵하기도 했고.

멀리 갈 것 없이 잿더미가 된 근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보기도 하고, 얼굴에 검댕도 좀 묻혀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주인님 주인님! 시키신 대로 했어요! 어때요? 좀 고생한 것 같아 보이나요?”

어느새 꼬질꼬질해진 카를라가 돌아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그리 말했다.

…얘는 왜 꼬질꼬질해도 이쁘지?

원판 불변의 법칙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면 괜찮네. 잘했어. 그럼 이제 나도 해줘.”

“네? 뭐를요? 아, 주인님도 이제 막 화재현장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보여요!”

“아니, 그거 말고 머리말이야 머리.”

내가 카를라의 머리를 산발로 만들었듯, 내 머리도 더럽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내가 직접 하면 좀 디테일이 떨어질 것 같거든. 카를라 네가 좀 해줘 봐.”

그리 말하며 머리를 내밀자, 카를라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가 주인님의 머리를요…?”

어쩐지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

뭔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그곳에는 잔뜩 들뜬 표정의 카를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하아….”

“카를라?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냥 머리만 좀 엉망으로 만들면 되는데.”

“주인님을 엉망진창으로요?!”

어째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지?”

“네, 네! 물론이죠! 그럼요! 제대로 망가뜨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

불안하다. 엄청나게 불안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기도 하고, 한번 맡긴 일은 끝까지 믿고 맡긴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들이밀었다.

꼴깍.

한차례 침을 삼킨 카를라가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사부작 사부작.

가느다란 카를라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두피를 살살 간질인다.

너무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착실히 머리카락이 엉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걱정했는데 잘하고 있잖아?

…머리카락에 닿는 카를라의 숨결이 너무 거센 게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

철저하게 계산된 서로의 꼬질꼬질함을 보며 나와 카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나갈까?”

“네. 주인님.”

아직도 허공에서 일렁이는 출구 포탈 쪽을 향해 카를라를 데려갔다.

그 앞에서 서서 가볍게 심호흡을 하는 카를라에게 간단하게 앞으로의 일을 일러주었다.

“출구 포탈로 나가자마자, 던전이 사라지며 보상이 나타날 거야.”

“네. 반투명한 형태로 공중에 나타난다고 했던가요?

“맞아. 공략자인 우리 말고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지만, 우리가 손을 대는 순간 실체를 가지게 되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

“네? 왜요?”

“주인을 가리는 마도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지?”

“아…설마?”

“그래. 가끔 신들이 내린 은총 중에도 먼저 쥔 사람에게 귀속되는 물건이 있거든. 건드리기 전에 알아봐야지.”

“절대 안 건드릴게요. 저 주인님 말 잘 들어요.”

손을 뒤로 샥 뻗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카를라.

혹시나 멋모르고 만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내가 굳이 카를라에게 이 말을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로 게프 던전의 보상이 귀속 장비 템이라 그렇기 때문.

처음 클리어 했을 때 생각없이 궁수캐로 건드렸다가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괜히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카를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네!”

나와 카를라가 동시에 출구 포탈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

.

겨우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일변하는 시야.

어느새 우리는 탁 트인 야외가 아닌, 좁고 어두컴컴한 지하도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누구냐! 같은 경비대의 상투적인 반응이….

“크하하하! 너희 따위가 이 몸의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경비대 대신, 웬 시꺼먼 로브를 뒤집어쓴 녀석이 우리 앞에서 광소하고 있었다.

뭐지?

물론 경비대도 제대로 도착해있긴 하다. 새까만 결계 같은 것 너머에서 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니까…정황상 저 로브쟁이가 결계를 쳐서 경비대를 막았고, 우리는 던전을 나와보니 로브쟁이의 뒤였다는 건가?

“거기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기나 해라! 위대하신 합일께서 내가 여기서 죽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으니! 흐하하하하!”

묘하게 익숙한 녀석이네.

저 재수 없는 목소리도, 로브에 새겨진 이빨 자국 문양도, 수십 번은 들어봤을 대사도….

…수십 번은 들어봤을 대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우웅­

던전이 사라지며 들리는 기묘한 소음. 그와 동시에 나와 카를라의 앞에 생겨난 작은 빛무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띠링!

클리어 보상을 손에 쥐자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시야 한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조금 전의 소음과,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으로 이쪽의 존재를 눈치챘을 터.

그러니 무어라 대응하기 전에 조져야 한다.

반투명한 단검이 순식간에 실체를 갖추고는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댄다.

단검을 손에 쥐자 조잡한 무기술의 특성이 활성화된 덕에, 아주 약간 강인해진 몸뚱이.

일반인보다 조금 더 강해진 힘을 한데 모아, 사교도의 등을 향해 전력으로 내질렀다.

“무슨…!”

녀석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고 있었지만…이미 늦었다.

푸욱.

“컥….”

폐까지 관통당한 탓에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는 사교도.

“어, 어떻게….”

“그거 알아?”

재빨리 단검을 뽑아, 이번에는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내리찍었다.

푹!

“끄윽!”

“사교도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말이 많아서 짜증난다는 거.”

스킵 불가능한 이벤트 컷신에 등장하면서 대사까지 많다니.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어야 하는 플레이어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당시의 울분을 담아 연거푸 녀석의 상처 부위를 헤집었다.

처치 알림이 뜨기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니,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처리해야지.

푹! 푹! 푹!

순식간에 등짝이 넝마가 되어버린 녀석이 결국 힘없이 쓰러진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신속하고 조용한 죽음.

처음으로 스킵(물리)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청명한 종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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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도 간부 처치!】

­혼탁한 합일의 주교 피에트로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는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혼탁한 합일의 대업이 크나큰 난관에 봉착합니다.

­혼탁한 합일이 당신을 공적으로 지정합니다.

­정의로운 광명이 자신의 송곳니로 악을 처단한 것에 크게 만족합니다. ‘특성: 태양신의 가호(C)’ 를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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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녀석의 죽음을 단언하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동안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아니, 튜토리얼 보스가 여기서 왜 나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찔러 버렸잖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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