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던전 O스(4)
* * *
제단 뒤편의 일렁거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의 뒤틀림에 손이 닿는 순간.
“어어?”
시야가 일변했다.
어두컴컴하고 꿉꿉한 지하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물 썩는 냄새와 습기로 가득한 늪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를 자각하자마자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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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던전 발견!】
당신은 게프 시의 소문을 추적한 끝에 무시무시한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괴담은 사실이며, 그 범인은 혼탁한 합일의 신도들입니다.
사교도들을 처치하여 봉인의 약화를 멈춰 세우십시오. …혹은 던전 자체를 클리어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이건 신들은 당신의 노고에 보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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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드디어 이걸 보네.”
던전에 진입할 때 나오는 알림.
지금껏 던전에 들어갈 엄두도 못 냈기에, 3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녀석이다.
다만, 시스템에 융통성이 없던 걸까.
귀찮은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던전을 찾았음에도, 정상적으로 추적했을 때와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정해진 문구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지만.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인벤토리에서 준비해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라가 뒤따라 들어왔다.
“히끅!”
“…아직도 딸꾹질해?”
“이젠 거의 멈췄어요오….”
부끄럽다는 듯 말을 흐리는 카를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을 차분히 관찰하는 것이 아카데미에서 배우기는 잘 배웠나 보다.
던전으로 진입하고 처음 발을 디딘 지역은 일종의 안전지대다.
물론 안전지대에만 있으면, 클리어하지 못하니 언젠가는 움직여야겠지만…그 전에 준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여기서 주변을 파악하고, 환경에 맞는 계획을 짜는 게 정석적인 공략법이다.
이는 아카데미에서도 배우는 내용이기에 카를라도 잘 알고 있겠지.
얌전히 내 옆에서 마력을 끌어 올리는 카를라에게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을 하나씩 넘겨주었다.
“탐지 마법은 쓸 필요 없으니까 취소해. 대신 이거부터 쭈욱 마셔.”
“포션? 주인님 벌써부터 강화 포션을 마시는 건 너무 아깝…어어? 하나 더요? 두 개? 아니 왜 자꾸 주세요?!”
“포션이야 효과가 끊길 때마다 하나씩 더 마시면 되지. 재고는 충분하니까 일단 받아.”
기겁하는 카를라에게 건네준 포션은 차례대로.
신체 강화 포션, 감각 강화 포션, 냄새 제거 포션, 체력 지속 회복 포션, 마력 지속 회복 포션으로.
전체적인 스펙을 높이고, 기습당하는 걸 피할 수 있으며, 전투 지속 능력까지 펌핑할 수 있는 조합.
게임 시절에는 흔히들 국룰 셋이라 부르던 물약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범용성을 우선시한 것.
각 던전의 세부사항에 맞게 미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인벤토리에서 스크롤 몇 개를 꺼냈다.
“주인님? 설마 그 스크롤도…?”
“잘 알고 있네. 전부 활성화 시켜.”
“…….”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을 찢…으려다가 마는 카를라.
“저…주인님?”
“지속시간 아까운데 왜 그래?”
“호, 혹시. 정말 혹시나 말인데요…나중에 주인님 돈이 다 떨어지셨다고, 저를 팔아버린다거나 그러시진 않을 거죠? 네?”
“엉?”
“그치만…그렇잖아요? 주인님 저보다 어리시다면서요…귀족처럼 생기긴 하셨지만, 귀족은 아니라면서요…! 이렇게 돈 막 쓰시다가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당연한 말이지만, 카를라를 되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인벤토리에 쌓인 골드도 아직 넉넉하고.
하지만 저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장난이 치고 싶어지는 것 또한 사실.
“당연히 돈 다 떨어지면 팔아야지.”
“허억…!”
“근데 그 돈이 다 떨어질 일이 없을 거야.”
“허엉…?”
멍청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살랑이는 백금색 머리카락을 보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카를라야 카를라야. 너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내 노예라는 뜻이란다. 남은 노예 생활 고달파지기 싫으면, 괜한 걱정 말고 스크롤이나 마저 찢어.”
“늙어 죽을 때까지요…? 정말요? 흠흠. 그렇다면 더 이상 주인님의 결정에 첨언하는 것도 무례한 짓이겠죠.”
“???”
뭐야. 왜 협박했는데 좋아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의욕이 충만해진 카를라가 하나둘 스크롤을 찢기 시작했다.
우웅. 웅. 우우웅.
경량화, 헤이스트, 인비저블, 이글 비전, 실드.
각각 늪에 발이 빠지는 걸 방지하면서, 선빵을 날릴 수 있게 해주고, 시력을 강화해 명중률을 높여주는 조합이다. 실드는 단순한 보험이지만.
카를라에게 중첩되는 버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 몫의 포션을 들이키는 사이.
모든 버프를 받은 카를라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거나, 간단한 마법을 써보며 평소와 다른 감각을 몸에 익혀갔다.
조금 전과 달리 제법 진중한 표정.
역시 마법이 관련된 일에는 사람이 달라지네.
마지막으로 나 또한 필요한 스크롤을 몇 개 찢으며 전의를 다졌다.
이제 곧 시작이다.
이 세상에서의 첫 던전 공략이.
***
공략 자체는 수월했다.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이 세상에 떨어진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게임 시절의 공략 루트가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
덕분에 보스를 향해 쉬지 않고 달리며, 가끔 마주치는 몬스터는 쓰러뜨리고, 다시 달리다가 마주치는 몬스터를 또 쓰러뜨리고….
그러한 강행군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가라 카를라! 파이어 볼!”
“화, 화염이여! 타올라라! 폭발하라! 파이어 볼!”
물 위를 뛰어다니듯, 가벼운 걸음으로 늪지를 가로지르던 카를라가 반사적으로 영창을 외웠다.
하도 많이 썼더니, 그 사이에 몸에 밴 것이리라.
황금색으로 요란스레 반짝이는 스태프 위에 모이는 열기.
저 멀리에서 멍하니 참방거리던 빅 마우스가 카를라의 마법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빅 마우스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머리 때문에 개구리 주제에 뛰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몬스터다. 방향 전환 만큼은 신체 구조상 굼뜰 수밖에 없다는 소리.
표적이 된 빅 마우스가 뒤늦게 옆으로 굴러보지만…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결국 옆 머리를 내어준다.
콰아아앙!
“꿰에에에엑!!”
빅마우스의 거대한 머리를 뒤덮은 폭발.
그리고 백린이라도 뿌린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빅 마우스가 불붙은 머리를 늪지에 박으며, 어떻게든 꺼보려 하지만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연성의 점액때문에, 불길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지.
“궤에에에….”
결국 빅 마우스 한 마리가 불길에 휩싸인 채, 천천히 오그라들어 거뭇한 잿더미가 되었다.
“으아…몇 번을 봐도 이건 적응이 안 되네요. 아무리 빅 마우스가 화염 마법에 약하다지만,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이라니….”
카를라의 말대로 이는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파이어 볼은 화염 이외에도 폭발이 주는 물리적인 충격과, 약간의 넉 백 효과도 있어 이래저래 유용한 마법이지만.
그래봤자 하급 마법.
아무리 카를라가 중위 마법사라지만, 지금처럼 달리면서 캐스팅한 마법의 위력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하지만.
“과포화의 반지, 화염 정령의 목걸이, 일격의 브레이슬릿. 거기에 은신 치명타까지. 이 정도면 한방 컷 나고도 남지.”
“그래도 너무 효율이 안 좋잖아요 주인님…전 이거 보스 몬스터랑 싸울 때 쓸 줄 알았단 말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
과포화의 반지는 마력 소모를 2배 늘리고 마법의 위력을 1.2배 늘리는 마도구고.
화염 정령의 목걸이는 화염 마법을 20% 강화하지만, 모든 마력의 소모를 20% 증가시키며.
일격의 브레이슬릿은 미리 마력을 충전해 두면, 자동으로 다음 마법에 모아둔 마력을 추가로 불어넣어 주는 효과가 있다.
세 번에 걸쳐 증폭된 카를라의 마법을 기습적으로 맞았으니, 중하급 몬스터인 빅 마우스가 버틸 수 있을 리가.
하지만 H&A는 무척이나 밸런스에 민감한 게임이다.
무조건 이로운 효과는 없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부작용이 존재한다.
내가 마법사 특성만 모아둔 캐릭터를 만들었더니, 마법을 못 쓰게 마력 감응 불능 체질을 스타트 패널티로 달아놓은 것처럼.
위력 증폭 계열 마도구는 하나같이 효율이 개판이다.
그렇기에 강적 상대로만 잠깐 써먹는 게 정석이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마력이 부족해? 그럼 마력 포션을 마셔. 아, 포션 중독은 걱정 말고. 일부러 중독 효과가 거의 없는 고급 포션으로 사왔으니까.”
“끄으으…또 포션을….”
“아, 그러고 보니 슬슬 버프 리필할 때도 됐네.”
마력 포션에 이어 버프용 물약까지 꺼내자, 카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시만요 주인님! 저 지금 막 뱃속에서 포션이 찰랑 거리고 있는데요…? 여기서 더 마신다구요?!”
“어허. 이런 건 사이클이 끊기면 효율이 확 떨어지거든? 그래도 곧 보스 앞에 도착할 테니 이게 마지막이야.”
포션을 손수 뜯어 입술에 가져다 대자, 울먹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카를라.
“이젠 무리에요…! 그런…그런 게 들어갈 리가 없잖아요!”
“괜찮아. 다 들어가게 되어있다니까. 잔말 말고 벌리기나 해.”
“아, 안대앳…헤그극….”
생각해 보면 어제 여관에서 식사할 때 좀 과하게 먹어치우긴 했지. 그게 소화가 덜 됐을 수도 있겠네.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이번 공략은 풀 버프를 전제로 하고 짰으니까.
“으읍….”
입을 틀어막는 카를라의 등을 쓸어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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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죽일 거야! 죽일 거예요! 그럼 더 안 마셔도 되죠?! 말리지 말아주세요 주인님!”
“어, 응.”
배가 통통해진 카를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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