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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8화 (8/230)

〈 8화 〉 던전 O스

* * *

“으응.”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카를라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

최근에는 지하에만 갇혀있느라, 쬘 일이 없던 따사로운 자연광이 눈가를 간질인 탓에 일찍 일어난 것이리라.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카를라가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여긴 그 지긋지긋한 지하실이 아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것도 잠시.

막 잠에서 깬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전날의 기억을 되짚던 카를라가 어젯밤의 일까지 떠올린 순간.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물들었다.

“흐얏…읍!”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카를라.

제 손으로 입을 꾹 누른 카를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주인인 얀델이 곤한 표정으로 잠들어있었다.

혹시라도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가는 깨우고 말았을 터.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지로 잠에서 깨는 걸 싫어한다. 과거의 자신이 매번 하녀들에게 투정을 부렸듯 말이다.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린 카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더 이상 그때의 귀족 영애가 아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할 노예일 뿐이지.

혹시라도 얀델이 일어날까, 조심조심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카를라는 세수라도 하려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흣!”

하복부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통의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제의 격렬한 행위.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재차 저으며, 객실 내부의 세면대로 향했다.

하지만 욕실의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앞에 세워둔 큼직한 전신 거울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건….”

잇자국과 키스 마크로 뒤덮인 한쪽 목덜미.

젖가슴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며, 부어오른 아래쪽에는 어제의 흔적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들이밀면, 싫어도 되새길 수밖에 없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정사를.

그녀의 주인이 어떻게 자신을 다루고, 자신이 그의 손에서 어떻게 울었는지.

세세한 기억을 떠올린 카를라가 수치심에 몸부림치려다……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카를라가 철창 속에서 했던 상상보다 몇 배는 좋은 상황이었다.

우선 얀델은 카를라의 마나 코어를 부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마나 코어란 또 다른 팔다리 같은 존재. 그만큼 당연하면서, 중요한 기관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노예에게 마법이 허락될 리 없으니, 보통은 스스로 코어를 폭주시켜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얀델은 그러지 않았지만.

그뿐이랴. 카를라의 마법사로서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린트불룸 호흡법의 전수와 기초마법의 교육을 명하지 않았던가.

이는 마도명가의 직계로서, 자신의 마법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카를라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거기에 카를라 자신을 대하는 방법은 또 어떠하고.

귀족 시절에는 넌지시 들어봤으며, 노예가 된 이후에는 직접 봐온 노예들의 처우는…불합리 그 자체였다.

기분이 좋아졌다고 두드려 패고, 반대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해도.

아니, 실제로 그렇게 노예가 죽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노예란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한 존재였으니까. 굳이 왜 죽였는지 같은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카를라는 가치 있는 노예니 변덕으로 죽는 일은 없겠지.

그렇다 해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허나 얀델은 카를라에게 상과 벌을 제시했다.

심지어 그 평가 기준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느냐라니.

노예가 주인의 말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런 당연한 일만 지키면 상을 주겠다는 소리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처사인가.

하지만 얀델은 그저 자비롭기만 한 주인이 아니다.

무려 잘생기면서 자비로운 주인이었지.

카를라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어지간한 귀족보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짓궂은 미소를 띠며 자신을 희롱하던 입술.

보라색 눈동자는 정념에 가득 차 있었으며, 집요하리만치 자신을 요구하는 태도는,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어제의 흔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냥 지우지 말까…?”

본래 카를라는 가볍게 세수한 뒤에, 클린과 큐어로 전신을 깨끗이 할 생각이었다.

마나 코어는 멀쩡하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지만 어제의 얀델이, 그렇게나 자신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모습은 얀델의 취향일 터.

카를라는 잠시 거울을 바라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얀델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는, 슬그머니 얀델의 옆에서 몸을 말았다.

그녀의 어린 주인이 이 모습을 좋아해 주길 바라며.

***

눈을 떠보니, 내 옆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카를라의 모습이 보였다.

둘다 기절하듯 잠든 터라 제대로 뒷정리를 못해서일까.

카를라의 새하얀 목덜미에는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어째 이게 노예 각인보다 더 눈에 띄는 것 같네.

아마 여기서는 보이지 않을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겠지.

괜시리 카를라의 목덜미에 난 잇자국을 만지작대고 있자니, 가려움에 잠에서 깬 걸까.

“으…헷?”

카를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잠에 취한 듯 멍한 표정. 깜빡이는 루비색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남의 집 토끼가 우리 집 토끼가 된 것만 같은 느낌.

뭐지?

아무리 카를라가 자기 처지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 극적인 변화인데.

“주인님? 일어나셨나요…?”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미소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카를라.

그래. 이유가 뭔 상관이야. 귀여우면 됐지.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목을 간질여주자,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꿈틀거리는 카를라.

“흐읏…하으….”

묘하게 야릇한 목소리와 표정.

어제의 일이 떠올라, 이대로 덮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가까스로 참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일이 많으니까.

“읏차. 일어났으면 빨리 씻고 나가자. 아, 혹시 클린 마법 쓸 줄 알아?”

“흐우…네. 실용마법은 대부분 익혀뒀어요. 쓸까요?”

“그래. 물로 씻는 게 더 깔끔하겠지만, 오늘은 좀 바빠질 예정이거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미약한 마력의 유동.

이제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되어서일까. 카를라의 마나 코어가 주변의 마나와 공명하는 것이 느껴진다.

다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1초 정도?

어느새 카를라의 손끝에 피어오른 푸른 마법진.

이를 들어 올린 카를라가 주문을 완성시켰다.

“클린.”

그와 동시에 나와 카를라를 동시에 집어삼킬 만큼 넓어진 마법진.

간단한 도형이 그려진 마법진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푸른 빛을 경계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깨끗해지는 몸뚱이.

“…지금까지 써온 클린 스크롤이랑은 출력의 차원이 다른데? 이 정도면 직접 씻는 것과 별 차이 없을 정도 아냐?”

“헤헤. 그야 제가 어지간한 하급 스크롤 제작자보다 실력이 좋거든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는 카를라.

물론, 아직 알몸이었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슴에 더 시선이 향했지만.

이쪽을 도발하듯 흔들리는 모습이 괘씸해, 손으로 고정시켜 주었다.

몰랑.

“흐앗…!”

가슴을 만지작대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카를라.

어제 그렇게 만져지고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걸까. 목덜미를 물린 토끼같은 반응이다.

“그나저나 이 손자국은 안 없어지나 보네?”

내 의문에 카를라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 이건 이물질이 아니라 작은 상처 같은 거라서…아읏…큐어 마법이라면 없앨 수 있는데…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흠.”

잠시 카를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우기는 좀 아쉬운데….

“아픈 건 아니지?”

“네? 네에…조금 간질간질하긴 한데, 그뿐이에요.”

“그럼 됐어. 이대로 옷 입고 나가자.”

“이, 이러고요…?”

“왜. 설마 싫다는 건 아니겠지?”

명령 불복종이냐는 의미를 담아, 착 목소리를 깔았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자잘한 일에서부터 주종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대로 입으면 되는 거죠? 네! 그럴게요 주인님!”

어째서인지 살짝 뿌듯한 어조로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뭐야…왜 좋아하는데?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백금발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픽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새 옷을 꺼냈다.

아무튼 시키는 대로 한다는데, 문제 삼을 건 없겠지.

그렇게 속옷부터 차례대로 옷을 갖춰 입는 것도 잠시.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니.

“…….”

“아.”

주섬주섬 드레스를 주워들던 카를라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태창과 더불어,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없는 특전 중 하나.

인벤토리.

이 세상에도 아공간 가방이나, 팔찌 같은 인벤토리 비슷한 용도의 마도구가 있어, 종종 그런 마도구라 둘러댔으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에서 인벤토리를 열지 않았던가.

거기에 상대는 진짜 마법사인 카를라니 지금까지처럼 마도구라고 둘러대기는 힘들겠지.

“어…그, 저는….”

자기가 봐선 안 될 것을 봤다고 여기는 걸까. 카를라가 우물쭈물 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말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주인님!”

“봐도 괜찮은 거야.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지만.]”

혹시 몰라 노예 각인을 통한 명령까지 내리자, 그제야 손가락 사이로 빼꼼 눈치를 보는 카를라.

“…정말요?”

“진짜야. 나중에 말해 주려 했는데, 지금 알려주지 뭐.”

물론 게임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마도구가 아니라는 걸 들켰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설정이 하나 더 있으니까.

“이건 내가 던전을 클리어하며 얻은 능력이야.”

“더, 던전…!”

눈을 땡그랗게 뜨고 놀라는 카를라.

H&A는 히어로 앤 아카데미의 약자다.

하지만 히어로가 있으려면, 그만한 위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는 악신이 존재하고, 놈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에우렐리아 대륙을 노리고 있다.

그런 악신의 군세를 선신들이 봉인해둔 곳이 바로 던전.

던전을 클리어한다는 건, 악신의 군세를 하나 쓸어버렸다는 소리고, 이는 영웅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위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이 세상에는 제법 많은 던전이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다.

다만, 누가 위험하게 던전에 몸을 던지겠는가.

수백년이 지나, 봉인이 풀리면 내부의 몬스터들이 쏟아진다지만…그건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

오로지 영광만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그래서 신들은 보상을 내걸었다.

“이게 그 신들의 은총이군요….”

“맞아. 영혼에 귀속되는 아공간이지.”

봉인을 유지하던 힘의 일부를 공략자에게 하사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신의 은총이라고 부르며, 보통은 일반적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특성이나, 특별한 장비의 형태로 주어진다.

나는 그중에서 편리한 아공간 특성을 받았다…라는 설정이다.

물론 에우렐리아 대륙의 모든 던전을 싹 다 클리어해봐도, 그런 은총은 없지만 이걸 누가 알겠는가.

말 그대로 전부 클리어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인데.

미지를 좋아하는 마법사답게 카를라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카를라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뭘 그리 넋 놓고 있어. 너도 하나 클리어할 건데.”

“…넹?”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그 순진한 모습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말했잖아? 오늘은 바빠질 예정이라고.”

입학 시험 전에 딱 하나만 클리어하고 가자.

카를라의 능력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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